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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와 스쿨폴리스와 밀양사건에 대해.

* 이 글은 [[펌]가난과 교육 - 이계삼] 에 관련된 글입니다.

한 일주일간 정신적 공황을 핑계로 컴퓨터게임에 빠져 살았다. 이번에 한참 빠진 게임은 디아블로2라는 이 블로그의 주제인 완전회복물약이 나오는 게임이다. 최근에 나온 게임이나 일인칭 액션 게임 보다는 폭력성이 덜할지는 몰라도 잔뜩 무장하고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들을 깡그리 해치우는 요즘 일진회다 뭐다할때 티비에 배경이라도 깔만한 게임 되겠다.

이번에 키운 캐릭터는 네크로맨서(시체를 이용하는 소환술사), 아마존(활과 창을 이용하는 여전사), 어쎄신(무술과 함정을 이용하는 암살자) 인데 이런 게임 하는 친구들은 은어와 같은 줄임말을 잘 만들어낸다. 그에 따르면 조폭넥, 활아마(활을 주로 사용하는 아마존), 킥씬(발차기를 주로 하는 어쌔신)이라 불리우는 타입의 캐릭터를 키울려고 몇날며칠을 해뜰때까지 눈 벌게 가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위의 조폭넥이라는 것은 시체나 여러가지 것들을 이용해서 자기 부하(똘마니)들을 소환하여 -마치 조폭이 우루루 몰려다니며 땡깡 부리는 것처럼- 우루루 다니면서 적을 해치우는 타입의 캐릭터이다. 자기 손 안쓰고 편하고 안전하고 다 좋은데 적의 거대 보스에게는 약하다.(!!)

 

이렇게 보면 일진회다 뭐다 하는 것이 게임이나 폭력적 영화와 관련이 있는 것도 같으니 앞으로 며칠간 본인과 만나는 사람들은 우발적 폭력이 발생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

 

하옇든 그동안 나를 정신적 공황으로 만들었던 일이 어제 일단락되면서 '이렇게 살면 안돼!!' 하면서 게임을 컴에서 지우고 유통기한이 며칠 지난 막걸리를 먹어 해치우려고 안주 만들고 자리에 앉아 우연히 티비를 보는데 손석희의 100분 토론에서 '스쿨폴리스'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는 것이었다. 제목만 보고 '스쿨폴리스? 말도 안되지. 저게 설득력이 있나.'하고 술한잔씩 훌쩍거리며 티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야기가 참 묘하게 진행되는 거였다.

어.. 어.. 이러고 있는데 결정타는 스쿨폴리스 도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였다. 재학생의 70여 퍼센트와 학부모의 80여 퍼센트가 찬성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물론 여론조사의 설문항이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압도적 찬성이라는 정서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제 토론회에서 나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정서의 기반에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교사에 대한 전적인 불신이 바탕에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상처를 주고 받은 상흔이 남아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계삼 선생이 느낀 절망적인 감정들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경찰이 우리사회에서 신망받거나 신뢰가 가는 조직도 딱히 아닌데 그런 조직을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동원하는데 찬성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  경찰도 스쿨폴리스 시범시행에서 마치 삐에로처럼 분장하고 학생들을 만나는 등 민망할 정도의 쇼를 다하고 있었다.

 

토론이 진행되는 도중에 나는 그 대답이 될만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 학생이 중요한 것은 가해자가 다시 그 가해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대책이 필요하다라는 애기에서 그 대답을 들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격리이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에 기반한 교화가 아닐까 한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방법에 따른 절차를 도입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각에서 군입소를 통한 교화교육(삼청교육대?)을 주장하는 것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격리공간인 교도소(소년원?)와 공식적인 처벌권을 가지고 있는 경찰이다라고 보는 것 같다. 정책입안자나 경찰쪽에서는 지금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는 학교폭력에 대한 분노에 대해 가시적인 대책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도 있는 거 같다.

 

결국 시스템으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을 만들고 그 문제에 토론하다 보면 뭐가 문제고 뭐가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이고 뭐가 해결되고 있는지 뭐가 문제를 만드는 지도 모르는 뒤죽박죽 사태가 보다 심화될 뿐이라는 뻔히 보이는 결말은 예상이 안되나 보다.

 

나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미래의 시스템이 도입되더라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아직까지는 맞는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정말 아이들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거,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게 아닐까?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록커 마릴린 맨슨의 한마디 였다. '저는 그 아이들의 얘기를 그냥 들어줄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 아이들의 얘기도 들어줘야죠.'

 

내가 그런 것을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아직 자신도 없고 교육 문제는 지금의 나랑 사실 크게 관련도 없지만 오늘 그냥 그렇게 덮거나 증상에 대해서만 대처하고 넘어가는 문제들이 나중에 더욱 크게 되돌아오는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사태가 두렵다.

 

여기까지도 길었지만 끝으로 정말 긴 이계삼 선생이 쓴 글을 하나더 붙이려 한다.

[죄인의 슬픔, 시대의 악령] 이라는 글인데 밀양사건을 직접 겪으면서 느낀 것을 써내려 간 것이다. 어제 그 토론회를 보고 이글이 생각나서 다시 읽었다.



'당대비평'의 부탁으로 쓴 글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이 글은 '당대비평' 신년특별호인가에 실릴 것 같습니다.

죄인의 슬픔, 시대의 악령
- ‘밀양 사건’으로 구속된 한 학생에게 보내는 편지


1.
B야, 깊은 밤에 너에게 편지를 쓴다.
오늘 낮에는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서 몇몇 아이들과 졸업문집 편집 일을 했더랬어. 너도 기억할 거야. 우리가 한해동안 ‘독서’ 시간에 쓴 글들과 모둠일기를 모아서 졸업 기념으로 묶어서 나누어 갖기로 한 거. 방학 시작한 지가 꽤 지났는데 그 일을 이제야 시작했어. 여섯 개 반의 문집을 따로 만들어야 하니, 수고롭기가 보통이 아닌데, 같이 일손을 거드는 아이들은 끝없이 재잘대면서 한껏 즐겁게 오리고 붙이고, 워드치는 일들을 하더라. 그 녀석들은 요사이 대학 합격이 결정나서 많이들 편안해하는 분위기야. 시골 고등학교 출신으로 그 험한 경쟁을 뚫고 다들 원하던 자리에 착착 꽂혀 들어가니 많이들 뿌듯했겠지.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표정과 손놀림은 몹시 경쾌했었어. 그때 문득 네 얼굴이 아프게 박혀오는 것이었어. 넌 이 문집에 들어갈 네 몫의 글을 거의 내질 않았지. 그래도 3주만 있으면 깨끗이 제본된 문집을 받아들고 들춰보며 낄낄대며 즐거워할 그 순간만큼은 같이 할 수 있을 텐데, 지금 네가 있는 곳은 소년원, 나로서도 채 상상이 되지 않는 곳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니……. 지금 밀양 시내에서 밥 먹기 위해 어디를 가도 주문받고 바삐 뛰어다니는 건 온통 ‘알바’하는 네 동기 녀석들뿐인데, 왜 넌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 싶어서, 잠시 마음이 아려오는 것이었다. 그 무렵이었어. 이 사건으로 불구속 처분을 받은 두 녀석이 교무실로 들어오는 것이었어. 문집 만드는 아이들과 반만 다르고 중학교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냈을 그 녀석들은 내내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학생부 선생님 앞에서 도교육청에 보낼 사건 경위서를 쓰는 것이었어. 녀석들이 경위서를 쓰는 동안 교무실은 내내 침묵. 원하는 대학에 붙고 나서 문집을 만드는 모범생 아이들과, 고개 숙이고 경위서를 쓰는 아이들, 그리고 지금 소년원에 있는 너.

