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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배제적 놀이문화

고등학교 때 크라잉 넛이 공연하던 '드럭'에서 슬램하는 걸 좋아했던 나는, 그러나 실제로는 슬램을 할 수가 없었다.

 

(드럭: 언더 펑크 밴드들이 공연했던 홍대 클럽, 현 DGBD)

(슬램: moshing이라고 하는 건데... 펑크 롹 같은 공연 중에 관중들이 서로 부딪히고 밀치면서 추는, 다소 공격적인 막춤?)

 

왜냐면 한번 'mosh pit'  (애들이 막 슬램하는 구역)에 말렸다가는 사방에서 랜덤으로 밀치고 부딪혀오는 남자애들을 내가 같은 힘으로 밀쳐내기는 역부족이고 거의 맞다시피하고 슬램하는 애들을 피해서 나오기까지 한참 헤매기 일쑤였던 것이다. 모쉬 핏의 경계에서 살살 슬램하다가 한겹 두겹 말려서 모쉬 핏 중앙까지 말려들어가서 된통 당했던 기억들이 난다. 휴~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게 '남자애들이 힘이 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 그것이 여성배제적인 놀이문화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여성배제적 문화'라..... 나는 지금 여성을 '배려'해서 살살 슬램하자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뭐, 여성들만의 모쉬 핏을 만들자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뭐, 만들자고 할 수도 있긴 하다만)

 

우선 그러한 문화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여성배제적이라는 점, 여성은 그 문화를 공유하는 주체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

마치 노동자운동이 여성을 배제해왔던 것처럼

미국의 블루칼라들이 헤비메탈의 문화를 만들어낸 과정에서도 여성은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중들이 진흙탕 속에서 완전 aggressive하게 슬램을 하던 나인 인치 네일스의 유명한 공연 실황을 보면서 동경심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 진흙탕 속에 여성은 거의 없었다는 점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었던 '놀이'를 실제로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학교 캠퍼스에서 남자 아이들은 방과 후에 농구 한 게임으로 땀을 빼고 각 과 실습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면서 교육치프와 밤샘 당구게임을 하러 간다. 그래서? 여자들도 끼워달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문화, 놀이공간 자체가 여성배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학교/회사 같은 '공적인 공간'에선 더더욱 그렇다.

 

놀이는 놀이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놀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더 돈독해지게 마련이다.

여자는 낄 수 없는 남자들만의 '2차'를 가서 남성들만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를 공적영역까지 가져간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여성은 배제된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공적 영역에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이문화가 이런 식으로 형성된 것도 있고 역으로, 놀이문화가 여성배제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의 공적영역으로의 진입이 제한받는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고보면 여성배제적인 놀이문화가 극단적으로 바로 매춘이라는 것이다. 남자들끼리 소위 말하는 '2차'가는 거, 그게 극단적으로 여성배제적이면서 여성착취적인 '놀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최근 매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러고보니 참 여러가지 문제들이 연결돼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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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의 미학(?)

나는 최근에 운동이란 걸 하면서 너무 안 꾸미고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근데 의외로 내가 느끼기에 화장하고 꾸민 모습보다 맨 얼굴에 완전 두꺼운 안경을 끼고 집회에 나가 있거나 애들이랑 세미나하고 있는 모습이 훨씬 '아름다워'보이더라는 거다. 남이 뭐라든.... 너무 자아도취적인가 ㅋㅋㅋ   - O -

문득 90년대에 잠깐 나왔다 사라진 문예비평 관련 잡지에 실렸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글에서 부르주아의 미학과 프롤레타리아의 미학은 다르다는... 다소 도식적인 글이 떠오른다.

독하게 악을 쓰는 이랜드 노동자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이는 걸 보면 미학의 기준이라는 것도 참 정치적이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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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법 개정안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의료법 개정에 대한 비판은 의료연대회의 기자회견문에 상세히 명시되어있습니다. 기자회견문에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전면 개정된 의료법 70조, '해당 의료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의료인에게 진료하도록 할 수 있다'는 조항은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적용될까요? 유명의사가 되면 얼마나 되겠습니다. 유명의사 얘기는 오히려 소수의사의 얘기일 수 있고, 가장 먼저 '비정규직화' 될 의료인는 바로 여의사와 여간호사가 아닐까요.

