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장문석 지음 | 148쪽 | 8,500원 | 책세상, 2011.

 

 

 

아아, 민족주의!

이렇게 써놓으니 어떤 느낌이 드시는가들? 써놓고 보면야 똑같아 보여도, 그 함의와 문맥은 정치적 입지에 따라 다르다 못해 사뭇 판이할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양 눙친 것 같지만, 사실 확실히 그렇다. 퉁쳐 말해 환호와 환멸의 감각으로 갈린다고 할까. 아니, 스냅사진 아닌 동영상 모드로 바꿔 빗대자면 ‘민족주의’란 쇠막대가 ‘시민사회’라는 근대적 시계장치의 일부로서 장엄한 환호와 싸늘한 환멸의 종 사이를 ‘때와 장소에 따라’ 진동하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던져봄직한 질문은 아무래도 이런 걸 테다. 그래서 과연 이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 이 종소리가 복음으로든 소음으로든 한동안 계속 우리의 귓전을 두드릴 수밖에 없더라도, 그건 끽해야 미심쩍은 돛이거나 매혹의 덫이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무턱댄 것일 리는 없겠다. 가령 ‘민족주권’을 보위하겠노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키워온 핵억지 능력을 보자. 공화국의 ‘자주독립’을 떠받쳐준다는 이 능력은, 막상 인민대중의 삶을 (뭣보다 인민들 스스로) 떠받치는 덴 사실상 더할 나위 없이 무능력하다. 소위 독도문제에 대해 ‘주둔군 배치’를 답으로 내놓는 발상법(내지 실천감각)이 한나라당에서야 일단 먹힐 수 있다 치고, 자타칭 진보계 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에서마저 버젓이 그 위용을 자랑했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과연 족보상 한민족의 자랑스런 후예라 그런지는 몰라도 조국수호의 염원만 놓고 보면, 한나라당 대표 홍준표나 전 민주노동당 청년위원장 이주희나, 남북통일보다 어려울 줄만 알았던 국론통일, 참 쉽고도 통 크게 성취해주실 판이다. 통 크기로 치면 이에 결코 꿀릴 게 없어 뵈는 정치적 헤쳐모여 움직임은 그럼 어떨까? 근까, 진보좌파계 정당과 개혁적 자유주의계 정당들 간에 한창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진 ‘진보대통합 구상’ 말이다. 이 구상을 지지하는 이들이 저마다 취하고 있는, 때론 첨예하기까지 한 정치적 입지차가 무색해질 만큼 대통합 움직임이 일정한 탄력을 받는 이유는 뭘까? 물론 죄다 이 때문이라곤 못 해도, 가령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식 입지를 정당화·영속화하려는 “민족적 상상계”가 이 움직임 속에서 암묵적이면서도 압도적인 규정력을 발휘해왔던 탓은 아닐까? 요컨대 근대 시민사회(혹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독특하고도 지배적인 생활양식 안에서 민족주의는, 우리가 저마다 보수주의자/자유주의자/사회주의자이기에 앞서 “사람의 인식과 행동을 근저에서 규정하는 모종의 사회적 상상계”였던 셈이다. 민족주의는 정치적 강령이나 노선이 될 수 없다고 프란츠 파농이 지적했다시피, 민족주의를 시민사회 특유의 개인화 압력을 적당히 상쇄시켜줄 뿐인 생활양식의 일부로 새삼 ‘재발견’할 때가 됐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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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지금껏 한 얘기가 ‘의미 있는’ 차이들을 죽밥으로 만들어버리는, 약간 과장하자면 겁나게 혼란스러운 설명이었을 게다. 글쎄, 실제로 혼란스럽거나 죽밥이 되고 있는 건 내 설명이 아니라 이렇게 설명돼야 하는 달라진 현실 아닐까? 그래서 내 생각에는, 얼핏 ‘일탈’과 ‘배신’으로도 비칠 법한 최근의 정치적 헤쳐모여 움직임은 모종의 ‘징후’로 읽는 쪽이 훨씬 더 유용하지 싶다. “민족적 상상계” 속에서 그간 펼쳐져온 여러 좌·우파적 실천들의 유효기간이 이젠 다 됐다는 징후로 말이다. 이래야, 지금의 국면을 그저 질곡만이 아닌 다르고도 새로운 가능성의 조건으로 다시 볼 여지 또한 더 크게 생기잖을까. 이미 일정하게 진행돼왔다고도 할 민족적 상상계에서 “세계적 상상계”로의 이행을, 우리가 좀더 단호하고 적극적으로 재촉해야 하는 때에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장문석의 <민족주의>(책세상, 2011)는 이렇듯 “민족주의가 언제부터, 어떻게 사람들의 상상계를 지배하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와 씨름하는 데 빠뜨려선 안 될 중요하고도 새로운 논의들을 짤막하면서도 알차게 소개·종합하고 있다. 책쓴이가 이 책에서 거듭,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고픈 말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다. ‘화폐’와 한 세트를 이루며 시민사회(=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문화적 버팀목으로 자리잡아온 민족주의와, 이 시민사회 안팎에서 수많은 ‘사회정치적 소수자’로 실재하는 ‘민족’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구별돼야 한다는 것. “민족을 거론하는 것이 곧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민족의 객관적 현실까지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던 그간의 지적·실천적 혼동으로부터 이제는 빠져나오자는 게다(마찬가지 맥락에서 이 쪽 동네에선 최근 ‘민족적 소수성’이 아예 없었거나 사라져버린 민족주의를 국민주의로, 이 국민주의와 불화, 적대하는 소수성 내지 계급성을 띈 민족들을 ‘소수민족’으로 구별해 부르자고도 한다더라). 이는 우리가 ‘민족주의 없는 민족’(들)의 정치를, 이 정치가 새롭게 이뤄질 해방의 시공간을 어떻게 상상 내지 구상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 이 물음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자면 사실 민족과 민족주의의 역사와 현실, 관련 이론화 작업에 관한 ‘개념 탑재’가 불가피한데, 이 책은 이에 관한 인식의 지도를 일목요연하게 그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쏠쏠하다(혹여 이 책이 너무 압축적이라 되려 빡빡하게 다가오는 이들이라면, 이 책보다 앞서 나왔지만 구성상 이 책의 확장증보판 격인 <민족주의 길들이기>를 읽어봐도 좋겠다).