2.
B야, ‘밀양 사건’은 오늘 낮 교무실에서 내가 보았던 이 쓸쓸한 몇 개의 풍경들만 남긴 채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이렇게 빨리 잊혀지는 법이다. 그 사건의 당사자였던 너에게 이것은 좋은 일이냐? 너는 그동안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 네 마음을 가시처럼 후벼팠을 원망은 지금 네 자신에게 향해 있느냐, 아니면 이토록 큰 일로 치달아가게 한 그 모든 주변 정황들을 향해 있느냐?
B야, 죄인된 마음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사건이 터진 즈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너와 지난 해 일주일 두 시간 수업으로 만났던 그 인연의 크기만큼만 반응하려 애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시간이었고, 그 이상을 감당할 능력도 내겐 없었다. 나로선 이 사건을 두고 벌어진 모든 일들이 이해할 수 없었고, 가해 학생의 선생으로 죄인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니. 그래서 나는 무기력해졌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무신경해지려 애썼다. 그렇게 한달이 흘렀고,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너는 아직도 소년원에 있지만.
B야, 네가 잡혀가던 날 월요일, 그때 너는 학교에 와 있었다. 1교시 2교시 연강이었던 나의 독서 수업. 이상스레 너는 자리에 내내 엎드려 있었지.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너도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있었겠지. 언제나처럼 산만스럽게 떠들지도 않고, 마치 반 친구들에게 네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듯 큰 소리로 분위기를 제압하지도 않았고 그저 침울했던 네 얼굴. 물론 그때 난 네가 처한 상황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고, 그 시간에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송환』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을 거야. 처음에는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점점 지루해하며 하나 둘 책상에 엎드리는 아이들을 두고, 나는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에 대해, 그들이 온몸으로 버팅겨온 야만과 광기의 나날들에 대해 열변을 토했었지.
네가 잡혀가고, 그때를 떠올리면서 내가 괴로웠던 건, 몇 시간뒤면 형사들에게 수갑이 채워지고 어디론가 끌려갈 너를 앞에 두고 비전향 장기수의 삶과 투쟁을 가르쳤다는, 이 기묘한 대칭이 주는 당혹감 때문만은 아니었어. ‘자괴감’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니?
『송환』같은 자료를 통해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을 소개하고, 그들을 통해 인간의 위엄을 가르치는 것이 이 시대 교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임을 굳게 믿고 있던, 그것으로 내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자위하던 내가 실은 무지무지한 착각 속에서 살아왔다는 자괴감이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이었어. 이제 난 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지는 막막함. 며칠간 마음이 황망하여 내가 마음으로 의지하는 어느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그 분은 그러시더군. “그래도, 『송환』을 가르치는 선생은 있어야 한다.”고. 아마 이런 뜻이었겠지. 요즘 같은 때에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별로 없지만, 그래도 한두가지라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르쳐야 한다는 뜻. 그래. B야. 나도 어느 순간부터 ‘불가능’을 느끼기 시작했던 거야. 너같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들에 대해, 세상의 어두움을 너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래서 인간의 선함을 믿지 않는 아이들의 이 뚜렷한 흐름을 ‘교육적’으로 되돌리는 일에 대해서 말야.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은 이 즈음에 좀더 솔직해져야 할 것이야. 차라리 백기 투항하는 것이 훨씬 정직한 태도라고 나는 믿어. 네가 관련된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그리고 연말 내내 시끄러웠던 사상 최대의 수능 부정 사건을 봐도 그렇고, 학교 교육의 파탄이나 진배없는 일들인데도, 우리 교육은 아무런 비전도, 계획도, 의욕도 없이 그냥 끌려만 다니고 있지 않니. 그 누구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아. 왜냐고? 이건 ‘교육적으로 풀어가기엔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거든.
그래서, 나같은 교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이들과 『송환』같은 영화를 보면서 주류 매체들이 다루지 않는 이 세상의 어떤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없어보였던 거야.
그동안 난 너희들같은 소위 ‘잘나가는’ 아이들을 좀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래, 난 너희들의 세계를 조금은 알지. 너희들의 그 폭력에 대한 동경과 공포의 엇갈림을, 즐기고 저지르는 그 모든 행태에 서린 자신에 대한 좌절을, 그리하여 서서히 발딛고 선 땅에서 떠올라 쾌락과 폭력의 판타지 속에 빠져들어가는 너희들의 내면 세계를 말야. 그러나, 알고 있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 지금껏 너희들이 놀고 저질렀던 그곳, 책임감, 죄의식 따위의 귀찮은 것들로부터 해방된, 모든 것이 긍정되는 너희들만의 낙원은 한 미력한 교사인 내 손길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세상은 그런 너희들에게 조금도 관심 두지 않았고, 오히려 너희들을 무서워만 했었지.