 

사실 꼭 조항자체가 문제라기 보다 점점 더 본격적으로 자본화되는 의료가 나아가는 방식을 법률이 정당화해주고 보호해준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제 의료영역에서도 '일과 가정의 양립' 운운하며 여의사, 여간호사의 비정규직화를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됩니다.

 

여의사와 여간호사 뿐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남의사도 비정규직화 될 수 있지만) 어쨌든 여성이 의료산업화에서 더 취약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기존의 의료법에서도 간호사의 의무에 '진료보조'가 포함되어 있고, '의료인'이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를 포함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해당 의료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의료인에게 진료하도록 할 수 있다'는 조항은 간호사의 간호업무를 포함할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더군다나 이번의 개정안에서는 새로이 간호사의 '간호진단 (의사...의 진단 후 요양상 간호를 행하는데 있어 선행하는 간호적 판단)'을 허용하고 있어서 (이 부분을 의협에서는 의사의 권리 침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간호사를 '비소속화'하는데 더욱 일조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제 얘기가 오버인 거 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만약 제가 병원을 경영하는 기업인이라면 병원 직원을 최대한 비정규직화해서 인건비를 줄이려고 할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화의 처음 타겟은 병원 행정을 담당하는 (여성이 대부분인) 사무직에서부터 (여성이 대부분인) 간호사로 확대해서 (아이 돌볼 시간을 원하도록 강요받는) 여의사가 될 확률이 크겠죠. 그리고 이런 '경영 효율성 증대'를 법률은 매우 정당화해주고 있다는 거죠.

 

거기다 노인요양시설을 외주화하는데 당연히 여성 간병인이 '싼 값'에 동원될 것이구요.

 

최근 여의사가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사실 이건 저렴하고 '유연한' 노동력을 원하는 자본의 입장에선 환영할 만한 일인거죠. 전문직 여성이 늘어난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좋아할 일이긴 하지만, 그러한 현상이 자본에 의해 어떻게 '활용'되는지 예의주시하지 않는다면 돌봄 노동의 여성 전유화, 여성 노동의 가치절하가 더욱 강화될 수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우리도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물결을 거슬러서 열심히 그냥 잘 헤엄만 치면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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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고리 인식하기

캐럴 아담스, '육식의 성정치'에서 인용)

'동물과 인간은 똑같이 고통을 받고 죽어간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돼지를 먹기 전에 [대리인 없이] 직접 죽여야 했다면 십중팔구 당신은 돼지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듣는 것, 붉은 피가 솟구쳐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 광경이 무서워 엄마 뒤로 숨어버리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 동물의 눈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 등은 아마 당신의 속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대신 돼지를 잡아줄 사람을 고용할 것이다....' - Dick Gregory, 1968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람들, 야만주의를 알지도 못하면서 야만주의를 탄식하는 사람들은 송아지를 잡아 본 적도 없으면서 송아지 고기를 먹으려 하는 사람들과 같다.' - Bertolt Brecht, 1964

 

 

우리가 육식을 할 때 그 동물이 어떻게 죽어가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죠.

식탁에 차려진 고기와 고기가 된, 생전의 살아있는 동물간의 연결을 지워버리는 것이죠.

얼마전에 도살장의 실상을 고발한 영상물을 봤는데, 그걸 보고나서도 전 여전히 고기를 먹거든요.