이 점에 비추어, “민족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일은 필요하고, 또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민족주의의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민족주의로부터 쉽게 탈피할 수 있다고 가정하거나 민족 국가가 역사적으로 이룩한 현실적 성취마저 부정하는 일은 금물”이라는 책쓴이의 지적을 ‘대한민국을 긍정하자는’ 주대환 식의 어설픈 절충으로 도매급할 순 없다. 오히려 여기엔 민족주의적 탈식민화 (혁명)전략의 일정한 미덕과 뚜렷한 해악을 동시에 드러낸 20세기 아프리카·(동)아시아 권역의 역사적 경험을 염두에 둬야 했던 점이 가로 놓여 있을 것이다. 이리 본다면, 책쓴이는 ‘민족 없는 민족주의’라는 자본주의 거대기계에 포획돼버린 ‘민족해방’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보다 더 섬세한 개입을 요청하고 있는 게 아닐까? 기존의 개혁·좌파 정치가 민족적 상상계에 갇혀 정세적 실효성을 다한 것으로 보이는 오늘날, ‘민족주의 없는 민족’(들)의 정치에 불가결한 실천의 장(내지 경로)들이 보다 더 광범하고 일상적으로 생성·확장될 수 있도록 말이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한국 ‘시민’이 되지 못하고 결국 탈남해 영국으로 떠난 탈북자들에 관한 기사가 났던데, 가령 이들이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족주의’가 지닌 해악을 마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과 더불어 어떻게 사회정치적 소수자로서 ‘민족주의 없는 민족’(들)의 정치에 나설 수 있겠냐는 질문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셈이다.