3.
사건이 나고 며칠이 흘렀나, 학교에서 퇴근하는 길이었을 거야. 저녁 급식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 전에 농구 코트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들을 보았어. 늘 너와 함께 농구하던 6반, 7반 아이들. 꼭 너하나만 빠진 채 아이들은 여느날처럼 농구를 하고 있는 거야. 문득, 굳게 얼어있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이었어. 그동안 내가 널 얼마나 많이 원망했던가. 맹렬하게 미워했고, 내 의식의 망막 속에 너와 부대꼈던 몇 번의 기억이 완전한 잿빛으로 맺혔었어.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그래. 교실에서 넌 수업하는 선생님들을 참으로 힘들게 하는 아이였지. 그런데 넌 운동장에선 물을 만난 고기와도 같았지. 교내 길거리 농구대회, 멋진 레이업 슛을 성공시키면 코트를 에워싼 후배 여학생들의 괴성과 환호가 진동했고, 그때만큼은 너도 어찌할 수 없는 ‘소년’이었지. 도민체전 정구 종목에서 네가 2위에 입상했다는 걸 듣고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 일을 칭찬해주었더니, 넌 칭찬이라는 것 자체를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쑥스러워했었지. 네 얼굴에선 나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순진한 미소가 피어 올랐고. 그래서였을까. 언젠가 쉬는 시간 네가 있는 7반 교실에서 너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네가 고향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이야기했지. 너는 여름방학 때마다 네가 사는 마을 앞을 흐르는 그 맑은 강에서 살다시피했고, 그래서 강고동이 많이 있는 곳을 귀신처럼 아는 놈으로 호가 나 있었지. 나는 네가 고향 마을에 터잡고 살면서 마을의 지킴이가 되어주길 부탁했었다. 네가 살고 있는 그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니 거기에서도 충분히 부족하지 않게 살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인간이 태어난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장황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너도 진지한 표정으로 골똘히 듣고 있었고…. 그날 나의 이야기는 너에 대한 나의 최대한의 선의를 담은 것이었어. 그때 너는 그랬었지. “아직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다.”고. “형편이 안 돼서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공수하사관으로 입대해서 직업군인으로 살고 싶다.”고, “그래도 선생님 이야기 들으니 마음이 좋다”고 이야기했었지.
겨울 방학을 며칠 앞둔 저녁날 농구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날 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순간, 난 너를 조금은 용서했던 것 같다. 결국 B 너도 의심할 수 없는 악한은 못된다는 것, 결국 너도 쾌락에의 무모한 집착과 우직한 순정이 안타깝게 길항했던 열아홉 소년에 불과했다는 것, 결국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태의 격랑을 올라타고 치달아 흐르다가 네가 제일 먼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는 것, 그래서 네가 저지른 행위의 몫을 뺀 나머지를 나는 용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그래, B야. 너도 불쌍한 놈이다. 네가 딛고 있었던 땅과 네가 저지른 모든 행동이 ‘슬프다’. 너는 나의 이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너에 대한 연민과 슬픔은 결국 ‘어찌할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다. 너도 기억하겠지. 지난 12월 초 어느날, 네가 울산 남부경찰서로 연행된 그 다음날 인터넷 언론에 한 기사가 뜨면서부터 폭발했던 그 일련의 일들을. 어느 과학책에서 보았는데,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즉 ‘카오스’적인 현상들은 그 초기 조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더군. 그건 이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거야. 만약 경찰이 ‘터뜨린’ 보도자료가 사실관계에 좀더 충실했다면, 최초로 기사를 작성한 모 언론사의 그 기자가 경찰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를 ‘받아적는’ 이상의 기자적 성실성을 발휘했더라면, 아니 그 언론사의 기사를 퍼나른 다른 언론사들이 몇 가지의 의문에 대해 확인이라도 제대로 했더라면 이 사건은 아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알고 있어. “‘밀양연합’이라는 고교생 폭력집단의 조직원 41명이 두 여학생을 1년동안 윤간하고, 학대하고, 금품을 갈취하고 협박하였다. 이들은 성인 폭력조직과 연계되어 체계적인 조직으로 움직이며, 몸에는 흉측한 문신도 새기고 있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최초 세 명에게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을 때 엄청나게 분개했었지. 그런데 말야, 자신들이 들어 아는 사실로만 본다면 ‘범죄단체 구성 및 활동’에다가 ‘집단 윤간’, ‘금품 갈취’같은 죄목으로 치자면 41명 모두 구속하고 더 잡아들여도 시원찮은데 왜 3명만이 구속되었을까, 미심쩍어야 하질 않니. 그래서 정확한 사실을 밝히라고 요구해야 하질 않니.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어. 내가 보기엔 사람들은 정확한 ‘사실’ 관계에는 깊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 다만, 하루가 다르게 터져나오는 이 절망적인 사건들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 집단적 히스테리를 풀어낼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이 사건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커다란 일이 되고 말았어.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지?” 이런 질문이 던져졌을 때에는 모두 꿀먹은 벙어리들이 되고만 거야.
학교로 하루에 수십통씩 걸려오는 욕설섞인 전화, 인터넷을 떠도는 온갖 가지 근거없는 루머들, 아무 관련없는 아이들의 사생활까지 낱낱이 까발려 ‘죽일 놈’으로 매도하는 잔인한 난도질들 속에서 나는 참 황망했었어. 우리 사회에 이렇게 정의로운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다만 내가 매를 맞더라도 그 사실에 위안을 찾으려 했었어. 그러나 수치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냈다. 보강 조사 끝에 네가 구속되었고, 너를 내가 가르쳤으니, 내가 받을 몫의 수치를 나도 받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이 무서운 세태에 대해, 아이들의 세계에 대해 이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보자. 이런 일이 우리가 모르는 어느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면 이건 더 큰 문제가 아니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상처가 있다면 치유는 우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에서 출발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아파해야 한다. 거기서 상처의 독을 제거해야 치유의 길이 열린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의 책임있는 지식인들과 관료들, 양심적인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이 치유를 위한 토론의 의제를 하나씩 둘씩 생각해보았다.
우선 나는 너희들의 그 폭력에 대한 선망과 무감각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꼭, 컴퓨터 게임이나 대중 매체의 영향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이건 정확하게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큰 흐름의 반영이라고 나는 생각해. 겉으로는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로부터 점점 파시즘에 대한 선망을 키워가는 중이고, 앞으로 경제 사정이 더 나빠지면서 이 세태는 더욱 급류를 탈 것 같다고. 거기에는 구질구질하고 복잡한, ‘돈도 안 되는’ 민주주의보다는 ‘쿨’하고 ‘깔끔하게’ 얽힌 문제를 매듭짓는 파시즘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다고. 그리고 결국 이것은 어느 일본인 사상가의 표현처럼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의 한 징후라고 나는 생각해.
그리고 밀양이라는 이 지역사회의 보수성, 속물성,가부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너도 알다시피, 밀양 지역의 국회의원은 우리 사회의 극우적 성향을 대표하는 사람이야. 그가 이곳 밀양에서 내리 세 번을 당선된 것은, 그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밀양 출신의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야. 분명 이 지역사회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지.
비평준화 지역인 이곳에는, 아이들이 입고 다니는 교복에 따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곳이야.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술 취해 비틀거리는 고교생을 보고 어른들이 불러 훈계를 하는 일이 흔했어. 그땐, 교복이 없을 때니 이야기끝에 어른들은 “어느 학교 다니냐”고 물었고, 비교적 명문으로 꼽히는 “M고 다닌다” 그러면 한결 목소리가 누그러지면서 “공부하느라 고생 많다”는 격려가 덧붙었지만, 그외 다른 학교 이름을 대면 “부모 일도 안 돕고 술이나 마시고 다닌다”면서 잔소리를 했지. 사춘기 시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을 나는 자주 접하고 살았다. 지금도 이런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 그래서 고등학교마다 대학 입시가 끝나고 나면 시내에 곳곳에 내거는 ‘플래카드’에 이름을 올릴 아이들을 위해서는 사활을 건 노력을 들이지만, 정작 그 외 대다수 아이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별로 변하지 않았어. 밀양은 전형적인 ‘남성’의 도시인 거야. 힘없는 사람, 여성, 공부 못하는 학생, 가난한 사람, 장애인, 이런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는 전형적인 남성 가부장의 도시야. 이 작은 도시에 다방과 단란주점과 룸싸롱은 넘쳐나는데 여성이나 장애인을 위한 공간은 하나도 없는, 이런 도시에서 네가 나고 자란 거야.
그리고, 나는 또 이런 것도 이야기 하고 싶었어. 온 세상에 지금 미친 듯 창궐하는 섹스의 유혹에 대해서 말야. 결국 너도 이 세태의 뚜렷한 희생자인 셈이지. 이 시대의 ‘섹스’란 무엇일까. 섹스란, 이 권태로운 고도 소비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느낄 최대의 기쁨일지도 몰라.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인공’의 섬으로 점점 깊이 유폐되어가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야생’을 가진 존재로 느낄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된 것 같아. 고독감이 극에 달하니, 그것이 결국 ‘죽음에 대한 사랑’-타나토노스-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더욱 깊이 탐닉해 들어가는. 인간다움에 대한 완전한 균형 상실이지. 그리고 이제 인터넷은 점점 ‘악마의 도구’가 되어가고…. 결국 가장 되돌리기 어려운 세태가 바로 이 ‘섹스’에 대한 탐닉이 아닐까.

