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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25
    단월드의 국학뉴스에 등장하는 안호상 박사는?
    Ratpoison

단월드의 국학뉴스에 등장하는 안호상 박사는?

출처 : http://blog.daum.net/wakana/1554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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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아래의 국학뉴스를 참조하십시오)

 

"그때 한 젊은이가 분연히 일어섰다. 1980년부터 국학운동을 펴온 이승헌 박사(현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총장)였다. 그는 민족정신과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1987년 이 총장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박사를 대회장으로 하고 집행위원장을 맡아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를 창립하고 ‘국조 단군 숭봉 국민대회’를 개최해 단군이 국조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로부터 우리 민족의 중심가치와 철학을 회복하려는 국학운동이 전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

 

그러면 안호상은 과연 누구일까요. 주요 자료를 퍼옵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은 국민들에게 무력투쟁·경제전쟁·정치전쟁뿐 아니라 사상전쟁을 치르게 해 이승만의 영도 아래 국가를 재편해야 한다는 이른바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 

 

 

재야 태두 중 하나인 안호상, 그는 누구인가?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김철 연세대 교수의 한마디로 족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공식 파시스트. (김철, 국문학을 넘어서, 국학자료원, 2000)

이준님은 언젠가 안호상이 히틀러의 저작을 국내에 소개했다고도 했는데, 그 점은 잘 모르겠다. 다만 안호상은 독일을 대단히 존경해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독일은 독일의 위대한 철학가 피히테의 정신 밑에 독일의 모든 학생들이 단결하며 움직여서 분열되고 파멸된 독일의 민족정신을 완전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특히 독일의 대학생의 철저한 민족정신으로 말미암아 죽어가던 독일의 민족과 국가와 문화는 다시 살아나서 찬란한 결과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평화일보 1948년 09월 29일)

그 찬란한 결과라는 것이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것을 머리에 담아두고서 한 말일까?

그는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철학체계를 만들어서 이승만 독재에 철학적 기초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주체사상이나 다를 바 없는 일민주의를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해서 이름만 한백성주의라고 고쳐서 써먹었다. 물론 그때는

- 강력한 민족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여야 하며, 아울러 영명하신 이 대통령 각하를 받들어 지대한 민족 과업을 성취하는 대도로 매진할 것
- 우리는 일민주의를 위하여 일하며 싸우며 또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안호상, 일민주의의 본바탕, 1947)

같은 이야기는 다 빼버렸다. 위 책에는 철기 이범석의 서문이 붙어있었는데, 그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믿기를, 일민주의는 영명하신 우리의 지도자 이승만 박사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일생을 통해 빛나고 지공 지성한 혁명 투쟁과 독립운동의 경험을 집대성하신 것인데, 단군의 홍익인간의 정신과 또 신라 화랑도의 중의 경사重意輕死의 정신을 기본으로 하신 이상적 보민 구국의 이론 체계인 것이다. 이 이론적 체계를 다시 부연 설명하기 위하여 이번 『일민주의의 본바탕』이 간행된다는 것은 시기에 적합한 일이며 대통령 각하의 사상과 글과 말씀을 듣고 보고 또 생각한 문교부장관, 일민주의 보급회 부회장인 안호상 박사가 그의 철학적 모든 온축蘊蓄을 경주하여 편저한 만큼, 이 책의 내용이야말로 일민주의를 금과옥조로 해설한 귀중한 한 개의 경전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바로 유명한 이승만의 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에서 파생된 철학이 바로 안호상의 일민주의였다.

뭉쳐지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 진리가, 여기서 또 한번 타당하다. 이것은 누구보다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안호상, 김종욱 국민윤리학, 1975)

그는 애초 국대안을 찬성하였고 초대 문교부장관으로 재임하면서 학도호국단을 창설하여 학원을 병영화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학도호국단 이외의 학원단체는 모두 불법으로 만들어 해산케 했으며, 좌익 혐의가 있다 하여 수만 명의 교원을 교직에서 숙청했다. 사감에 의한 무고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답할만큼 엉성한 조사였다.

