'책 읽다가 남기고 싶은 부분들'에 해당되는 글 32건

  1. 다중 시민권 - 이리스 영과 마이클 왈처 부분 2010/09/01
  2. 린다 제릴리의 "페미니즘, 그리고 자유의 구렁텅이" (2) 2010/08/12

p. 24에서부터  "citizenship denates 서문"

 

우리는 두 접근을 대조할 것이다.
1. 이리스 영의, 정의와 공정함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중 시민권의 제도화를 요구하는 관점과
2. 마이클 왈처의 강조, 그러한 다양성의 측면에서 한 형태의 시민권-정치적-은 다른 견해를 대신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공통의 기반으로서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
영이 집단적 권리에 관심을 가진데 반해 왈처는 공적 삶(다른 방법으로 경쟁적인 집단들의 공통 영역)의 깊은 중요성에 초점을 둔 사회적 다원성으로 결론맺는다.
이들의 관점은 해방의 대안적 개념들이다!

영은 보편적 포섭이라는 자유주의적 약속에 대한 가장 종합적이고 폭넓은 비판을 제공한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동등한 권리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을 한다. 그녀는 단언하길, 그 보편적인 측면에서조차 시민권은 특권으로서의 특징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시민권으로부터의 배제는 본원적 맹세에 따라 살려고 하는 저항의 결과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전통과 공화주의적 전통 양쪽에서 보편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보편적 "대중"의 형성은 그들의 특수한 정체성을 초월하려는 개인에 의한 능력과 의지를 가정한다. "모든 집단을 위한 동등한 권리의 근접한 쟁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배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편성의 필수적 단계로 통합되지 않는 집단이 필수적이고 남아있고 남아있을 것인 한은. 따라서, 그들의 구성원들은 "차이의 딜레마"에 직면한다: 그들은 그들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부정해야만 한다. 시민권이 시민들의 동등한 도덕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은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차이를 주장해야만 한다. 형식적으로 동등한 대우가 그들을 불이익에 처하게 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형식적 평등은 실질적 불평등을 낳는다.


영의 관점에서, 차이들은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거나 롤스가 제안한 것처럼 그 영향을 최소화할 수도 없다. 대신에, 우리는 사회적 이종성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관점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공정함과 같은 정의의 어떤 개념도 집단을 기반으로한 대의제(?)를 제도화함으로써 다양성이 집단들이 서로 배울 수 있고 서로의 다양한 관점과 관심을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한다. 진정한 포함(포섭)은 집단 대의제를 필요로 한다. 반면 동등한 대우는 특수한 집단적 권리를 요구한다. 영은 시민권에 있어 차이의 인정에 찬성하여 논쟁한다. 킴리카가 문화적 차이의 기반에 대한 집단 대의제에 대한 같은 요구에 기반하고 있지만, 영은 미국의 모든 억압당하는 집단을 위한 그런 권리를 추구한다. 그녀는 여성, 흑인, 원주민, 아시아인, 치카노, 푸에르코리코인, 그리고 다른 스페인어 사용 미국인, 게이, 레이비안, 노동계급, 빈민, 노인, 그리고 정신적 물리적 장애인 등.
 

펠리드와 샤피르의 실증 연구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팔레이스타인 분쟁의 맥락에서 몇몇 시민권의 현실을 연구하고, 다중성의 위험성과 전망을 둘 다 논증한다.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점령한 영토에서 시민권의 결여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시민권 담론의 공존-공화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은 다양한 위계적으로 계층화된 집단의 편입과 다른 집단의 완벽한 배제 둘다를 허용한다. 차이화된 시민권은 수직적 또는 영역적인 것만큼이나 위계적인 것 같다. 시민권의 그러한 위계는 마샬에 의해 구분된 시민권의 형태를 넘은 투쟁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이 모두에 의해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지는 않고 일부는 일부 집단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사회적 연구를 위한 틀로서 시민권의 역학을 연구하는 가능한 모델을 제공한다. 이는 또한 집단적 권리의 증가 또는 하나의 자유주의적 틀로의 와해(collapse)가 효과적인 편입을 보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영은 집단적 권리에 기초하여 정치적 권리를 구분하는 것이 포함(inclusion)의 다중적 기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지각색의 권리를 가진 시민들로 이어지는... 그녀는 집단 그자체에서 사회로 그 불이익의 장소를 이전시킴으로써 그런 위험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억압받는 집단을 특수한 대우의 필요에서 이상한 케이스로 보는 대신에 그녀는 사회의 불균질성과 사회의 자연적 조건으로서 그 구성원들의 "다원적 환경(조건)"을 주장한다. 보편적 시민권의 동질화하는 경향을 제거하기 위해, 다수 문화 스스로가 진정으로 이종적인 문화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왈처는 "좋은 삶"의 네가지 이상을 비교하고 비평한다.-시민,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국가의 구성원- 그리고 서로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연구한다. 첫번째는 사회의 공적 삶에의 활동적 개입의 영역이다. 반면 나머지 셋은 정치에서 더 분리되어 있고 모호한 관계이다. 왈처가 시민권을 그리스 전통에서처럼 도덕적 행위로서의 정치와 그리고 인간성의 가장 높은 형태로서의 정치와 연관짓고 있어서 사실 네가지 좋은 삶에 대한 견해 각각은 각자의 시민권 담론을 갖고 있다. 이들 좋은 삶에 대한 견해 사이의 논쟁은 사실 시민권 논쟁이다.
그리고 왈처의 다면적 연구틀에서는 정치적 시민권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그것은 개인이 "좋은 삶에 대한 그들 각자의 관념을 넘어 공통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시민권의 영역에 있다. 그리고 국가를 그들의 공통의 삶을 형성하는 정치적 도구로서 이용하는. "따라서" 왈처가 결론짓는 것은, "시민권은 모든 우리의 실질적이고 가능한 멤버십들 사이의 어떤 실천적인 우선성(reeminence)을 갖는다" 시민권 이론에 대한 모든 변화, 변형, 그리고 덧붙임 이후에 그리스 전통은 그 독특한 지위를 잃었다. 하지만 왈처가 보여주듯이 그것은 계속적으로 사회적 멤버십에 대한 일반적 핵심을 제공한다. 왈처는 결합과 사회적 통합의 원리로서 시민권의 그리스적 개념의 지속적인 힘을 확인하면서 우리를 전통의 시작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나 그는 시민권의 전통을 시민 사회의 현대적 개념으로 완성시킨다. - "a setting of setting"(설정의 설정) - 롤스에 의해 추구된 관용에 대한 추구(탐구)의 다른, 덜 형식주의적인, 개념을 제공하면서. 시민권이 사회적 통합의 기초이지만, 왈처는 단언키를, 시민사회는 서로의 타고난(고유의) 한계를 강조하는, 경쟁적인 배타적 요구를 허락함으로써 문명을 발생시키는 그 고전적인 임무를 완수한다. 그러므로, 시민권은 우리의 다중적 멤버십 입장들(commitments) 사이에서 특권적 지위를 유지한다.