5.
그러나, B야. 이 사건을 두고 내가 혼자 생각해 본 내용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더라.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어. 이 정도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면, 이 심각한 상황을 두고 입있는 자라면 한마디씩은 할 거고, 이제 왁자한 토론이 벌어질 거다, 기대를 했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과문한지는 몰라도, 정말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던 거야. 왜 그랬을까?
B야, 나는 점점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안고 있는 상처에 대해 합리적으로 제기하고 풀어갈 역량을 점점 더 잃어가는 것 아니냐고.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그래서 제법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분들은 나와는 반대로 전망하시던데, 나는 별로 그런 기대가 들지 않아. 그 분들은 늘 ‘민주주의’와 ‘시스템’을 말씀하시지. 우리 사회는 더디지만 민주주의가 진척돼 가고 있고, 사회를 지탱할 합리적 ‘시스템’도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가 될 것이라고 말야. B야, 그러나 난 이런 세태에 더한 두려움을 느낀다. 합리적 민주주의가 시스템으로 완전히 정착된 사회는 과연 살만한, 좋은 사회일까, 라고 나는 묻고 싶다. 이건 더 깊은 문제야. 합리적인 민주주의, 합리적인 시스템을 향한 진군은―물론 그 바탕에는 ‘경제 성장’이 유지돼야 하겠지만― 결국 사람들이 작은 노력과 책임감으로도 큰 만족을 나누어주는 사회를 바라보고 있겠지. 그러나 나는 결국 이런 흐름이 인간을 돌이킬 수 없이 타락시키는 틀이라고 보는 것이야.
사람들은 왜 이 ‘밀양 사건’에서도 본질적인 성찰을 할 수가 없었을까. 그건, 우리 모두가 이 병든 사회의 구성원이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네가 저질렀던 그 범죄의 형상들을 나누어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야. 우리 모두는 이 ‘어쩔 수 없는 공모’에 슬픔을 느껴야 해. 그런데 나는 네티즌들의 들끓는 여론이 뭉치고 뭉쳐 결국 ‘가해 학생 처벌 강화’를 위한 촛불 집회가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히 절망하고 말았어. 물론 그 집회가 내건 슬로건은 그것 말고 더 있고, 공권력이 이 사건을 풀어가는 믿을 수 없도록 저열한 방식에 대한 좌절감도 깔려 있었겠지. 그러나, 나는 결국 ‘처벌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그들의 주장에 담긴 기계성에 대해, 그리고 그 주장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촛불’을 사용한 것에 대해 절망을 느낀 것이야. 아아, 왜 사람들은 사태의 진상에 대해 더 깊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우리 자신이 나누어 가진 범죄의 형상에 대해 먼저 참회하지 않고, 너희들을 점점 더 끔찍한 범죄로 내모는 이 병든 사회를 치유할 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다만 사납게 “처벌해야 한다”고만 말할까. 내가 지금 너희들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잖니. 문제는,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가해자인 너희들이 참회해서 다시는 이런 길에 서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왜 생각지 않을까. 네가 어른인 나보다는 회개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열아홉 소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야. 다만 너희들을 흉악한 범죄자로 두려워만 하고 있을까. 그들 자신이 떳떳한 ‘어른’이 못돼서일까.
우리 사회는 슬픔에 대한 감각이 점점 더 마비되어가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연민보다는 공포가, 성찰적인 토론보다는 원시적인 분노만이 맹위를 떨치는 거야. 목적도 방향도 없는 공포와 분노만이.

6.
그래서 B, 너는 불쌍한 놈이다. 너는 주체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태의 폭력과 야만을 운반한 불쌍한 놈이다. 옥방에서 너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 너에게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올 것이다. 인간의 법보다 훨씬 더 크고 높은 것의 심판이 느껴질 것이다. 그때 너는 참회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죄의식이 다가오던 순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 지금 네게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세상에 대한 두려움, 자기 혐오, 너를 이런 상황으로 끌고 온 온갖 정황들에 대한 증오, 이것만이 지금 네게 남아 있다면 나는 두렵다.
이 사회는 너를 참회시킬 능력도 자격도 없다. 다만 너는 스스로 참회해야 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B야,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네가 나에게 보여 준 그 ‘순진한 미소’에 기대어, 부디 네가 참회의 길에 설 수 있기를. 할 수만 있다면 네가 고향 마을을 지키며 네 마을 앞을 흘러가는 그 아름다운 강의 지킴이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나는 비록 이 글에서 장황하게 너를 둘러싼 ‘사회’를 이야기했지만 너는 다만 ‘네 죄’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학은 부질없고, 세상에 대한 원망도 네 몫일 수 없다.
B야, 불탄 자리에는 무엇이 돋아날까―.
B야, 약속하마. 봄방학 때, 네 친구들의 글이 담긴 문집을 들고 네가 있는 곳으로 면회를 가마. 네가 좋아하던 신선생님, 이선생님과 함께. 그때 네 얼굴을 바라보고 네 손목이라도 쥐어주고 싶다. 부디, 내가 믿는 하느님의 령(靈)이 네 주위를 휘감은 이 시대의 ‘악령’을 물리치고 네게 다가가기를, 그래서 네가 저지른 모든 행동을 참회할 수 있기를….

2005년 1월 어느날, 이계삼 선생님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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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가난과 교육 - 이계삼

나에게도 역시 남아있는 운동권(?)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과 영향, 그것이 어떤 바탕에서 나온것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준 글입니다. 이계삼 선생님 글은 녹색평론에서 간간히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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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우리교육> 4월호에 쓴 글입니다. 전교조 운동과 교육운동 전반에 관해 생각해오던 것을 써 보았습니다.

‘가난’과 ‘교육’
이계삼(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1.
김진경 박복선 선생님께

<우리교육> 2월호에 실린 두 분의 대담을 읽고 제법 오랫동안 머뭇거리다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경남 밀양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두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대학 시절부터 저는 두 분의 성함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두 분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1학년 무렵 두 분이 함께 엮어낸 <꽃이 사람보다 아름다울 때>라는 산문집을 통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을 접했던 기억이 거의 없던 제게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산문’이라는 부제가 너무나 신선했거든요. 그 책에 실린 글들도 참 좋았고, 그래서 그 책을 여러 권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그때 저는 박복선 선생님을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선생님일 거라 혼자 상상하기도 했지요). 또 이런 기억도 있네요.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과 학생회실에서 빈둥거리던 저는 선배들이 기타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곁에서 따라부르곤 했는데, 김진경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인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라는 노래를 처음 듣고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벗이여, 어서 오게나 움푹 패인 수갑 자욱 그대로’ 하는 부분의 그 아름다운 선율과 서늘한 서정이 얼마나 좋던지요. 군대 다녀와서부터는 비록 떨어지긴 했지만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교육>은 도서관 잡지실에서 빠뜨리지 않고 읽었는데, 그 앞머리에 실린 편집장 박복선 선생님의 짧은 에세이를 참 좋아해서 우선 그것부터 먼저 펼쳐 읽기도 했어요.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것도, 그리고 이 글을 서신 형식으로 쓰려고 맘먹은 것도 그 대담 기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새삼스러운 반가움 때문입니다. 교직에 들어 조금씩 경력을 쌓아갈수록 커져만 가는 갈증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무언가, 우리 교육이 처한 이 상황을 분명하게 진단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제가 마음으로 기대고 또 삶의 사표로 모시는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다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가능성에만 최선을 다하자”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그분들 또한 이 상황에 대해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분의 대담 기사를 숨죽이며 읽었습니다. 그 신랄함과 날카로움에 약간의 쾌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기사를 두 번째 읽었을 때 저 또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이른바 ‘밀양 고교생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떠들썩한 소용돌이를 현장에서 겪은 뒤끝이었습니다. 언론에서 익히 보셨을 테지만, 근 한달 가까운 시간동안 이 사회는 밀양의 고등학교들과 지역 사회와 그 속의 ‘패악한 아이들’을 실컷 두들겨 팼습니다. ‘맞을 땐 맞더라도, 토론 좀 하자’는 내 속의 열망에 대해선 ‘잠자코 맞고 있어!’라고 윽박지르더니, 분이 좀 풀릴 무렵에는 총총히 다른 곳으로 떠나가더군요. 때린 자나 맞은 자나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커다란 상흔만 남긴 실로 기묘한 한판 소동이었습니다.


그리고 3월, 학교는 언제나처럼 다시 문을 열었고, 저는 ‘비평준화지역 2등그룹에 속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평반(우수반 아닌)’이라는 긴 꼬리표가 달린 학급의 담임으로, 도서관/학교신문 담당자로, 일주일 도합 스물여섯(보충수업, 야간 특별수업 포함) 시간의 수업을 하면서 학교와 집을 오락가락합니다.