그는 1906년생으로 1920년에는 일본 동경에 유학, 1922년에는 중국 북경과 상해에 유학했으며, 1925년에는 독일 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 귀국하였는데, 그때 귀국 소감을 묻자 이런 답변을 남겼다.

"8년만에 대하는 고국은 모든 것이 놀랄만큼 변천되었습니다. 겉으로 대하는 고국산천의 변천은 놀랄만 하지만 안으로 대하는 고국은 그 어디인지 폐허인듯합니다. 앞으로 할 일은 아직 작정을 하지 못하였으며 수일 후에는 고향 의령으로 떠나려 합니다." (중외일보, 1930.8.21)

그는 상해에 있을 때, 이승만과 신채호의 대립을 목격했다 하며 신채호 쪽 입장을 지지했었다고 한다. 그의 귀국 인터뷰에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가 엿보인다. 그러나 그후 독립운동을 했다든가 하는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친일 행위를 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특기할만한 사항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가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독립운동 사건은 아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학자들이 옥고를 겪고 목숨을 잃는 불행한 사태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사건 자체는 일제가 조작했던 것에 불과하다. 아무튼 안호상은 이 사건으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고 하고, 구속을 피해 달아나 금강산에 숨어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안호상의 부인이 친일파로 이름 드높은 모윤숙이라는 사실이다. 안호상은 1934년 7월 20일 춘원 이광수의 중매로 모윤숙과 두번째 결혼을 했다. 이광수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변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 무렵에 춘원과 교분이 있었다는 것이 흠은 아니겠다. 하지만 모윤숙과의 관계는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안호상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모윤숙이 집안에서 얌전히 있지 않고 나돌아다니는 것을 못마땅하여 곧 별거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안경선安炅仙(1936년 출생)이 있으니 상당기간 같이 산 것은 확실치 않은가? 더구나 두 사람의 이혼은 1960년대에 이루어졌다. (송영순, 모윤숙 시 연구, 국학자료원, 1997) 모윤숙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승만 정권 시절 안호상과 마찬가지로 정권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1950년에 안호상은 대한청년단 단장이었고, 모윤숙은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역임했다. 물론 아내가 한 일, 남편이 어쩌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모윤숙은 1941년부터 적극적인 친일에 나선만큼 이 시기에 이미 안호상과는 별거, 실질적인 이혼 상태였다고 하면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친일파라면 이를 가는 것처럼 보이는 안호상이 사실은 자신의 전처가 친일파인데도,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이승만 정권의 요직에 참여하는 것을 방관한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또한 안호상을 떠받드는 이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해방 정국에서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는 안호상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바로 일민주의,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 철학에 의해 일민주의의 위대한 영도자 이승만 밑에 뭉치는 사람은 다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일단 그 밑에 선 이상, 그들을 분리, 분열시키려는 자는 일민주의에 위배되는 인간으로 취급받아야 했다. 친일파 청산을 방해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사람, 그가 바로 안호상이다. (그는 1951년 자유당 창당대회에서 "자유당 만세 삼창"을 선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문) 이번 실시된 교육계의 교원숙청 문제는 이것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것인가?
(답) 물론 전국적으로 숙청하는 것이다.
(문) 그 숙청문제의 중점은 어디다 두는가?
(답) 사상에 중점을 둔다. 교원으로서 좌익적 사상을 가진 자는 전면적으로 숙청할 것이다.
(문) 그러면 좌익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밝히게 되는가?
(답) 그것은 교장과 학생 또는 일반의 여론과 경찰의 신원조사로써 밝힌다.
(문) 동료간의 불친목인 자도 숙청 대상이 되는 모양인데 그 한계는?
(답) 역시 동료간의 불친목은 결국 학교 내에서 학교당국에 협의 않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좌익사상은 아니되 학교와 학생간의 중간적 입장으로 학원을 파괴하는 자는 그러한 사람들이다.
(문) 그렇게 되면 혹 교장과 교원간의 사감으로도 숙청대상이 될 수 있지 않는가?
(답) 그런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내신서에 대해서는 접수는 접수대로 하여 놓고 문교부에서는 문교부대로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 그리고 이번 숙청은 제1차로 보겠으며 앞으로 계속 숙청을 할 것이나 제2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1949년 03월 12일)


