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 경, 시이 가즈오 일본 공산당 위원장이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일본연구센터와 한겨레신문에서 마련한 특별강연 형식으로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아래 글은 이 강연(소식)을 접하면서 내 머릿속에 깃들고 스민 생각을, 고려대 <대학원신문>의 청탁으로 함 정리해본 것.

 

그런데도 왜 굳이 일케 포스팅하느냐. 당초 제시된 분량제한에 맞춰 썼건만, 그랬건만, 결국 아쉽게도 지면부족을 이유로 원문대로 실리진 못했던 터라서. 막상 실제로 실린 글을 보니 어디가 솎여나갔는지 잘 모를 만큼 솎이긴 했던데, 글쓴이로선 솎인 대목들이 아무래도 대수롭고 막 그랬던 거다, 하핫.

 

***

 

포스트평화주의 시대, 평화의 조건을 다시 묻는다

20세기 탈식민 동아시아의 문화지정학과 일본 공산당식 ‘일국사회주의’ 노선을 넘어서

 

 

시이 카즈오 일본 공산당 위원장이 지난 달 27일 학교에 왔다.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초청 형식으로 이뤄진 특별강연 차였다. 왜 ‘특별’인가. 주지하다시피, 그간 아베 신조 총리를 화신으로 삼아 일본에서 탄력받아온 ‘정상국가화 구상’ 탓에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긴장은 사뭇 첨예해지곤 했다. 특히 범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유달리 소란해지면서 말이다.

 

그런 만큼 이런 긴장의 완화에 동(남북)아시아 규모의 평화협력 틀이 불가결하고 새삼 중요해졌다는 판단을, 시이 위원장은 나 같은 한국산 국민 겸 시민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베 같은 이들과 같으면서도 분명 다른 일본산 국민 겸 시민 중 한 사람으로서. 강연주제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말하다’인 건 확실히 그래서였을 터.

 

그럼 주제만큼 내용도 깊이 와닿았느냐. 글쎄, 막상 그리 되진 않았다. 국제적 평화협력의 당위와 중요성이야 골백번 인정하고도 남는다 쳐도 그랬다. 대체 왜 그랬는지 가만히 되새겨봤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지 싶다. 하나는, 일본에서 패전후 평화헌법에 기초해 동아시아 규모로 제도화된 시장민주주의 통치틀이 구소련에서 중화대륙과 한반도 북부까지를 아우르던 역사적 사회주의 블록의 형성과 짝패를 이뤘단 사실을 간과하더란 점이다. 이 블록이 바스라지고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가치사슬로 ‘재’복속된 역사적 사건이나 과정은 지정학적으로 패전후 일본의 평화 담론과 민주주의 통치틀 또한 더는 유효할 수 없게 됐음을 뜻하지, 그 반대는 아녔다. 이를테면 아베 류의 정상국가화 구상은 이를 호기로 전후평화주의 통치하에서 마지못해 억압된 것들의 (극)보수적 귀환을 노린 ‘주권재건’의 정치에 가깝다.

 

그럼 되려 문제삼아야 할 건, 아베 류의 귀환이기보다 전후평화주의 통치하에서 마찬가지로 억압됐던 것들의 좌파적 귀환을 노리는 ‘광역화된 대항주체화’ 정치 구상의 빈곤 내지 부재 아닌가? 이런 마당에 진작에 시효만료된 패전후 일본의 평화(민주)주의 통치틀을 지키려고만 드는 게 능사며 또 바람직한지, 좋게 말해 수세적이라지만 사실상 현상유지의 알리바이 아닐까 싶어졌던 게다. 더구나 패전후 일본의 시장민주주의 통치틀은 그 특유의 내적 모순들과 함께 동아시아 권역 탈식민 주권국가들의 정치적 저발전을 구조화했던 측면마저 또렷하다. 이런 맥락에서 ‘헌법9조 수호’ 같은 길이 동아시아 규모에서 진작부터 잠재적으로 요청돼온 국제연대의 실천지평 확장과 ‘실제로’ 양립가능하며 호환까지 될지는, 적어도 내겐 매우 미심쩍어 보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주권적 국민국가 형식을 사실상 대항/대안주체화 정치가 수렴하는 중심 단위로 삼고 있다는 거다. 이런 입지의 역사적 실효성에 관한 자기비판적 성찰이 좀체 보이질 않더라고 할까? 20세기 중후반기 동아시아 권역에서의 탈식민-반공주의 문화지정학은 당장 일본부터 해서 주권국가 특유의 조직원리에 따라 조각난 ‘국민화된 기억의 서사’들로 크고작게 뒷받침돼왔다. 이렇게 재편성된 동아시아 자본주의 문화지정학에서 일본산 평화(민주)주의 담론이 일본 안팎의 대다수 사회정치적 소수자들에게 자기기만의 수사에 더 가까웠던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 주권적 국민국가라는 특정한 역사적 제도를 중심 단위로 삼아버릇하던 정치적 입지는, 자명한 전제로써 상호존중돼야 하긴커녕 철저한 합리적 회의로써 근본부터 ‘전화’돼야 하는 것 아닐까? 국민국가 조직이 지구적으로 상호연계된 통치 제도로서 광범한 대중정치적 개입·실천이 매개돼야 할 특정 단위임을 우습게 봐도 좋단 얘기가 아니다. 국민국가 조직의 실정성과 씨름하고 삼투하게 마련인 종류의 (아무래도 좌파)정치가 저마다 실효를 거둘래도, 각국별로 분획된 경계를 가로질러 동아시아 규모에서 다시 생겨나고 아마도 새로이 상상돼야 할 ‘지역적’ 실천 감각은 더더욱 불가결해지겠다는 거다.

