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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찾기를 넘어서는 진보운동을... (김상봉)

시대적-역사적 요청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진보진영이 '권리찾기'를 위한 노력에 운동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그런 운동을 진보적 가치의 중점 사항으로 여겼던 것이 어느정도는 사실이겠다. 요즘 많이들 부르짖는 소수자나 장애인 권리찾아주기, 혹은 더 나아가서는 페미니스트들의 '권리찾기'(를 넘어 다시 자기네들의 '권리 만들기')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범주에 스스로를 묶는 방어적(외양은 적극적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방어적인) 진보를 지양하고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는 좋은 말씀이 있기에, 옮겨오면서 몇 자 보탤까 한다. [나의 어설픈 '보태는 말씀'이 지겨울 경우 아래의 펌글로 바로 이동해도 됨.]

 

그러고보면 권리라는 개념이 무슨 엄청난 진보적 가치를 담고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태생적 연원으로 봤을 때, 힘 쎈 부자놈들이(힘이 쎄서 부자가 되고 부르조아가 됐는지 그 역인지는 따질 필요도 없이) 저희들 맘대로 땅을 구획치고는 '이건 내꺼다' 라고 외치는 배타적 권리가 그 뿌리일 것이다. 힘이 없어서 무주공산에 널린 권리를 미처 행사하지 못한 자들은 나중에 인권이라는 개념에 구원을 요청해 보지만, 권리의 속성은 언제나 강자의 논리였던 것이 우리네 역사 아닌가 (아니 우리네만이 아니라 동물의 왕국에서 더 자연스러운 질서). 그렇게 권리란 본연적으로 상호적 관계 속에 있으므로, 힘이 없거나 기회가 없어 '구획치기'를 못한 놈이 있기에 구획친 놈의 권리가 의미있는(?) 것이지, 모두가 똑같이 구획치고 사방에 땅주인만 있고 고용할 일꾼이 없다면 그런 구획치기의 의미는 무화되고 어떠한 권리도 발동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실상은 그렇지가 않고 힘센놈의 권리가 충실히 작동되는 것이 현실이니, 이제 권리 개념은 항상적 대결과 투쟁과 저항를 낳을 수밖에 없도록 규정되어진다는 말이겠다.

 

권리의 속성은 그렇게 늘 배타적이고, 이런 배타성의 성숙된(!) 면모가, 적극적으로는 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고 타인을 죽이는 것도 나의 권리이고, 소극적으로는 내 이웃이 굶어죽든 아파죽든 타인의 비참과 불행을 방관하는 것도 나의 권리라는 주장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성격의 권리에다 대고 야만과 반인류을 거론하며 도덕적-종교적 설교를 아무리 늘어놓아봤자 그것은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사실을 작금의 이스라엘-미국 사례가 잘 알려준다. 잘 못 자란 권리의 성격때문이 아니라, 권리개념이 함축하는 원래의 속성이 그러한 것이므로, 이제는 배타적 상호성에 바탕하는 '권리찾기운동'을 지양하고 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보편적 권리를 어떻게 만들고 지켜낼 것인지를 함께 건설적으로 고민해 보자는 것이 아래에 옮기는 글의 취지로 보인다. [참고로 아래의 글은 진보신당 당원들을 상대로 쓰여진 것인 듯한데, 나는 그 당과는 전혀 상관도 없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옳은 말씀이기에 퍼온다. 사족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이곳 '진보 블로그'에서는 사람들이 펌질보다는 풀질(설을 푸는 행위)을 더 좋아하는 듯한데, 나는 자꾸 이런 펌질만 하자니 좀 뭣하지만 그냥 이게 내 수준이려니 하고 간다. 이하 펌글이고 -진보신당 어쩌고 하는- 도입부는 생략한다, 좀 보편적인 글의 외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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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정당정치의 존재 이유…"권리찾기 운동을 넘어서야" (김상봉) // (...) 지금까지 정치적인 진보 운동이란 권리를 찾는 운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은 자본가에게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것이고, 진보적 여성운동은 남성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것이며,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비장애인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일일 것이다.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할 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는 타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약탈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왕조시대와 식민지시대 그리고 독재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오는 동안 그나마 이 정도의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그것을 되찾으려 하는 운동이 진보적 정치운동이라면 그것은 당파적인 계급투쟁을 벗어나기 어렵다. 참된 진보 운동은 권리 찾기 운동이 모두를 위한 것일 때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노동자의 권리 찾기가 단순히 좁은 의미의 노동자계급의 이익 추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이 될 때 보편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다. 이런 이치는 여성해방운동이나 장애인 인권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참된 진보적 정치 운동이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권리 찾기를 뜻하는 바, 이런 문맥에서 보자면 진보적 정치 운동이 추구해 온 정의란 어떤 사람도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권리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이며, 평등이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기준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진보 운동이 모든 사람을 위한 운동이라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대중성을 담보하는 근거이며 진보 운동의 현실적 힘도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빼앗긴 권리를 찾고, 확보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 진보적 정치 운동의 궁극 목표가 되어버린다면, 내가 생각건대 더 이상 진보 운동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수하게 권리만이 문제라면 나의 권리와 모든 사람들의 권리는 원칙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리는 자기의 대상에 대한 권리이다. 권리의 충돌과 불균형이 생기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 대상에 대한 권리의 양이 다르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누구도 자기의 권리를 홀로 지킬 수도 없고 빼앗긴 권리를 홀로 되찾을 수도 없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권리를 되찾고 지키려는 운동은 반드시 집단적 연대와 결속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빼앗긴 민족의 권리가 문제라면 민족이 하나로 결속할 것이며,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가 문제라면 노동자 계급이 단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권리를 찾고 지키려는 욕구 자체는 자기의 권리를 확장하려 할 뿐 그것을 스스로 제한하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 무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기의 권리를 확장하려는 의지는 자연스럽게 자기와 같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대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리스의 자유 시민들이 노예를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한 것이나,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면서 자기들만의 시민적 공화국을 추구한 것,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에 눈감으면서 자기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한편과 연대하면서 다른 편을 배제하는 일이 모두 권리개념의 본질로부터 같이 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운동이 일종의 자기모순에 봉착한 근본적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명목상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의 균형을 지향하지만 권리 개념 그 자체는 권리의 보편적인 향유라는 진보적 이상을 자체 내에 포함하지 않는 까닭에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당파적인 담합과 배제로 퇴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정말로 새로운 진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려면 바로 이 권리의 개념을 넘어서야만 한다. 권리의 개념은 대상에 대한 욕망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 욕망이 결국 나와 너 사이의 대립을 낳고, 이 대립이 보편적 인간해방과 만남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상에 대한 권리의 극대화가 아니라 너와의 참된 만남에 대한 욕구가 진보적 상상력을 추동하고 진보적 운동을 이끌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투쟁 자체를 원해서도 아니고 그것을 통해 대상에 대한 권리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도 아니며, 오직 불평등하고 왜곡된 만남을 지양하고 너와 나 사이의 참된 만남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권리의 균형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참된 만남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참된 정치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것이다. 참된 만남에 대한 지향이 다른 모든 정치적 이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이념도 불화의 씨앗이 될 뿐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진보의 이름으로 안팎으로 싸우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일상화된 불화 속에서 진보적 이념의 현실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일상화된 불화는 우리를 하나 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싸움이 만남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을 때, 진보적 정치운동은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그 만남 속에서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레디앙 2009년 01월 12일 (월) 08:50:27 김상봉 / 미래상상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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