2.
선생님, 오늘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저는 야간 자율 학습을 감독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과 차례로 면담을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눈 열명 중 세명이 편부/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중학교 내신 성적 50~60%대에 속하는, 그래도 성적향상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어 노동하는 부모들의 ‘고래심줄’같은 돈으로 심야 학원까지 다니지만 모의고사를 치르면 절반을 채 맞추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수시모집으로 부산 경남권의 사립대학에 근근이 입학할, 그래도 졸업하고 10년쯤 뒤에는 파출소 순경으로, 포크레인 기사로, 국밥집 젊은 사장으로 스승의 날 꽃다발을 들고 옛 담임을 찾아오기도 하는 아이들 말입니다. 그 아이들을 하나 둘 번호 순으로 복도로 불러내 공부 방법을 조언하고, 신상의 변화를 물으며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이들은 수줍어 말이 없습니다. 혼자만의 이야기끝에 녀석들의 말간 얼굴을 쳐다보다가 어찌할 수 없는 애틋함에 손등에다 제 손을 포개어도 봅니다. 이 아이들 중 또 얼마는, 주로 결손 가정의 아이들일 테지만, 가난과 외로움에 몸을 떨다가는 결국 ‘즐기고 저지르는’ 어떤 삶의 길에 접어들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제가 근무하는 이 조그만 시골 고등학교 안에도 남김없이 아로새겨진 이 세상의 모습을 느낄 때마다 저는 아득해집니다. 학교와 세상의 담장은 완전히 허물어져버려서 우리는 ‘학교’ 아닌 ‘세상’ 속에서 근무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교 안에는 이른바 ‘교실 붕괴’라는 교육적 불가능이, 입시라는 꼭지점을 향한 가없는 질주가, 천박한 중산층 의식에 깊이 물든 교사 집단의 안일과 무기력이, 초고속 성장의 단물을 흠뻑 빨아들인 소비문화의 광풍이, 풍요와 빈곤, 이 둘로 딱 쪼개진 한국의 경제가, 양심과 도덕을 제멋대로 조롱하는 타락한 한국 사회가 모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 안에 자리잡고 있었을 테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들더니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굉음을 내며 분출합니다. 가까이는 작년 연말의 대규모 수능 부정행위 사건과 우리 지역 아이들의 성폭행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만성질환자가 되어 잠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도 어느새 제 자리로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거기 있고 성장기 아이들이 12년의 시간을 거기서 보내다가 스무살이 되어 빠져나오는 것만이 분명할 따름, 이제 우리 교육의 장에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3.

선생님. 최시한 선생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겠지요. 저도 그 소설의 주인공 선재처럼 전교조가 결성되던 1989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해직된 선생님이 나오진 않았지만, 한동안 온 학교를 팽팽하게 감돌던 그 긴장된 공기와, 몇몇 젊은 선생님들의 긴장된 결연한 얼굴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사회의식이란 전혀 없는 촌무지랭이였지만, 저는 그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더니 선배들이 저희들을 ‘전교조 세대’라고 불러주더군요. 눈물이 흔한 편이기도 하지만, 저는 학교 민주광장에서 전교조 결성 전후를 기록한 사진전을 둘러볼 때마다, 거리 집회 와중에 대오 한편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뛰어나오는 해직교사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가르치는 것이 싸우는 것이라면, 싸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이리라’던 백무산 시인의 싯구절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선하고 약한 자들의 번민과 그것을 뚫고 나온 용기는 늘 보기 애처로웠습니다만 그것으로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교조 교사! 나도 저런 존재가 되리라, 마음 속 깊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도종환 선생님의 시가 있었습니다.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밖 햇살이 교실에도 가득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것’. 돌이켜보면, 전교조 선생님들과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은 20대 초반의 제 위태로운 자의식을 지탱해준 최선의 도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 또한 전교조 교사로 살아갑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나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여전히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 밀양지회에서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선생님들은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또한 정의롭습니다. 올해 초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 내내 발을 동동구르며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던 것에서 보듯, 전교조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순수한 조직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늘 이런 질문에 시달립니다. 과연, ‘지난 16년간 전교조는 아이들의 영혼의 성장과 자유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혹은, ‘전교조는 지난 16년간 이 땅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크기를 얼마만큼 줄여주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자명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따름입니다. 전교조는 7만의 조합원에 전임․상근 활동가들의 인건비로만 연 50억원을 지출하는, 시민사회의 가장 크고 영향력있는 집단이 되었지만, 교실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갑니다. 두 분 선생님이 대담에서 거듭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 교육운동은 지난 십수년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다만 방황했을 따름입니다. 그 방황의 뚜렷한 증거는 작년 전교조 위원장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거에서 대립했던 주장은 평범하게 요약하자면 전교조를 ‘아래로부터 복원하자’는 입장과 ‘강력한 투쟁을 통해 복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주장들이 모두 ‘교실 바깥’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을 뿐, 정작 ‘교실 안’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두 입장은 제겐 한 사물의 다른 두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전교조 복원’을 이야기했고 방법론의 차이를 지나서 결국 같은 결론-교육공공성 수호-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전교조 조직 복원을 통해 교육공공성을 둘러싼 참호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때, 이것이 ‘교실 안 아이들’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때 어느 책에서 읽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아마 선생님들도 아시겠지만,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곳은 거친 땅이고, 반대편은 좋은 땅입니다. 결국 누군가가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그는 뗏목이 너무나 소중한지라 강을 건너 산길을 가면서도 뗏목을 이고 다닙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뗏목을 이고 가지요?”라고.


저는 이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이 바로 지금 전교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교조 운동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커다란 덩치의 조합 대중조직 ‘전교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상념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전교조는 아이들의 변화를 교육적 성과로 이어가는 일보다는 스스로의 존립과 유지에 더 큰 동력을 쏟아부어야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자면 이런 이야기겠지요. 전교조는 아이들에 대한 교사의 사랑에 기초한 조직입니다. 그 사랑을 가로막는 힘과 싸우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조직(시스템)에 자신의 교육적 열정과 사랑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은 내면이 없는 물질이므로, 물질은 자신의 운동법칙에 따라 굴러갑니다. 전교조가 구축한 교육운동 시스템은 그 속에 담긴 교사들의 교육적 양심, 사랑과 뒤섞여 존재하지만, 물질이 정신을 밀어내는 인간사회의 법칙 속에서 시스템은 결국 어느 순간 자기 존재를 위해 운동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전교조는 지금 교육운동의 한 뗏목이 되어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전교조는 교육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성장했고, 그래서 대개의 양심적인 교사들은 전교조에 기대는 것 이상의 교육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정작 이 조직은 자기 존립에 더 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 역설적인 상황 말입니다. 결국 전교조는 모든 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틀로 ‘교육 공공성’을 설정했지만, 실제 이것은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결과한다는 김진경 선생님의 주장은 다소 과격하지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아이들 빙자해서 교장하고 월급 타먹는 운동’으로.


4.
선생님. 교육운동의 경험이 일천한 제가 운동조직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가난’과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 정신이 가장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은 ‘가난’했던 시절에 가장 아이다웠고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 이후로부터 아이다움을 잃었습니다. 교육운동은 ‘힘’은 없었으되 열정과 사랑만으로 존재했던 시절 가장 강력했고, 그 ‘힘’을 갖춘 지금 가장 무기력합니다.