닭들이 한치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 갖혀 병들고, 병들면 '생산라인으로부터' 제거되고, 줄지어 차례로 털이 뽑히고, 머리가 잘려나가는 그 과정을 '알고는 있지만' 맛있게 양념된 교촌치킨이나 찹쌀과 은행과 대추를 '뱃속에 쑤셔넣은' 비어오크의 한방통닭을 맛있게 먹는거죠. 그럴때면, 굳이 닭들이 죽어나간 끔찍한 광경을 머리속에서 지우려고 하고, 머리속에 떠오르더라도 내가 먹는 이 닭과 그 죽음의 과정을 연관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힝~ 맛있는 걸 어떡해..ㅠㅠ' 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내가 정말 돌아다니는 닭을 잡아서 꼬꼬댁 소리치는 닭의 털을 뽑고, 직접 목을 따고, 닭발을 자르고, 내장을 비울 수 있을까요? 나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난 산 닭을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냥,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도심의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것 처럼 산 닭을 무서워합니다. 누가 나더러 비둘기를 죽여보라고 한다면 절대로 못할 것 같아요.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구요 (오해마셈). 더욱이, 그렇게 죽인 닭을 나 스스로 맛있게 먹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동물을 죽이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기때문에 사람들은 푸주한(butcher)을 고용해서 대신 도살을 시킵니다. 이전같으면 재래식 푸줏간을 통해 동물이 죽는 과정과 고기를 소비하는 내가 분리되었다면, 현대에는 대량으로 닭고기를 '체계적으로(systematically)' '생산'해내는 대형 양계공장을 통해 닭이 죽어가는 과정과 내가 분리됩니다. 끔찍한 도살장면이 동네 푸줏간의 벽으로, 우리의 생활반경에서 멀리 떨어진 양계공장의 거대한 벽으로 가려지는 것처럼 내가 고기를 먹는 행위 속에 내포된 끔찍함 또한 가려지고 인식의 대상에서 사라집니다. 내가 먹는 동물이 어떻게 나온건지는 내가 알바 아닌거죠.그 분리과정을 통해 나는 중립적으로 식탁의 닭고기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동물의 시체를 가열해서 먹는다'는 엄연한 실상을 '고기를 소비한다'는 좀 더 우아한 언어로 표현하면서 다시금 연결고리를 끊고 잔인한 현실을 나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버립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나는) 끊임없이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합니다.

  "나는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산을 깎아서 인공적으로 눈을 뿌린 스키장에 가는 건 내가 스키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산을 파괴하는 것에 찬성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나는 스키장에 가는 것과 산을 파괴하는 것에는 연관이 없습니다. 극히 간접적일 수는 있지만요."

 "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셔야만 강의시간에 졸음을 참을 수 있어요. 다른 커피는 소용이 없어요. 그렇다고 내가 스타벅스가 이스라엘의 전쟁을 지원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스타벅스가 커피농장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 커피를 마셔야만 깨어있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어요."

 "삼성의 탈세에 '고상한' 구실을 제공하는 리움 미술관의 '멋진' 전시회를 보면서 관람료로 낸 만원과 삼성의 '부당한' 재산축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미술을 좋아할 뿐이고, 마침 리움 미술관에서 내가 열광하는 로스코 전시회를 하고, 탈세를 하는 건 삼성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로스코를 봐야만 하기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이는 '고기가 맛있으니 어쩔 수 없어요'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본이 어떻게 동물을, 자연을, 노동자를 착취하는지, 자본이 어떻게 증식하는지 알지만

고기가 맛있고, 스키가 재밌고, 커피가 잠을 깨우고, 로스코 전시회가 좋으니까 나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소비합니다.

나는 간접적으로 도살을 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기업의 부당한 자본축적에 동참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기에 마치 그 연결이 없는 것 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나의 취향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나의 소비와 타인의 착취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작업을 하는 것이죠.

 

연결고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의 나의 생활 방식과 취향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착취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모든 소비를 중지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까지 들기도 해요. 그러나 여기서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는 것인데, 그런 연결고리를 다 인식하다보면 결국 모든 소비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보다는, '하나라도 인식해보자'는 생각이 자본주의적 착취(이윤을 위해 정의와 생명이 무시되는 것)에 반대하는 나의 의지를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결국 문제는 내가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인 것 같아요. 내가 부조리의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보다 내가 알아버린 부조리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더 괴로울 때, 그래서 오히려 내 생활방식을 바꾸는 과정이 즐거울 때 연결고리의 인식이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아, 하지만 이 과정은 참으로 쉽지 않군요.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방식들에 너무 익숙해져있어서... 그래서 중요한 건 내가 살아온 방식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이를테면, 육식이 권장되는 사회에서 내 입맛이 고기에 길들여졌다는 사실, 그게 나의 '순수한' 욕구는 아닐 수 있다는 사실 등을) 인식하는 것이겠죠. 또한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직/간접적인 접촉을 하고 연대하는 것, 지속적으로 현실에 대해 나를 일깨우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나의 실천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끊임없이 현실을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당신과 나의 관계맺기가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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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은 남녀 공동의 몫이다.

 

피임으로 여성의 몸이 혹사당하고 있다.