왈처와 영의 에세이에서 동시대적 논쟁의 윤곽이 가장 날카롭게 조명된다. 왈처와 영이 시민권 담론이 사회적 다원주의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전제와 우리의 근대사회를 특징짓는 다양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 적당한 방법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왈처는 시민권의 정치적 이론틀을 약간의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서 본다.
사회의 모든 개인들이 그 구성원이고 때때로 활동적인 참여자이기 때문에. 그러나 시민권은 공동선(->수정: 공유물?)(common good)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적 요구를 위한 도구로서 소용될 수는 없다.
문화적 또는 종족적 다양성 때문이 아니라 롤스가 주장하듯, 좋은 삶에 대한 두드러지게 다른 이상과 공동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시민사회 내에서 그들의 다원성은 존중될 것이다. 상호 존중의 적절한 목표는 시민권 전통의 통합하는 권위에 의해 고무되는 근대 시민사회 내에서 미치는 범위 내에 있다.
반대로, 영에 있어 시민권은, 그 도달범위가 보편적인 것일 때조차, 정의하기 어려운 공동선에 대한 집착에 대한 내재적 규범 내에 있는 이들에 대한 특권으로서 그 성격의 일부를 항상 유지한다. 따라서, 이른바 시민권의 보편적 특징은 킴리카가 보여준 것처럼 많은 점에서 근대산업사회에서조차 현실이라기보다는 환상인, 그 시민권의 보편성은 차이를 인정하는 시민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녀는 초점의 변화를 제안한다: 공통성에 관심을 갖는 대신에, 또 그에 따라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적어도 간과하는 대신에, 공적 영역을 개인 뿐 아니라 집단에 대한 진정한 대의체를 만드는 것에 우위가 놓여야 한다. 영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시민권의 특징에 반대하지만, 사실 그녀는 시민권 전통이 억압받는 집단을 해방시키는 그 잠재성을 아직 소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양성을 시민권 그 자체의 틀 안으로 통합함으로써 수행될 수 있다. 왈처와 영의 관점을 동시대의 시민권에 대한 논쟁, 그 희망과 두려움, 확대에 대한 한계와 잠재력에 대한 논쟁의 첨단을 대표한다. 그들의 에세이는 우리의 시민사회의 특징을 다투는 논쟁에 대한 딱 맞는 개요이다.
 

<서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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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1 00:18 2010/09/01 00:18

페미니즘, 그리고 자유의 심연

이라고 번역을 하는게 더 멋져보일 수도 있지만

어떤 편이 좋을지는 책을 읽어봐야 알겠음.

 

서장

왜 페미니즘과 자유는 둘다 F로 시작하는가 (응?)

 

"페미니즘의 종말"을 선언하는 출판물이 넘쳐나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사회적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다소간 한계에 달한 것처럼 보인다. 몇몇 비평가에 따르면, 이 종말은 아마도 페미니즘이 도전해 왔던 차별이 어느 정도 과거의 것이라는 부정하기 힘든 사실 속에서 온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젠더 평등은 완전한 사회적 실현을 기다리는 법적 사실이고, 이는 역사적 진보의 논리에 따르면 임박한 것이다. 다른 비평가들은 이것이 명백하게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법적 변화는 자동적으로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지 않고 진행 중인 정치적 운동의 각성(주의? 경계?)를 필요로한다. 이들 비평가들이 페미니즘의 종말을 선언한다면, 이는 승리보다는 패배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옳을 지도 모른다.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운동"을 찾아내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이 자유민주주의 정부의 형식적 제도 속에 안착하지 못했을 때, 이는 페미니즘의 집합적 주체인 "여성"에 의해 제공되었던 방향성을 상실한 잡다한 풀뿌리 투쟁의 분산된 컬렉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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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뭐든 종말이로구나.

이미 모든 것의 종말은 10년도 더 전부터 들어왔는데,

여전히 종말이래니 기가 차다.

바닥을 친다는 비유는 정말 부적절하다. 모든 것들에...

 

E.P. 톰슨이 말했듯이 싸우거나 투쟁하거나 할 수 있다면

굳이 책상머리에 앉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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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11:05 2010/08/12 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