아이들은 왜 변했는가. 학교는 왜 붕괴되어 가는가. 왜 교육운동진영은 방황하고 있는가. 저는 결국 이 모든 현실을 ‘경제 성장’이라는 물질 환경의 변화의 산물로 여깁니다. 아이들의 변화는 김진경 선생님의 말씀처럼 (디지털 문화의 확산으로) ‘이성의 의지’가 약해지고 ‘몸의 의지’가 강해지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경제적인 풍요가 낳은 정신의 타락을 흡수한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요즘 아이들이 이전 세대보다 사유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를 가능케하는 ‘결핍’의 요소가 덜해졌기 때문에 그러할 뿐, 아이들은 지금도 스스로 결핍을 느끼는 요소-우정, 진정한 교육-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맹렬하게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느낍니다)


전교조의 성장은 물론 그간 치열했던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단체교섭 등을 통한 교사 집단의 물질적 환경 개선이 더 크게 작용했고, 이는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이 정치적 상부구조의 개선을 추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경제 성장 자체가 한계 상황에 부딪쳐 있습니다. 그리고 ‘빈곤’이 우리 교육의 중심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 즉 ‘빈곤’을 ‘가난’으로 풀어가야 하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김진경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교육 이전에 삶이 붕괴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뚜렷한 경향에 대해 집중하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교육>이나 매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대안학교나, 혹은 매우 합리적인 질서가 정착된 공교육 속의 학교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어떤 대안 학교는 100억원이나 되는 자금과 비판적인 교양인 양성이라는 이념까지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처한 현실과 너무나 비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비교를 단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미학적 고려라고는 전혀 없는 낡은 건물에서부터, 속물적인 교육관, 비평준화 지역의 맹렬한 경쟁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감옥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청춘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이 학교에 대해 회의를 느낄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학교의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가 그저 ‘친구들 만나고 급식먹는 것’ 뿐이라 할지라도, 입시 교육에 짓눌려 기계적인 교수․학습을 반복할지라도, 그 속에 가난한 아이들끼리의 평등과 우정의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반면교사처럼 이 억압적인 삶에 대한 성찰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빈곤’이 배려되고 보듬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교육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육의 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적 성장’을 위시하여 개인 단위의 ‘성장’ 개념에 대해 갈수록 회의하게 됩니다. 교사는 다만 ‘우정’을 위해 존재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생산적인 담론은 무엇일까요? 우선 저는 전교조를 위시한 교육운동 진영이 ‘가난’과 ‘결핍’ 그리고 ‘힘없음’을 스스로 선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라는 고추상적인 담론, ‘교육공공성’이라는 현재로서는 중산층의 가치에 기울어진 논리보다는 그저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현실을 부여안는 것이라 믿습니다. 가난에 대한 성찰, ‘빈곤’을 ‘가난’으로 보듬어안는 교육, 중산층의 자기 한계를 넘어 가난한 자들과 연대했을 때 우리 교육운동이 그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복선 선생님이 대담 가운데서, 그리고 ‘하자작업장’ 소개 등을 통해 이야기하는 탈근대적 교육관에 대해 부담을 느낍니다. 이것은 결국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일부 중산층의 교육관을 실현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그런 교육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과 어떤 연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제가 너무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를 빨갛고 노랗게 물들인 아이들의 분방하고도 거침없는 자기 표현보다는 무엇에든 서툴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이웃에 대한 고운 연민이 제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5.

선생님. 글을 써 놓고 보니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제 스스로 막연한 느낌으로만 가두어두었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펼쳐놓은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펼쳐놓을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선생님들의 대담에서 던진 이야기들이 실마리를 던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우리 교육이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즉 전교조 결성 초기의 선한 열기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 시절 제가 보낸 고교 3년을 회상하는 것은 참으로 심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몇몇 젊은 선생님들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일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나중에 여쭈어보았더니 그 무렵이 교협에서 전교조로 넘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생전 영어 수업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거의 않던 분께서 흑판에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를 쓰고 고요히 우리들에게 이 시의 속뜻을 물으셨을 때, 아이들을 교단 앞으로 불러내서 수학 문제를 못 풀면 엄격하게 체벌하시던 선생님께서 어느날 수업시간에 1970년대와 전태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우리 학교에서 평교사 협의회의 핵심으로 소문난 어느 선생님이 빈 수업 시간 교정 스탠드에서 골똘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그 3년의 모든 암울한 기억에 값할 만큼 소중한 가르침으로 남았습니다. 그 시절 그분들은 아무 힘도 없었고, 학교는 말할 수 없이 억압적이었으며,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지만,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넘어서는 귀한 배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과 ‘결핍’, '힘없음'이 빚은 진실한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힘’과 ‘시스템’이, 혹은 탈근대적인 담론으로 정연하게 완비된 어떤 틀도 결코 좋은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랑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의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까마득한 선배 선생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겸연쩍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들의 생각의 핵심을 잘못 짚고 이야기한 것이라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목말라했던 사람은 아마 저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의 고민이 우리 교육의 장에서 한 의제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겁도 없이’ 이 무모한 글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 제게 던진 소중한 성찰을 내내 간직하겠습니다. 언제나 몇 발 앞선 자리에서 우리 교육의 길을 열어젖히고자 애태우시는 선생님들의 열정을 저도 닮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두 분 선생님들께 반가움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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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중요한 것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 새만금 바닷길을 걷고 나서



'4공구를 터라'
2005년, 올해의 새만금 바닷길 걷기는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2월말에 있었다. 올해로 6회를 맞는 바닷길 걷기. 아직까지 다른 어떤 길이 아니라 '바닷'길 걷기로 남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다.

올해의 걷기 주제는 '4공구를 터라.' 였다. 새만금 방조제 4공구, 새만금 방조제의 공사구간중 가장 북쪽, 군산쪽에 있는 곳이고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삼보일배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2003년 6월에 기습적으로 물막이를 한 곳이다.

4공구가 막힌이후 군산지역의 내초도, 하제들의 마을은 엄청나게 쌓인 죽뻘과 바닷물의 염분농도의 변화, 해류의 변화에 인한 갯벌 생태계의 파괴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새만금 연안 전체에도 지속적이고 치명적인 피해가 쌓여가고 있다.

이 4공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터야만이 새만금 갯벌이 살 수 있다라는 것이 지역의 어민들과 새만금 문제를 깊게 고민해온 사람들의 꾸준한 주장이었으나 이번에 다시 바닷길 걷기의 핵심적인 요구로 어민들의 마음을 모으려고 한 것은 새만금 문제에 대한 행정심판 조정권고안과 그 이후에 내려진 판결이 그 배경이었다.

현재의 새만금 간척 사업계획이 그 실효성이 없다는 판결은 많은 이들이 환경단체의 승리라고 하고 일각에서는 '국책사업의 발목을 잡는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그 판결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어민들의 목소리는 담겨있지 않다.
그 판결은 기존의 방조제 공사를 인정하고 있으며 보강공사의 길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에 4공구가 막힌 것을 바꿀 수 없는 현실로 보는 것이고 공사추진측과 환경단체간의 새만금 이용(?)계획의 협의도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하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전북의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고 중앙의 환경단체들도 내심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새만금 신구상안에도 4공구는 뚫리면 좋겠지만 안 뚫리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신구상 안에는 군산쪽으로의 부분 간척에 의한 토지 이용, 갯벌 국립공원, 해양 스포츠 레저 센터, 생태 체험장, 공동 어획장 등 전북도민들을 달래기 위한 화려한 환경친화적(?)인 선물세트가 있지만 역시 어민의 목소리는 들어있지 않다.

사실 이런 안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전북도민의 개발과 그로 인해 쟁취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발전에 대한 열망은 외부인의 짐작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지역보다 개발에서 계속 소외 받아왔다는 한이 서린 이 열망은 비록 그것이 왜곡되었을지언정 그 정서를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새만금 갯벌을 그래도 살리기 위한 타협의 미끼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동강의 기억
이런 저런 생각 속에 동강이라는 곳이 불현 듯 떠올랐다. 동강댐 건설저지에 성공하여 자연 생태계 보전에 성공한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편으로 도로가 뚫리고 많은 다리가 놓여지고 있으며 과도한 레프팅 붐으로 지속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곳 말이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짐처럼 남겨져 있던 동강에 살던 사람들, 특히 수몰 예정지의 주민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보상을 더 받기 위해 빽빽이 과수를 심고 작목을 심고 급조된 건물을 지은 사람들, 동감댐 건설 반대운동에 분노와 증오를 보이던 사람들, 댐 건설 계획의 취소로 떠나지도 남지도 못하게 된 그 사람들이 생각났다.