위 굵은 글씨에 나오는 것처럼 결국 자기 말 안 따르는 사람은 다 목을 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친일파 교원 숙청 같은 말은 안호상 입에서는 나온 바가 없다. 좌파 척결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나오지만... 안호상은 5만1천명의 교원을 조사한 뒤 5천명을 숙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숙청 수는 확인하지 못했음. 국민학교 교원 중에서만 1,641명이 숙청되었다는 동아일보 1949.3.17일자 보도가 있음)

안호상의 일민주의란 주체사상과 별다를 것이 없다. 국가를 가정으로 생각하고 핏줄을 가장 중요하게 보는 점에서도 그렇다.

- 부모 형제가 가족이라면, 한 핏줄의 한백성 동포는 민족이며, 또 가정이 가족의 집이라면, 나라는 민족의 집이다.
-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민족의 여러가지 구성요소들 가운데, 그 핏줄이 그 결정적 요소라는 것이다. 한 민족은 같은 한 조상의 한 핏줄을 받은 사람이라야만 한다. ... 다른 조상의 핏줄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같은 한 민족이 될 수 없다. (안호상, 나라역사 6천년, 한뿌리, 1987)


그는 위의 예로 이스라엘을 들고 있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그 핏줄을 지켰던가? 다른 조상의 피가 그들 속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저렇게 핏줄을 강조한 나라가 하나 있었다. 나찌 독일. 그들은 유태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유태인으로 분류해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그중 상당수가 아우슈비츠 등의 가스실에서 처형당한 것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핏줄, 핏줄 하면서 나찌즘에서나 할 이야기를 늘어놓는 안호상. 그런 그에게 첫 문교부 장관을 맡긴 이승만. 모두 아찔하기만 하다. (처음에 나왔던 독일 찬양 문구를 다시 떠올려보라.)

1950년 4월 22일 학도호국단 1주년 기념식에서 안호상은 이런 연설을 했다. 학도호국단의 총재는 대통령, 부총재는 국무총리, 중앙학도호국단장은 문교부장관 즉 안호상 자신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운영 과정도 군대와 동일했다.

"외적의 압박과 침략에 시달려 병든 이 조국은 제군들을 부른다. 총칼로 육체를 무장하고 민족사상으로 정신무장을 하여 옛 우리 선조가 임전무퇴의 화랑정신으로 삼국통일을 한 것과 같이 일민주의로 失地 회복과 남북통일을 맹세코 이룩하자." (자유신문)

일민주의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학도호국단. 그들의 선서 내용을 보자.

1. 우리 호국학도는 화랑도의 기백과 3·1정신의 계승발휘로 불타는 조국애·민족애로써 공산주의와 이북괴뢰집단을 타도, 조국통일성업에 몸과 마음과 피를 바친다.
1. 우리 호국학도는 일민주의 지도원리 밑에 학원의 자유민족문화의 향상을 위하여 전진한다.
1. 우리 호국학도는 국가의 기반을 좀먹는 일체의 부패분자를 소탕하고 이 민족의 도의와 양심을 바로잡기 위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한다.


그런데 학도호국단을 만든 실제 목적은 위의 선언과는 달리 학원내 질서 정착이었다. 말이 좋아 질서정착이고 사실은 좌익 척결 및 이승만의 꼭두각시 양성이 그 목표였다.

(문) 학도호국대 결성으로 학도들의 수업시간이 단축될 염려는 없는가?
(답) 호국대의 훈련은 전쟁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학도의 조직을 가지려는 것이 제1목표이므로 훈련 때문에 교수시간에까지 영향이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9년 03월 11일)


안호상은 자기 책 [나라역사 6천년]에서는

"조각조각 갈라졌던 청년단들이 서로 앞장서서 다 해산하고, 4281(1948)년 12월 19일에는 오직 하나의 '데한청년단'으로 뭉쳤다. 그리고 4282년 4월 23일에는 전국 학생 대표 만여명이 서울 운종장에 모여서, 옛날의 화랑단을 본떠 '백만학도호국단'을 만들어 한백성의 학생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십만팔천리는 떨어져 있으니, 다음 보도를 읽어보자.