   여성의 피임 합병증: 취약인구집단을 설정하는 것은 그 집단이 특수하게 건강에 취약한 이유를 분석하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여성이 피임 합병증에 취약한 이유를 분석할 필요가 있나? 여성이니까 피임을 하다보면 합병증이 유발될 수도 있는게 아닌가? 내분비학 시간에 우리는 성호르몬에 대해 배운다. 그때 산부인과 수업과 비뇨기과 수업이 있는데, 산부인과 수업 중 두시간이 모두 여성의 피임과 가족계획에 할애되며 최소 십수가지 피임법과 그 장단점에 대해 배우게 된다. 반면, 비뇨기과 수업에 피임에 대한 얘기는 “공인된 남성 피임 방법은 콘돔착용과 정관수술인데 최근 호르몬 요법이 개발 중이고 미래의 남성피임요법은 호르몬제가 될 것이다”가 전부이다.


  왜 여성만 피임을 저렇게 열심히 해야하지? 물었더니 주변 친구들은 “임신은 여자가 하니까”, 혹은 “대신 남자는 콘돔을 쓰잖아”라고 한다. 임신 자체는 여자가 하지만 두사람이 함께 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콘돔은 피임률이 70~80%로 실패율이 클 뿐만 아니라 콘돔 사용으로 인해 어떤 합병증이 유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피임 합병증과는 무게가 다르다. 대표적으로 에스프로젠-프로게스테론 복합 피임제의 가능한 부작용으로는 프로제스틴에 의한 HDL 감소 및 LDL 증가, 당뇨 악화, 혈전생성 촉진 등이 있고 고혈압 환자는 사용해서는 안되며 흡연여성에서는 뇌졸중의 위험이 있다. 자궁내 장치는  방선균의 위험성이 있고, 그것이 장착된 상태에서 임신이 되면 패혈성 유산, 조기 파수, 조기 진통/분만이 일어날 수 있다. 이외에도 에스트론제제, 살정제, 여성용 콘돔, 다이아프램, 자궁경부캡 등의 방법에 대한 수십가지 합병증이 명시되어 있다. 최근에는 부작용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이 피임, 그리고 피임의 실패로 인한 인공유산으로부터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고통은 지금에도 이어지고 있다.


  임신도, 피임도 두 사람 모두 원해서 하는 것인데 왜 피임법은 유독 여성만을 위해 그리도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는 남성 피임법이 본질적으로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피임은 여성의 몫이다’라는 사회적 인식이 성에 대해 여성의 몸에 통제를 가하고 남성은 비교적 자유롭게 성을 즐기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위에 세워졌고, 바로 그 인식이 의학지식의 생산양상을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이러한 인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면서 남성 호르몬제제가 개발되고 있는데 주로 테스토스테론제를 복용함으로써 LH와 FSH를 억제하여 정자형성과정 억제하는 것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 이 방법은 심각한 부작용이 없고 순응도가 높으며 호르몬을 중단했을 경우 정자형성이 이전상태로 회복되었다[2]. 문제는 정자형성이 완전히 억제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LH, FSH 분비 억제제나 프로제스토젠을 첨가하였을 때 정자형성감소효과가 현저히 향상되었다. 한달에 한번씩 맞는 주사제 호르몬도 개발되었는데 임상시험 참가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3], 1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호르몬제제 사용 후 정자농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이 보고되었다[4]. 남성 호르몬 피임제의 현실화를 예견하는 보고도 눈에 띈다[5]. 이는 적어도 남성 피임법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하면 충분히 개발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동안 남성피임제가 부재했던 이유는 기술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분야의 연구가 특정한 사회인식과 그로 인한 남성피임의 수요의 부족이라는 자본주의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데올로기와 생산양식의 영향을 받음).