비록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무심코 스치며 보았을 뿐이고, 그 우스꽝스런 과수원과 증오에 찬 현수막을 스치듯 지나가며 보았을 뿐인데도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의 짐이 되어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 중에서는 보상을 받기 위해 들어온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지역에 뿌리 내리고 살던 사람들일 것이다. 동강과 함께 자기의 삶을 일구어 가던 사람들 말이다.

그 사람들의 마음에 동강이 이미 죽어버린 것이라면 누가 동강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돈을 쏟아 부어야 뭔가 하는 건 줄 아는 자본가나 관료가? 모든 걸 일반화, 표준화시켜야 이해하고 직성이 풀리는 과학기술자가? 오늘 하루도 수십가지 사안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환경단체가?


자연과 어떻게 살아갈까?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연을 지키자.', '생태계를 보전하자.' 따위가 아니라 '자연과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누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물어야 하고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 문제의 답을 내는데 도움이 되는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손과 발을 이용해서 직접 자연과 살아가는 농민과 어민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농민과 어민이 자연과 함께 사는 완벽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계화도의 은식이 형이 항상 얘기하듯 새만금이 막히기 이전에도 어민들의 마음속에는 바다가 차츰 죽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획량이 줄어드는 가운데도 더 큰배를 다투어 구입하여 더 멀리나가 더 촘촘히 잡아들이는 경쟁속에서, 뻘을 물펌프로 뒤집어 조개를 채취하는 대량 채취의 방식에서, 바다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마음자세에서 이미 바다는 차츰 죽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느 농사꾼이 얘기하듯 WTO 이전에도 농민의 마음속에 땅은 죽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땅이 산성화되고 생명의 기운을 점점 잃어가는 가운데에서도 수확량을 유지하기 위해 화학비료와 농약의 양을 점점 늘려갈 때 이미 땅은 죽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새만금 간척이나 WTO 개방은 이미 점점 죽어가던 바다와 땅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그 명줄을 조여가는 마지막 수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이 땅을 지켜온 소농들과 맨손 어업을 하며 바다와 함께 살아온 어민들이 그렇게 사라져도 괜찮은 것인가?

자기 마을 주위에 들어오는 군산지역 쓰레기 매립장 건설을 막기 위해서 싸우던 내초도 주민들이 4공구가 막힌 이후로 더 이상 바다일도 못나가게 되자 자신들이 반대하던 바로 그 매립장에 나가 쓰레기 분리작업을 하는 날품팔이를 하고 있는 현실이 새만금에 살고 있는 모든 어민들의 미래가 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파멸의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닐까?
그들과 함께 수백년을 이어 내려온,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지혜들도 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자리를 자연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는 자본가와 산을 깍고 물을 막고 들판을 파헤쳐야 자기의 역할을 하는 줄 아는 관료들과 자기가 모든 해법을 알고 있다고 과신하며 문제만 더 키우는 전문가와 땅에는 잔디를 심고 공을 치며 '나이샷!'을 외쳐야 자연과 무언가를 주고 받는 줄 아는 사람들이 채운다면 그 자체를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농업과 새만금
이번 바닷길 걷기하는 동안 알게된 소식중에 하나는 전국적으로 정부에서 돈을 주고 소형어선들의 폐선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남획을 방지하고 수산자원을 보존하려 한다는 정책이란다. 천혜의 자원을 망가뜨려놓고 한다는 짓이 그런 짓이다. 결국엔 기업화된 경쟁력있는(!) 대형어선만 남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농업대책이랍시고 휴경논직불제를 시행하는 거랑 어찌 그리 똑같은지.

사실 새만금의 아픔은 우리나라 농업의 아픔과 그 뿌리를 같이한다. 넓은 들과 풍부한 바다를 가진 축복 받은 땅, 전라북도가 절망의 땅으로 주민들에게 각인된 것은 농업의 쇠퇴에 큰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는 것이 수입이 되지도 않고 더 이상 존중받지도 못하게 되면서 전라북도는 미개발의 땅으로 보이게 되고 그렇게 쌓인 한들이 여전히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밀고 나가게 하는 힘 중의 하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농업이 죽어가는 것은 다른 것의 죽음도 함께 부르고 있다.

갯벌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
새만금 바닷길을 걸으면서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지만 그 풍경에 그레질을 하는 어민들, 갈쿠리 하나들고 갯벌에 나가 조개잡는 어민들, 배 위에서 그물을 펼치는 어민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 풍경들이 여전히 아름답게 다가올 수 있을까? 그곳이 삶의 터전이 아니라 단순한 관광지로 여겨질 때 정말 아름답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자본에 종속된 도시의 시간과 해와 같이 살아가는 농촌의 시간이 있다면 어촌의 시간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에 따라 매일 다른 일상을 꾸려나가는 달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다.
새만금. 그곳에는 오늘도 달의 시간에 맞추어 삶을 일구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손과 발에는 퇴색하고 변질되어갈지언정 우리가 가꾸어 가야할 '오래된 미래'가 스며있다.

"진정 살리려 하는가? 진심으로 살리려 하는가?"
바닷길 걷기를 할 때 갯벌이 끊임없이 물어온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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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블로그 너무 편파적이다!!

내가 글만 쓰면 자가증식 불로거 ZINE 에 올려준다. ^^;;

 

가끔 내 친인척이 진보넷에 일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해본다.

 

사실..... 나쁘진 않다.

호호호.....  ^________^

 

때론 내가 너무 선정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런 글 썼다고 다시는 안 올려주는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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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새만금 바닷길 걷기. 같이 걸읍시다.

제 6회 새만금 바닷길 걷기

2004년 5회 바닷길 걷기 모습

 

2002년 3회 바닷길 걷기의 모습

 

올해로 여섯번째 새만금 바닷길 걷기가 있습니다. 그동안 봄에도 걷고 여름에도 걷고

가을에도 걸었었지만,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겨울에 걷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만큼 절박한

마음이 앞서는가 봅니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왔습니다. 환경단체의 승리이다 뭐다 하고 한편에서는 국책사업이

방해받내 어쩌내 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어민들에게 하나의

희망이자 또 하나의 절망입니다. 판결문에 새만금 연안에 살고 있고 새만금갯벌에 의지하여

삶을 살아가는 어민들의 입장은 반영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4공구 방조제를 트지 못하면 갯벌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지금 같이 해수가 유통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어민들은 새만금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번 바닷길 걷기는 그런 어민들의 마음과 4공구를 터야 한다는 염원을 모으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만금 바닷길 걷기는 '걷기'입니다. 걸으면서 갯벌을 보고 그곳에 사는

생명들을 만나고, 사람 사는 얘기들을 듣고 나누고 하는 것이 걷기입니다. 갯벌의 변화하는

모습을 직접보고 봄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자기안의 생명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걷기입니다.

 

새만금 갯벌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모든 이들과 같이 걷고 싶습니다.

 

<바닷길 걷기 일정>

 

날짜 : 2005년2월24일 ~ 3월2일 (6박 7일)

 

일정 :

2월 24일 군산 내초도 온누리 교회 집결(오후 4시) (1박)
2월 25일 내초교회 - 남스라 - 하제 - 어은리 (2박)
2월 26일 어은리 - 월연리 - 망경다리 - 청하 (3박)
2월 27일 청하 - 심포 - 거전 (4박)
2월 28일 거전 - 남포리 - 동진다리 - 동진 (5박)
3월 1일 동진 - 계화도1호 방조제 - 계화도 (6박)
3월 2일 계화도 - 계화도2호 방조제 - 돈지 - 해창장승벌

 

참가비 :

전일 참가 50,000원

부분 참가 참가일 수 * 10,000원

*참가비가 부담되는 분들은 밑의 연락처로 면담(?) 바랍니다.

