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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날 아침.
우주로부터 폭탄이 떨어졌다.
주말 내내 배가 아프고 토할 것 같고 입맛이 없어
혹시나 싶어 병원에 갔더니 역시나
축하드려요, 임신입니다.
축하는 개뿔.
의사 말을 듣는 순간 눈 앞이 깜깜해지면
눈물이 하염없이 주룩주룩.
시댁의 압박을 견디다 못 해
3년 동안 해 오던 피임을 중단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늦게 생기길, 안 생기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근데 왠걸 피임 안 한지 고작 2달만에
애가 생기다니
기쁜 마음이나 감동 같은 건 하나도 안 생겼다.
시댁에 말하면 좋아하실 목소리조차 듣기 싫어
남편에게 전화하라고 시키고
병원 의자에 1시간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사무실에 와서 얘기하고
달가워하지 않는 사무실 사람들에 기대어
나도 하나도 안 기쁘다고 털어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문자로 사실을 알리며
'축하는 신랑에게 저에겐 응원을' 이라고 보냈다.
그럼에도 전화나 문자로 축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말마다 토를 달며 입술을 삐쭉삐쭉
토 단 말들은 뭐 이런 것들이다.
울고 웃을 인생의 동반자는 유진기 하나면 충분.
한국사회에서 진정 새로운 삶에의 도전은 아이를 낳지 않는 삶.
아이를 위해 즐거워하고 싶지만
도저히 마음이 그렇게 안 먹어지는 걸 어쩌라고.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이 꿈 같다.
하루 종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침대에 누워 신랑에게 이런 내 마음을 조금 얘기해 봤지만
그저 자기가 많이 도와줄 테니 잘 키워보잔다.
등 돌리고 누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데
옆에서는 잠들었는지 숨소리만. 에휴.
아이를 위해서
기쁜 척. 즐거운 척. 행복한 척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냥 내가 이 사태를 받아들일 때까지
견뎌볼 수 밖에.
왜 아이를 낳지 않아? 라고 묻는 것은 맞지 않아.
왜 아이를 낳아? 라고 묻는 것이 맞아.
아이를 낳는 건 새로운 (그리고 매우 독특한) 관계를 맺는 것이고 등등
암튼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의 내 삶이 너무나 행복하기에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아이를 낳을 이유 따위는 전혀 없는 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자꾸만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아이를 낳아서 더 행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한 선배 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나다. 최고의 태교는 낳고 싶을 때 낳는 것이다.
낳고 싶지도 않은데 낳으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지
당신이 알아?
나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나에겐 내 행복을 뺏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말 너무 고통스럽다.
설 이후로 내내 잠을 못 잔다.
처음으로 결혼한 게 후회됐다.
남편이 아무리 좋아도 결혼이란 제도가 가진 넘을 수 없는 문제들이 존재한다.
정말 넘을 수 없는 걸까?
2월 2일이 시아버지 회갑이라
잔치를 해드릴까 여행을 보내드릴까 고민하다
시댁에 가서 시부모님께 여쭈기로 했다.
그게 벌써 12월.
근데 정말 눈코뜰새없이 바빠서
결국 12월에 시댁에 못 갔다.
지난주에 가려고 했는데 친정에 일이 있어서 또 못 가고
이번주에 가려고 했는데 또 일이 생겼다.
이번주에 못 간다고 다음주에 가겠다고
시댁에 말씀드려야 하는데 못 하겠어서
신랑한테 부탁했더니 약간 짜증난 듯.
잠시 후 아버님과 통화했다면서 전화왔는데
16일에 내려가서 결정하고
1월 30일에 내려가서 식사하고
2월 6일에 여행가기로 했다는 거다.
2월 13일은 설이라 원래 가야 하고
5주 동안 4번을 시댁에 가자는 얘기.
잘난 것 없는 며느리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결국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활동'에 관한 얘기를 하며 언쟁을 한 걸 빼면
거의 첫번째 부부싸움인듯.
결국 결론은 내리지 못 했다.
이래서 부부싸움을 칼로 물베기라고 하는 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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