  의학연구는 개별적으로 보면 '나름' 과학적인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는 철저하게 사회적 영향하에 놓여있고 비가치중립적이다. 피임에 있어 남성은 건강을 해칠 일이 거의 없는 반면 여성이 ‘취약인구’가 된 것은 임신과 피임이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이라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의학과 의료을 지배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피임이 남녀 공동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었다면 남성에서도 다양한 피임법들이 개발되었을 것이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고통을 감수하는 피임법들이 요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의학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는 의학이 독립적인 과학이 아님을 인식하고 좀 더 많은 사회철학적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참조
[1]Amory JK. Male hormonal contraceptives. Minerva Ginecol. 2006 Jun;58(3):215-26

[2] Meriggiola MC, Cerpolini S, Bremner WJ, Mbizvo MT, Vogelsong KM, Martorana G, Pelusi G. Acceptability of an injectable male contraceptive regimen of norethisterone enanthate and testosterone undecanoate for men. Hum Reprod. 2006 May 26; [Epub ahead of print]

[3] Liu PY, Swerdloff RS, Christenson PD, Handelsman DJ, Wang C; Hormonal Male Contraception Summit group. Rate, extent, and modifiers of spermatogenic recovery after hormonal male contraception: an integrated analysis. Lancet. 2006 Apr 29;367(9520):1412-20.

[4] Wu FC. Hormonal approaches to male contraception: approaching reality. Mol Cell Endocrinol. 2006 May 16;250(1-2):2-7. Epub 2006 Mar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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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 따위는 버려라

 
보건의료학생의 진료봉사활동-사회문제의식과 연계되어야  한다.                                                                                         

                                                                              

  매년 TV에서 하는 소아암 기금마련행사에서 삭발한 창백한 아이들이 골수 검사를 받으면서 비명을 지른다. 그 고통스런 모습에 우리는 마음이 아프다. “우리 ‘영희’가 빨리 나을 수 있게 모두 마음을 모아서 도움을 주세요“ 라는 진행자의 열정적인 멘트에, 화면 왼쪽 상단에 일원단위로 올라가는 기금액수를 보며 우리는 하나 둘 씩 전화기를 들고 적은 액수지만 기쁜 마음으로 입금을 한다.                      

 

 보건의료학생이라면 진료봉사활동에 매력을 느끼고 많이들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방학이면 대거 진료봉사동아리나 국내, 해외 캠프를 통해 봉사활동에 나선다. 빡센 일정이라도 하고 나면 가슴 뿌듯하고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다. 의료시설에서부터 소외된 산간지역 마을 주민들을 위해, 병원비를 낼 형편이 안 되는 노숙인들을 위해,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마음이 따뜻한’ 우리들은 ‘불쌍한’ 이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내가 이들을 도울 수 있음에 감사한다. 더욱이 진료를 받은 ‘불쌍한’ 사람들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친절히 그들을 진료해준 의료인들에게 ‘어이쿠, 감사합니다’ 하며 연신 허리를 굽힌다. 그러기에 봉사자들은 더욱 더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이 훌륭한 자선활동에, 나는 딴지를 걸고자 한다. 

         

 왜 가난해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은 ‘운 좋게’ ‘친절한 타인‘의 동정심 어린 베품을 받아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돈도 없고 운도 없으면 그냥 아파야 하나? 돈이 없으면 누군가의 자선에 의해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도 당연히 치료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경제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야 있지만 '현실적으로' 환자를 돌려보내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기부와 진료봉사이다. 과연 그런가? 그보다도 경제력과 상관없이 치료기회가 보장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치료비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을 계속 양산해 낼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와 체제에 대한 고민 없이 동정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기부와 봉사는 문제의 원인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치료 못 받는 ‘딱한’ 사람들을 ‘자선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누구나 건강할 권리’에 대한 인식을 은폐해 버린다. 그리고 동정심에 호소하는 기금마련 행사와 자원봉사자 모집은 도움을 받는 대상이 불쌍해 보일수록 성공률이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질병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여 표면적 증상이 경미해서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거나’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환자들은 (HIV 감염 환자와 같은) 도움으로부터 배제된다. 게다가, 기금마련과 진료봉사는 질병 발생 후 사후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민에 소홀하기 쉽다. 겨울에 따뜻하게 잘 곳이 없다면 당연히 질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오늘 그 사람에게 약을 준다고 해도, 머물 곳이 생기지 않는 한 그 사람은 다시 아플 수밖에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래서 시인 브레히트가 노숙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선사업가를 두고 “그러한 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네, 그러한 식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네” 라고 노래한 것이다.                                

   

 기금마련과 진료봉사활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연대활동으로서의 진료봉사도 얼마든지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앞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 없이 이루어지는 맹목적인 기부나 봉사활동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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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그 개설 기념

친구 따라 나도 '불'로그 개설했다. 신난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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