 

준비물:

침낭, 세면도구, 개인컵, 수저, 따뜻한 옷, 비옷이나 우산, 점심을 위한 도시락 통, 보온물병

 

기타사항:

1) 첫 집결지 내초도 교회에 오는 법.

군산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길을 건너 왼편에 보이는 주유소를 끼고 돌아

고가도로 밑에 있는 정류장에서 04번 차를 타면 됩니다. 차는 매시간 정각에서

15분 사이에 정류장을 지나간다고 합니다. 길 설명이 어려우면 터미널에 내려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2) 이후 일정에 합류하는 방법.

걷기 도중에 합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숙소로 예정된 지역으로 오셔서 합류하시던가

밑의 연락처로 연락을 하셔서 찾아오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3) 숙소및 저녁일정

숙소는 대부분 머무는 지역 마을회관을 이용할 계획입니다. 저녁에는 지역주민들과

간담회를 하던가 새만금 갯벌 살리기 촛불집회를 열 계획입니다. 모든 일정이 강제

사항은 아닙니다.

 

4) 식사 계획

아침과 저녁은 직접 해 먹습니다. 점심은 아침에 만든 김밥이나 주먹밥으로 해결할 계획

입니다. 그래서 개인별로 도시락통과 겨울이라 따뜻한 물이나 국을 먹을 수 있는 보온병을

준비해오시면 좋습니다.

 

5) 사전 등록(?)

미리 참가 신청을 하시지 않더라도 참가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걷기 준비를 위해서

어느정도의 참가 인원 파악이 필요합니다. 그레 게시판 http://nongbalge.or.kr/jboard/?code=gaetbuledu 에 참가의사를 밝히시거나 밑의 연락처로 신청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연락처 :

고은식 016-623-7658

 

위 연락처가 안될경우

고철 018-276-7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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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이트 3곳을 발견했는데...

자세한 설명을 쓰기는 힘들고, 아직 제대로 곳곳을 살펴보지도 않았지만... 까 먹지 않기 위해서 우선 올려놔야지.

 

http://www.worldnakedbikeride.org/

 

http://www.barewitness.org/

 

http://www.poetsagainstthewar.org/

 

한번씩 가보세요.

마지막 사이트는 한글로도 만들어졌음 좋겠내요.

 

그리고, 두번째 사이트에서 퍼온 사진을 올립니다.

캘리포니아 친구들이 만든 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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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금) 광화문에서 정토회까지 행진합시다.

 

제목을 쓰는데 행진이 맞나? 걷기가 맞나? 잠시 고민이 됩니다.
그러다가 곧, 누구에게는 행진이 되고 누구에게는 걷기가 될 수 있겠지
하고 정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걷기가 힘찬 걸음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서 행진이라고 붙였습니다.

 

기적이 필요한 상황. 정말 기적이 필요한 상황이라는게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게 요즘입니다.

 

지율스님을 살렸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살릴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살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스님이 가리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끝을 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살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살리는 것이 정부의 선심이나 정치인들의 압력이나 모모 단체의
이름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의 죽음앞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자기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어 왔던 당신과 내가 살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행진은 사실 만화같은 상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진짜 기적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광화문에서 정토회까지 4-5시간을 걷는 동안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노래를 부르고 지율스님을 살리러 가자고 얘기를 건내서 점점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길을 걷는다면 정토회에 도착할 즈음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인파로 불어나서 거리를 가득 메울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곳에서 누구는 지율스님과 천성산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참회의
108배를 하며 누구는 지율스님을 살릴 방안을 찾는 토론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지율스님을 살릴 거라고 확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염원이 사람들과 공명을 이루어 걷는 동안 점점 더 커진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이런 상상이 현실화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걷는 의미는 충분히 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얘기를 건내고, 같이 길을 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끝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끝까지 가더라도 1시간만 걸을 수 있는 사람은 1시간만
걸으면 되고, 동참을 호소할 사람은 피켓을 만들어오고, 노래를 하고 싶은
사람은 노래와 악기를 준비해 오고, 각자는 행진할 때 쓸 촛불이나 등불을 준비해 오면
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행진처럼 앞에서 앰프로 구호를 외치거나 대열지도(?)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길은 인도를 이용해서 갈것입니다. 각자가 사람들과
나눌 것을 얼마나 준비해 오느냐에 따라 우리의 걷기가 얼마나 풍성해질지가 정해지겠지요.


2월4일(금) 6시. 항상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모여서 6시 30분에
행진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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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율이고 내가 천성산이다.


 

내일 다들 봅시다. 손잡고 광화문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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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악기 만들기 - 탬버린(?)

이번주 토요일 5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천성산과 지율스님을 살리기 위해 전국의
도롱뇽의 친구들이 모입니다.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집에 있는 타악기를 하나씩 들고 와야 하는데 집에는 없고

사는 것은 비싸다라고 하는 친구들은 재활용품을 가지고 악기를 만들어 오면 됩니다.

 

여기까지 배경 설명이었고 쉐이커에 이어서 탬버린을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지율스님을 걱정하며 울분을 토하며 술을 한병 딸때 병뚜껑을 버리지 말고 주머니에

모아둡니다. 술집에서 마시고 있는거라면 바닥에 이리저리 널려있는 병뚜껑들을

주워담습니다. 뚜껑은 무게와 기타등등을 고려했을때 맥주병 뚜껑이 좋습니다.

 

준비물 : 병뚜껑 여러개, 나무 판자, 못

 

조금 큰 못으로 뚜껑 가운데에 구멍을 뚫습니다.

 

 


구멍을 뚫은 두개의 뚜껑을 편편한 쪽이 맞붙도록 해서 나무에 못질합니다.

못질을 할때는 병뚜껑이 자연스럽게 위아래로 움직일수 있도록 간격을 주어야 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여러개를 자기 취향에 맞게 박아넣고 완성합니다.

 

 

소리 듣기 mp3 다운받기

 

때에 따라서는 안마기나 머리 지압기로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단, 사용상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 끝으로 자기가 만든 악기에 도롱뇽 그림을 그린다거나 구호를 써넣는다거나

하면 더욱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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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악기 만들기 - 쉐이커

이번주 토요일 5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천성산과 지율스님을 살리기 위해 전국의
도롱뇽의 친구들이 모입니다.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집에 있는 타악기를 하나씩 들고 와야 하는데 집에는 없고

사는 것은 비싸다라고 하는 친구들은 재활용품을 가지고 악기를 만들어 오면 됩니다.

 

쉽게는 페트병 두개를 가지고 오는 것 부터 할 수 있겠지만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고

실험을 해보면 많은 것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선은 캔을 이용해서 쉐이커를 만들어 봅시다.

 

요즘 지율 스님 때문에 기분도 꿀꿀하고 꽉막힌 정부 때문에 답답해져 집으로 돌아올때

눈앞에 캔이 보이면 발로 뻥 차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한번 참아주시고 소중히 캔을

집에 가지고 와서 잘 씻어서 물기 하나 없이 말려줍니다.

 

그리고 나서 집에 있는 마른 곡식(콩, 쌀)을 넣어줍니다. 이때 오래되고 벌레먹어

못먹는 것이면 좋겠죠. 모래를 넣어도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 뚜껑을 막아야 하는데 테이프로 바로 붙이면 테이프에 속 알갱이가 들러붙기

때문에 종이로 한번 덮어줍니다.

 

그리고 테이프로 마무리를 해주면 완성.

 

완성이 되면 마구 흔들어 줍니다.

 

콩을 넣으면 다음과 같은 소리가 납니다.


♪ 콩 쉐이커 ♪ mp3 받기

 

(유기농)쌀을 넣으면 다음과 같은 소리가 납니다.
♪ 쌀 쉐이커 ♪mp3 받기

 

제작이 끝나면 그대로 두지 말고 도롱뇽 그림을 붙이거나 자신의 구호를 써붙여서

자신의 악기로 완성시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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