安문교부장관은 30일 담화를 발표하여 학도호국단 이외의 일체의 학생단체는 내년 1월 말일 이내에 해체하고 해체보고를 중앙학도호국단 사무국에 제출해야 한다고 미해체 학생단체에 경고를 발했다.
“현하 학도호국단 이외의 여러가지 학생단체가 난립하고 있는 바, 이것은 대통령령 대한민국학도호국단 규정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본 단 운영에 있어서도 지대한 지장이 있는 것이므로 학도호국단 이외의 각 학생단체는 즉시 해체하는 동시에 해체완료보고서를 단기 4283년 1월 말일까지 중앙학도호국단 사무국에 제출하여 주기 바란다.
과거 이러한 학생단체에 관계하던 학도들은 학도호국단에 가일층 협력하는 바이며, 전기 기일 내로 해체하지 않는 단체 혹은 학도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치를 취할 것인즉, 이 점에 특히 유의하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 (국도신문 1949년 12월 31일)


자기 이름으로 내놓았던 담화가 머리속에서 깨끗이 증발했던 모양이다. 학도호국단 문제는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그 문제는 아래 기사처럼 심각했다.

(문) 학도들의 군사교련이 너무 심하다고 일반의 비난이 많은데 이를 시정할 의사는 없는가?
(답) 나는 신문을 보고 그러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날의 배속장교는 일제시와 같이 군부 소속이 아니고 문교부 직속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점으로 해서 학도교련에 대하여는 배속장교에 절대권한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남 광주사범에 배속되었던 장교는 좌익학생들에게 살해를 당하였으며 또 한 사람의 배속장교는 눈을 뽑힌 사실이 있음에 비추어 앞으로는 배속장교와 학도간의 구타하는 등의 난폭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속장교를 모아 놓고 주의를 환기하겠다. (서울신문 1949년 03월 11일)


이런 일 때문에 학원에 경찰이 상주하고 있었고,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은 그것을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문) 학원에 대한 경찰의 활동을 어떻게 보는가?
(답) 학원에 대하여 경찰이 간섭하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실은 학원에서 파괴분자를 소탕할 수 있는 자체 방위기관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폐단이 있는 것이다. (서울신문 1949년 03월 11일)


그가 학도호국단에 바라고 있던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이 있다. 다음 기사를 읽어보자.

나는 양심의 소유자인 백만 학도들에 바라는 바는 냉정한 이성과 용감한 기운으로써 우리의 신생정부를 비난하며 방해하는 자를 철저히 방지해서 우리 신생정부가 세계 각국의 승인을 받아 힘찬 발전을 보게 하도록 노력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렇게 하는 데서 대한의 백만 학도들은 조국의 역사에서 더욱 빛날 것이며 세계의 활무대에 자유롭게 진출할 것이다. (평화일보 1948년 09월 29일)

여기에 더해 그는 [족청] 창설에도 관여한다. 이때문에 히틀러 유겐트라는 비난까지 받게 되자 깡패 김두한과도 손을 잡기에 이른다.

그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도 나를 끌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그의 주먹이 믿음직했다. 어느 때나 혼란기에는 주먹이 유효한 통치 방법으로 쓰이는 것이다. 나는 좌익, 우익 모두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처지였으므로 나를 보호해 줄 든든한 그 무엇을 바라고 있었으며 김두한은 그런 의미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다. (안호상, 김종욱 국민윤리학, 1975)

보호를 원한 것이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철학자의 입에서 나온 저 한마디를 보면 아찔해지지 않을 수 없다. 혼란기에는 주먹이 유효한 통치 방법이라니!