 

더구나 ‘후쿠시마 이후’와 ‘세월호 이후’ 정세가 징후적으로 시사하듯 국민국가적 통치 형식의 정당성 위기는 일시적이거나 가령 대항/대안세력의 집권(만)으로 만회가능하기보다, 만성적이고 일상화된 양상으로 생활세계 곳곳에서 창궐할 공산이 농후하다. ‘단계적·합법적 의회주의 변혁의 한 길로’ 같은 일본 공산당의 입지는, 이리 보면 적어도 동아시아 권역 어디서든 전면 재검토되거나 크게 상대화돼야 할 테다. 냉정히 말해, 20세기 동아시아 반공 자본주의 문화지정학의 모순과 궁지를 실제로 넘어서는 데서 그런 입지는 언젠가부터 더는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그 문제의 일부가 된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 공산당 스스로 소련과 중국, 북조선식 사회주의하고 엄격히 선을 긋는다지만, 정작 이들 역사적 사회주의 경험으로부터 사회주의의 일국화-국민화가 정치적으로 뭘 함축하는지에 관해선 얼마나 철저히 되새겨왔을까 싶었다.

 

지금껏 던진 의문은 줄곧 일본 공산당을 겨냥했지만, 상당 부분 한국산 진보좌파 운동-정치 세력을 염두에 두고 자기비판적으로 이뤄진 것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구획된 지금 여기서 지역적 연대의 입지와 세력화 저변은 그간 얼마나 튼실해져왔냐고 하면, 갈 길은 더 험난해진 데다 종종 캄캄하기마저 하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나게 될 길이야 어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다종다기한 분투들의 종횡 속에 만들어지는 걸 테고 어차피 단박에 날 리도 없다면, 마루카와 테츠시가 『리저널리즘』에서 말한 ‘지역적 감각’은 어떻게 연마돼야 할지부터 먼저 곱씹어봄직하다. “아직 분명한 형태를 갖추지 않은 ‘동아시아’의 커다란 변동”과 씨름하며 “일국에 갇힌 정치사나 정치학적 패러다임을 넘어 지역적 유동성을 전제로 삼는 공간 감각이자, … 역사적으로 깊이 누적된 구조적 연관성을 찾아내는 역사 감각”으로서 말이다.

 

일본 공산당의 향후 입지와 행보가 어떻든 바로 지금 우리에게 아마 더 중요한 건 저런 공간-역사 감각을 각자 선 자리에서, 내 경우 사회(과)학 공부 속에서 함께 (되)살리고 섬세히 벼려내는 일이잖겠나 싶다. 문제는 이 ‘함께’가 기왕이면 어떻게 좀더 알차고도 들뜬 모양새를 갖춰갈 수 있겠느냐일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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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01:28 2014/12/05 01:28

 

 

기본적으로 맑스 할배가 (아마 이 할배 스스로도 선선히 인정하거나 그러지 않으면 아니 될 모종의 미진함이랄까 모호함, 역사적 제약에 따른 공백과는 별개로)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데다 마실 때마다 맛이 깊고 풍부한 물건임을 전제로, 저는 토를 좀 달게요.

