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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고리 인식하기

캐럴 아담스, '육식의 성정치'에서 인용)

'동물과 인간은 똑같이 고통을 받고 죽어간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돼지를 먹기 전에 [대리인 없이] 직접 죽여야 했다면 십중팔구 당신은 돼지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듣는 것, 붉은 피가 솟구쳐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 광경이 무서워 엄마 뒤로 숨어버리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 동물의 눈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 등은 아마 당신의 속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대신 돼지를 잡아줄 사람을 고용할 것이다....' - Dick Gregory, 1968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람들, 야만주의를 알지도 못하면서 야만주의를 탄식하는 사람들은 송아지를 잡아 본 적도 없으면서 송아지 고기를 먹으려 하는 사람들과 같다.' - Bertolt Brecht, 1964

 

 

우리가 육식을 할 때 그 동물이 어떻게 죽어가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죠.

식탁에 차려진 고기와 고기가 된, 생전의 살아있는 동물간의 연결을 지워버리는 것이죠.

얼마전에 도살장의 실상을 고발한 영상물을 봤는데, 그걸 보고나서도 전 여전히 고기를 먹거든요.

닭들이 한치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 갖혀 병들고, 병들면 '생산라인으로부터' 제거되고, 줄지어 차례로 털이 뽑히고, 머리가 잘려나가는 그 과정을 '알고는 있지만' 맛있게 양념된 교촌치킨이나 찹쌀과 은행과 대추를 '뱃속에 쑤셔넣은' 비어오크의 한방통닭을 맛있게 먹는거죠. 그럴때면, 굳이 닭들이 죽어나간 끔찍한 광경을 머리속에서 지우려고 하고, 머리속에 떠오르더라도 내가 먹는 이 닭과 그 죽음의 과정을 연관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힝~ 맛있는 걸 어떡해..ㅠㅠ' 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내가 정말 돌아다니는 닭을 잡아서 꼬꼬댁 소리치는 닭의 털을 뽑고, 직접 목을 따고, 닭발을 자르고, 내장을 비울 수 있을까요? 나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난 산 닭을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냥,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도심의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것 처럼 산 닭을 무서워합니다. 누가 나더러 비둘기를 죽여보라고 한다면 절대로 못할 것 같아요.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구요 (오해마셈). 더욱이, 그렇게 죽인 닭을 나 스스로 맛있게 먹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동물을 죽이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기때문에 사람들은 푸주한(butcher)을 고용해서 대신 도살을 시킵니다. 이전같으면 재래식 푸줏간을 통해 동물이 죽는 과정과 고기를 소비하는 내가 분리되었다면, 현대에는 대량으로 닭고기를 '체계적으로(systematically)' '생산'해내는 대형 양계공장을 통해 닭이 죽어가는 과정과 내가 분리됩니다. 끔찍한 도살장면이 동네 푸줏간의 벽으로, 우리의 생활반경에서 멀리 떨어진 양계공장의 거대한 벽으로 가려지는 것처럼 내가 고기를 먹는 행위 속에 내포된 끔찍함 또한 가려지고 인식의 대상에서 사라집니다. 내가 먹는 동물이 어떻게 나온건지는 내가 알바 아닌거죠.그 분리과정을 통해 나는 중립적으로 식탁의 닭고기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동물의 시체를 가열해서 먹는다'는 엄연한 실상을 '고기를 소비한다'는 좀 더 우아한 언어로 표현하면서 다시금 연결고리를 끊고 잔인한 현실을 나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버립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나는) 끊임없이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합니다.

  "나는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산을 깎아서 인공적으로 눈을 뿌린 스키장에 가는 건 내가 스키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산을 파괴하는 것에 찬성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나는 스키장에 가는 것과 산을 파괴하는 것에는 연관이 없습니다. 극히 간접적일 수는 있지만요."

 "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셔야만 강의시간에 졸음을 참을 수 있어요. 다른 커피는 소용이 없어요. 그렇다고 내가 스타벅스가 이스라엘의 전쟁을 지원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스타벅스가 커피농장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 커피를 마셔야만 깨어있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어요."

 "삼성의 탈세에 '고상한' 구실을 제공하는 리움 미술관의 '멋진' 전시회를 보면서 관람료로 낸 만원과 삼성의 '부당한' 재산축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미술을 좋아할 뿐이고, 마침 리움 미술관에서 내가 열광하는 로스코 전시회를 하고, 탈세를 하는 건 삼성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로스코를 봐야만 하기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이는 '고기가 맛있으니 어쩔 수 없어요'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본이 어떻게 동물을, 자연을, 노동자를 착취하는지, 자본이 어떻게 증식하는지 알지만

고기가 맛있고, 스키가 재밌고, 커피가 잠을 깨우고, 로스코 전시회가 좋으니까 나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소비합니다.

나는 간접적으로 도살을 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기업의 부당한 자본축적에 동참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기에 마치 그 연결이 없는 것 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나의 취향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나의 소비와 타인의 착취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작업을 하는 것이죠.

 

연결고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의 나의 생활 방식과 취향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착취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모든 소비를 중지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까지 들기도 해요. 그러나 여기서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는 것인데, 그런 연결고리를 다 인식하다보면 결국 모든 소비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보다는, '하나라도 인식해보자'는 생각이 자본주의적 착취(이윤을 위해 정의와 생명이 무시되는 것)에 반대하는 나의 의지를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결국 문제는 내가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인 것 같아요. 내가 부조리의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보다 내가 알아버린 부조리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더 괴로울 때, 그래서 오히려 내 생활방식을 바꾸는 과정이 즐거울 때 연결고리의 인식이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아, 하지만 이 과정은 참으로 쉽지 않군요.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방식들에 너무 익숙해져있어서... 그래서 중요한 건 내가 살아온 방식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이를테면, 육식이 권장되는 사회에서 내 입맛이 고기에 길들여졌다는 사실, 그게 나의 '순수한' 욕구는 아닐 수 있다는 사실 등을) 인식하는 것이겠죠. 또한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직/간접적인 접촉을 하고 연대하는 것, 지속적으로 현실에 대해 나를 일깨우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나의 실천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끊임없이 현실을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당신과 나의 관계맺기가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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