이미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일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도 거부하고 있었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구미 사상은 파멸의 사상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안호상은

해방 후 비판없이 요란히 떠드는 민주주의 바람에, 우리 민족은 오늘날 이와 같이 불행하고, 우리 조국은 이와 같이 파괴되었다. (민주주의의 역사와 종류, 일민주의출판사, 1953)

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미군정에서 문교부장을 지낸 오천석은 이런 안호상의 교육방침에 대해 "일본식 교육에 대한 열정과 타성이 있을 뿐"이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안호상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할 때도 참여했었다. 그는 국민교육헌장 안에 [홍익인간]을 집어넣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결국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라는 구절로 만족하기로 타협했다고 한다. 홍익인간이라는 문구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것을 대체할만한 교육이념을 제시해야 했고,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국민교육헌장이었다. 안호상은 자신의 책에 국민교육헌장을 앞머리에 싣는 등 바로 이 이념의 전파자로 나서기도 했다. 사실 그가 일민주의에서 주장한 것이 바로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의 기초였으니 이들 세력 간의 궁합이야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출처 http://orumi.egloos.com/361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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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신광복과 한민족의 새로운 비전
국학운동을 펴 온지 27년 만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해 < 국학뉴스  2007년4월9일 >
 


국조단군이 ‘홍익인간 이화세계’ 라는 건국이념을 바탕으로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이후 우리 민족은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왔다. 조상들은 삶의 목적을 인간완성에 두고 수천 년간 홍익의 높은 정신을 생활화하고 깨달음의 선도문화를 이 땅에 꽃피웠다.

그런 문화와 전통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외세에 의해 왜곡되고 외래문물에 오염되기에 이르렀다. 외세가 물러간 뒤에도 우리는 우리 민족 본래의 중심가치와 철학을 되찾지 못했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단군성전 건립을 반대하는 일까지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우리 역사를 그 후손들이 부정했던 것이다.

그때 한 젊은이가 분연히 일어섰다. 1980년부터 국학운동을 펴온 이승헌 박사(현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총장)였다. 그는 민족정신과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1987년 이 총장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박사를 대회장으로 하고 집행위원장을 맡아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를 창립하고 ‘국조 단군 숭봉 국민대회’를 개최해 단군이 국조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로부터 우리 민족의 중심가치와 철학을 회복하려는 국학운동이 전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 국학운동은 1992년 개천절 축제로 다시 한 번 활짝 핀다. 전국 국학운동가들이 강화도에 모여 국조 단군의 건국이념을 이어받자는 잔치를 벌였다. 이 개천절 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참여하는 국민축제가 되었다.

1997년 8월 민족정신광복 기념대회도 국학운동에 큰 전기가 됐다. 그해 독립기념관에서 무려 4만 5천여 명이 모였다. 이후 ‘2001년 지구인 선언대회’, ‘2002년 개천절 경축 10만 세계지구인 축제’로 발전하여 많은 외국인이 함께 했다. 홍익인간 정신이 모든 나라와 인류를 이롭게 하는 지구인의 철학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총장은 1999년 통일기원 국조 단군상 건립을 제안, 순식간에 전국 초등학교 등 360곳에 단군상이 세워지게 됐다. 그 단군상은 단군이 우리 국조이고 홍익인간이 건국이념이며 세계 정신 지도국으로 우뚝 설 위대한 철학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2002년 충남 천안에 세워진 국학원은 학술과 문화NGO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역사의식을 깨우치는 국학원 국민강좌가 2002년 9월부터 매달 열리고 역사학자들의 깊이 있는 한민족 고대사 연구가 발표되는, 단군과 고조선 학술회의가 매년 열린다.

또 2001년 단군 숭모 음악회, 2003년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동상 제막, 2004년 뮤지컬 ‘하늘의 연인 웅녀’ 공연 등 예술을 통해 단군과 홍익정신은 되살아났다.  

2004년 본부를 개원한 국학원에는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중심철학과 “나와 민족과 인류를 살리겠다.”는 설립자 이승헌 총장의 국학운동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다. 지금까지 학교와 관공서, 군부대, 기업 등 100만 여 명이 이곳에서 실시하는 국학교육과 민족혼 교육, 효충도 캠프를 통해 새로운 한국인으로 거듭났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제 국학강사로 전국 각지에서 국학을 이끌며 한민족의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일찍이 백암 박은식 선생은 국토를 빼앗기면 되찾으면 되지만, 국혼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 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우리의 국혼이 있었기에 오늘 한민족의 얼굴인 고조선의 역사부활이 가능했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토대로 스스로 밝은 미래를 창조하며 인류의 정신지도국이 되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때다.




1987년 이승헌 박사는 고 안호상박사 등 민족원로들과 함께 민족정신광복운동본부를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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