 

한국 같은 데서 (1980년대 중반 이후 '때늦게' 유통된 소련/동구권산 '국정 맑스주의' 도덕교과서 류가 마치 좌파 사상의 종결자인 양 오인 내지 부풀려졌던 만큼이나) 이런 저런 경로로 소개돼온 '최신' 좌파-맑스주의 사상들이 마치 맑스 할배를 넘어선 양, 심한 경우 이 할배를 청산할 수 있다는 양 취급되는 경향이 있긴 하죠. 정치철학 쪽이라곤 않지만, 가령 칼 폴라니의 작업 같은 경우가 그렇고요. 실제론 당대 맥락에 맞게 맑스가 했던 여러 중요한 질문/명제들을 살리고자 이뤄진 작업였는데도 이게 엄하게 맑스를 '디스'하는 데 쓰이거나, 또는 이렇게 오남용된 폴라니를 근거 삼아 다시 맑스가 얼마나 옳고 또 대단한지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들거나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이런 식의 오남용이 눈에 거슬리고 허망해 보인다 해서 맑스 이후 좌파 사상 지형을 왜 굳이 '머리에 쥐 나감서' 알아야 하냔 쪽으로 결론짓는 건, 섣부른 맑스 넘어서기/청산 시도만큼이나 섣부르잖나 해요. 이런 결론은 달리 보면, 말로는 좌파네 역사적 유물론자입네 하지만 맑스(텍스트)를 전혀 역사유물론적이지 않게 경화시킬 때도 많아 보이고요. 아무리 맑스가 일당백였다 한들, 특히나 20세기 중후반기 정치경제를 맑스(나 레닌) 하나로 커버 가능하다는 주장을 접하면 솔직히 놀라워요 저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그럴 수 있단들 그게 바람직은 한 건지 모르겠어서요.

 

실제로 이들 좌파 정치철학은 대체로, 맑스 사상의 싹수들을 자르거나 시들게 만든 자유(민주)주의나 '경화된 맑스주의' 사조에 대항해 맑스 할배와의 결별은커녕 되려 이 할배의 문제설정을 1945~60년대 이후 국면/정세에 걸맞게 풍부화하고 사상적, 실천적 해방을 꾀하련 노력의 산물였죠.

 

이런 노력이 단지 그 노력만으로 하는 족족 칭찬받을 수야 없겠지만, 그렇기 때메라도 맑스가 다 했거나 하는 얘길 왜 일케 어렵게 하냐고 힐난해선 곤란하잖으까요? 더구나 맑스야 편협함과 도식성과는 거리가 먼 자유로운 영혼였다지만, 그의 적통을 잇는다며 되려 경화된 맑스주의가 소위 과학의 이름으로 맑스의 절친 내지 친구들을 사상적, 정치적으로 족치거나 예방했던 역사적 경험들은 그럼 어쩔 거냐. 이걸 '진정으로 맑스를 알았다면 그럴 리 없는' 해프닝쯤으로만 치부해도 좋으냐.. 그럴 순 없어 보인단 말이져.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맑스 할배도 그리 쉽게 읽히고 이해하기 만만한 물건 아니자나요. 하지만 그 할배가 남긴 읽을거리들에 대해, 일테면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먹물 출신의 난해한 얘기니 멀리 해도 괜찮다거나 심지어 행동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진 않죠.

 

맑스 할배의 이야기 자체가 내적으로 풍부한 좌파적 실천과 지성에 정말 그렇게 영감을 주는 거면, 지금 필요한 게 그럼 그런 맑스를 누차, 새삼 확인하는 거냐. 별로 그렇잖은 거 같어요 제가 볼 땐. 훈고학 삘만 풍기기도 쉬워 보이고요. 그보다는, 그렇게 잠재력 충만한 맑스가 그간 왜 친구 같은 또다른 맑스들로 자유롭게 '분열증식'하지 못해왔는지, '속류화 사전예방' 때문였다곤 하지만 그 와중에 실제로 사전예방됐던 건 뭐였는지 새삼 되묻는 일 아니냔 거죠.

 

물론, 이런 분열증식 과정에서 쭉정이들이 왜 안 생기겠어요. 그건 그것대로 솎아내야겠죠(거꾸로, 맑스한테조차 본의였든 아니든 간에 이런 구석들이 없달 순 없겠고요). 다만 전 그런 정도 모험은 감수하고서라도, 심지어 저게 무슨 맑스냔 얘기까지 설사 나오더라도 분열증식을 부추기는 게 필요하잖겠냐.. 더군다나 이게 '맑스를 제대로 알아 가는 일', 철수동 표현대로면 맑스가 얼마나 자유로운 인간였는질 알아가는 일하고 따로 노는 걸 리도 없어 보이고요. 맑스를 제대로 아는 일과 맑스의 사상적, 실천적 분열증식 이 둘은 나란히 갈 수밖에 없고 맑스를 제대로 안다는 건 바로 그런 과정이겠달까..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되는 낯설음 내지 '난독'에 대해 곧잘 가해지는 비난이, 가령 맑스가 <자본>을 쓴 데 대해 그 당시 사회주의자들한테서 들었다는 욕하고 다르긴 다른지, 다르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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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1 13:39 2012/08/31 1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