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밤에 우는 매미

 

 

어제 문자가 왔다

 

"언니, 혹시 전경버스추락사고 기사봤어요? 그거 우리학교 농활대 집회 막으려고 오다가 그랬데. 부모님들 전화계속오고 난리"

 

전보처럼 따닥따닥한 글씨로 가쁘게 도착하는 문자를 보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우리학교는 충주로 농활을 가는데 농활을 마치고 나면 충주시내에서 선전전과 행진을 한다. 유인물들고 나눠주고, 피켓팅하는 정도의. 정리집회도 체육관 앞에서 하니까 길도 안막고.. 차도 별로 없는 시내를 한바퀴 돌 뿐인 집회다. (폭력과 비폭력집회를 구분하고 싶지는 않지만. 암튼)

그 집회때 교통 통제가 필요한테 충주 경찰서에서 괴산으로 지원요청을 한 듯 하다.

괴산에서 넘어오던 전경버스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두명이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사고로 인해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한 내 친구같은 그 사람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강제징집에 반대하고 심지어 완전 인권침해적이며 노동착취인 전투경찰 착출에 매우 반대하는 나로써는 그들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다.

우리 농활대에 전화해서 욕을하고 내아들 살려내라고 소리질러야했던 부모님의 심정도 안타깝다.

그리고 농활대에게 반사적으로 돌아온 화살에도 마음이 아프다.

 

 

 

 

지난 겨울 FTA집회때 종각역에서 나는 차에 치일뻔한 경험이 있었다. 집회대오가 경찰선을 뚫고 나와 길을 지나고 있었는데 행렬이 이어지는 중간으로 골목에 서있던 차가 무작정 들어온 것이다. 나라망치는 것들 다 죽으라는 소리침과 함께;;;  골목에서 우회전을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집회행렬이 이어지고, 기다렸어야하니 짜증났을 수 있겠다. 하지만 무조건 차 앞머리를 사람들에게 들이밀며 위협하고 시뻘개진 눈으로 욕을 내뱉는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파업을 하는 노조에게 퍼붓는 욕설에, 교통을 막는 장애인들에게 퍼붓는 욕설에, 언제나 익숙해질듯 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건 어쩔 수 없다. 우리의 방식을 다시 회의해야하는 것인가 많이 고민하였지만 이 문제의 본질은 조금 더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보통 사람들의 적대는 보통사람들에게 돌아오고 있으며, 더욱 심화되고 있는지.

집회에 나온 사람에 대한 이등시민권자의 낙인과 적대, 왜곡은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집회가 담아내는 내용들이 일반의 경험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인가?

주변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내용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막아야한다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다른 종교의 집회를 또 다른 종교가 막는다던지, 황우석 지지집회를 한다고 해서 황우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막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지않은 영향이 있기도 하다. 집회의 구호에 나의 의지가 담길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덮어놓고 이야기하기는 힘들겠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방식이 문제일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건 좋아. 하지만 방식이 문제야. 평화적으로,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할 수 없어?'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니까 이게 대부분의 생각이라고 해도 될런지. 암튼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 매우 상식적인듯이 하는 이야기. 매우 중립적인듯이 하는 이야기.

한나라당에서 촛불집회 금지법 만든다기에 정말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뭣만 하면 반사적으로 촛불집회만 고집하는 몇몇의 경우때문에 답답했던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촛불집회로 더 싸움 잘되고 더 잘 이기고 좋은 소리 많이 들을 수 있으면 백번이고 하겠지만 보시다시피 완전 아니잖아. 촛불집회는 장갑차사건 이후로, 탄핵사건이후로 시효가 만료했다고 본다. 많은 사람이 모였던 그때에 촛불이 나왔던거지 촛불만 든다고 다 나오는거 아니란말이지-

그럼 진짜 뭘까. 그냥 아직은 반역의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어! 라고 생각하며 언제올지 모르는 그때를 기다리면서 조심조심스럽게 싸울 수 있는 사람들끼리의 싸움만 이어가면 되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호 뽑아내고 우리의 센스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기에 투쟁의 숨은 짧고 역사는 명확하다.

 

 

교과서에서 주구장창 떠드는 얘기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얘기도 참 많이 한다.

자유와 권리가 있으면 책임이 따르는거라는 얘기인데 이 얘기엔 한가지가 빠진것 같다. 국가를 만들어온 권리가 있으면 나누어질 권리, 파괴할 권리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권리이자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한건 아닐까? 난 이제 권리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이런 저런 싸움을 만들면서 '좋은 수업을 들을 권리'니 '등록금문제에 참여할 권리'니 참 많은 권리권리를 이야기했는데 그 권리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에 대해서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졌다. '나의 의견을 위해 집회를 할 권리'에게 '내가 가야하는 길을 빨리 갈 권리'로 대항하려하는 대화의 트랙을 어떻게 파괴해야할까?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완전 지배세력에게 먹혀버린 기분이든다.

노동자의 정치파업은 불법이라는 말을 엄청나게 떠들어댄 덕분에 말이지-

학생들의 순수하지 않은 정치적 농활은 안된다는 말을 계속 떠들어댄 학교도.

밥그릇 싸움한다고 이야기하던 언론이 이제 밥그릇싸움 안한다고 뭐라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어느장단에 춤춰야하나 고민하지 말고 할말이나 하는게 낫겠다

결국엔 해야하는 말이 있고 해야하는 일이 있는데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다. 이나저나 해야할 말은 한가지니까. 그 사람이 받아들여야하는 것의 핵심은, 본질은 하나일수 밖에 없는데 자꾸만 우회하지 말고 맞딱뜨려야한다.

 

 

이번 금속노조파업이 그래서 미어진다

한미 FTA반대를 걸고 총파업을 결의하였지만 산별노조전환이후 첫 파업이라서인지 엄청나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던 (불법적 정치파업이라는 말로!) 지배세력에게 당해버렸다. 왜 투쟁을 투쟁으로 조직하기 어려워져만 갈까. 왜 투쟁을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은 점점 투쟁이 아닌것이 되어야만 할것 같다는 강박이 생겨날까. 결국 해야하는건 투쟁인데, 신자유주의와 민중의 생존권사이에 전선이 있다는 것인데, 노동자 자본가사이에 평화란 없다는 것인데 왜 그 말을 못하고 빙빙 돌아만갈까.

 

 

 

 

 

가끔 어떤 친구를 만나면 나는 쇳물을 어깨에 퍼붓는 기분이 든다.

막 나에게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혹은 노조나 여성주의, 정치에 관련된 모든것을 물어보며 나의 대답과 입장을 듣고싶어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에 난 진짜 도망치고 싶다. 열심히 대답을 해주다가도 참 실없는 짓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나타난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그가 얻고자하는 '정답'사이의 괴리랄까, 아무리 좋은말, 그가 당장에 인정할 수 있는 말들을 늘어놔봤자 그곳에서 답이 얻어지지 않는다. 명확하며 확인될 수 있는 전선일수록 그러하다. 투쟁이 요구하는 것은 인류애가 아니라 연대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있었던 범국민대회에서 버스정류장에서 집회대오를 쳐다보는 시민들을 길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뼉을 짝짝 마주치며 '박수좀 쳐봐요!'라고 큰 소리로 원망하듯 외치던 충주시농민회장님이 생각난다. 그 답답한 마음, 우얄까,

 

 

 

 

 

 

방법이 뭐가되던간에 투쟁해야 살 수 있다면 온몸으로 표현하며 싸워아한다

가로등 불빛에 속아 밤에 맴맴 울어제끼는 매미가 되면 안되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