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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 따위는 버려라

 
보건의료학생의 진료봉사활동-사회문제의식과 연계되어야  한다.                                                                                         

                                                                              

  매년 TV에서 하는 소아암 기금마련행사에서 삭발한 창백한 아이들이 골수 검사를 받으면서 비명을 지른다. 그 고통스런 모습에 우리는 마음이 아프다. “우리 ‘영희’가 빨리 나을 수 있게 모두 마음을 모아서 도움을 주세요“ 라는 진행자의 열정적인 멘트에, 화면 왼쪽 상단에 일원단위로 올라가는 기금액수를 보며 우리는 하나 둘 씩 전화기를 들고 적은 액수지만 기쁜 마음으로 입금을 한다.                      

 

 보건의료학생이라면 진료봉사활동에 매력을 느끼고 많이들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방학이면 대거 진료봉사동아리나 국내, 해외 캠프를 통해 봉사활동에 나선다. 빡센 일정이라도 하고 나면 가슴 뿌듯하고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다. 의료시설에서부터 소외된 산간지역 마을 주민들을 위해, 병원비를 낼 형편이 안 되는 노숙인들을 위해,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마음이 따뜻한’ 우리들은 ‘불쌍한’ 이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내가 이들을 도울 수 있음에 감사한다. 더욱이 진료를 받은 ‘불쌍한’ 사람들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친절히 그들을 진료해준 의료인들에게 ‘어이쿠, 감사합니다’ 하며 연신 허리를 굽힌다. 그러기에 봉사자들은 더욱 더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이 훌륭한 자선활동에, 나는 딴지를 걸고자 한다. 

         

 왜 가난해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은 ‘운 좋게’ ‘친절한 타인‘의 동정심 어린 베품을 받아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돈도 없고 운도 없으면 그냥 아파야 하나? 돈이 없으면 누군가의 자선에 의해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도 당연히 치료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경제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야 있지만 '현실적으로' 환자를 돌려보내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기부와 진료봉사이다. 과연 그런가? 그보다도 경제력과 상관없이 치료기회가 보장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치료비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을 계속 양산해 낼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와 체제에 대한 고민 없이 동정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기부와 봉사는 문제의 원인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치료 못 받는 ‘딱한’ 사람들을 ‘자선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누구나 건강할 권리’에 대한 인식을 은폐해 버린다. 그리고 동정심에 호소하는 기금마련 행사와 자원봉사자 모집은 도움을 받는 대상이 불쌍해 보일수록 성공률이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질병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여 표면적 증상이 경미해서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거나’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환자들은 (HIV 감염 환자와 같은) 도움으로부터 배제된다. 게다가, 기금마련과 진료봉사는 질병 발생 후 사후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민에 소홀하기 쉽다. 겨울에 따뜻하게 잘 곳이 없다면 당연히 질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오늘 그 사람에게 약을 준다고 해도, 머물 곳이 생기지 않는 한 그 사람은 다시 아플 수밖에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래서 시인 브레히트가 노숙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선사업가를 두고 “그러한 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네, 그러한 식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네” 라고 노래한 것이다.                                

   

 기금마련과 진료봉사활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연대활동으로서의 진료봉사도 얼마든지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앞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 없이 이루어지는 맹목적인 기부나 봉사활동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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