민족적 상상계의 압박이 그 어느 장에서보다 강하게 작동하는 선거나 집권 위주의 대의정치 형식이 이같은 정치의 지평을 곧바로 열어줄 리는 없을 게다. 지금은 더구나 ‘복지국가의 요람’ 노르웨이산 애국모범시민 브레이빅이 (비)극적으로 보여준 바,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족주의 혹은 국민(통합)정치 형식이 세계화의 ‘성공’에서 비롯된 보수적이다 못해 퇴행적인 공동체주의로 수렴돼버릴 공산이 한층 더 커지고 있는 시절이기도 하다. 민족적 상상계를 최대한 주변화시킬 주체 형성의 정치가 앞으로 더더욱 절실하고 또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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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번엔 정영혜 선생이 쓴 <다미가요 제창>(후지이 다케시 옮김, 삼인, 2011)을 통해, ‘민족주의 없는 민족’의 정치에 요청되는 사회적 상상계란 어떤 것이며, 나아가 이 질문이 어째서 좌파적 주체 형성에 필요한 일반화된 정치와 맞닿을 수밖에 없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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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oPool 2011/08/18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폐’와 한 세트를 이루며 시민사회(=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문화적 버팀목으로 자리잡아온 민족주의와, 이 시민사회 안팎에서 수많은 ‘사회정치적 소수자’로 실재하는 ‘민족’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구별돼야 한다는 것. “민족을 거론하는 것이 곧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민족의 객관적 현실까지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던 그간의 지적·실천적 혼동으로부터 이제는 빠져나오자는 게다(마찬가지 맥락에서 이 쪽 동네에선 최근 ‘민족적 소수성’이 아예 없었거나 사라져버린 민족주의를 국민주의로, 이 국민주의와 불화, 적대하는 소수성 내지 계급성을 띈 민족들을 ‘소수민족’으로 구별해 부르자고도 한다더라). 이는 우리가 ‘민족주의 없는 민족’(들)의 정치를, 이 정치가 새롭게 이뤄질 해방의 시공간을 어떻게 상상 내지 구상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 !!!!!!!!!!!!!!!!!!!

    한번 뵈면 좋겠다고 해 놓구선 연락을 계속 못드리고 있네요. 저번에 추천해주신 <법정에 선 과학> 역시 일독하지 못했는데ㅠ 아무튼 정말 잘 읽었습니다^^

    • 들사람 2011/08/19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기로 치면 저도 마찬가진데요 뭘.ㅋ

      인용해주신 구절은 제 생각에, 사실 도래할 정치의 판을 어떻게 짜나갈 거냔 물음 이상으로, 특히나 19세기 말~20세기 초중반 시기 이후 동아시아 권역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혹은 이 사건들로부터 형성, 제도화된 축적체제의 단속적인 재구조화 과정)을 어떻게 다시 보고 또 다시 쓸거냔 물음하고도 직결돼 있지 싶슴다. 다시 말해, 1945년 이전의 동아시아 권역에 특유했던 식민주의 축적체제-통치술의 발전을, 이상화, 특권화된 근대성 이데올로기하고 견줘대며 무언가 일그러지고 결핍된 것으로 간주하려는 관점 내지 서술방식과 부단히 대결해야잖겠냐고 할까요.

      (식민지 경험 탓에 '제대로 된 근대화' 경로에서 당치않게게 소외당했다는, 꽤나 이상한 이유로) 소위 비판적인 각을 취하든 (근대화는 자본주의 문명의 시민권 획득의 자유와 자격이 주어질 수 있단 점에서 어찌됐든 축뽁이란 이유로) 안 취하든 간에 말예요.

      뭐 암튼 잘 읽으셨다니 감사.^^

    • ou_topia 2011/08/19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민족주의"가 두들겨 맞을 때마다, 세련되지 못했느니 극우우우 하느니 등의 이유로, 이건 뭔가 아닌데 그랬는데 바로 NeoPool님이 인용한 대목에서 "야, 뭔가 실마리가 잡힌다"라는 생각했습니다. 들사람님, 개념탑재 기대합니다.

    • NeoPool 2011/08/20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들사람/ 너무나 반가운 말씀입니다. 저는 독일의 '특수한 길 테제' 와 관련된 논쟁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들사람님께서 이를 훨씬 더 구체화 하셔서 이미 정제된 언어로 문제의식화 해서 제시해 주시니 저로써는 그저 반가울 밖에요! ^^

      ou_topia / 세련되지 못했다느니, 극우우우 하는 소리는 대개 헛소리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개념탑재' 기대하신다 함은 관련해 글을 더 써주시면 좋겠다는 이야기 이겠지요? ㅎㅎ 보통 '개념탑재' 하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가 대부분인지라;

    • 들사람 2011/08/20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오푸울/ 네,, 유럽권역의 제국주의적 팽창 속에서 만들어진 민족들의 사명과 현주소를 글로벌스탠다드화된 발전(내지 문명화) 경로를 따랐는지 여하로 평가하려 드는 제도권/비제도권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야 자기네가 여전히 비판적이라고, 다시 말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자부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네들이 자명한 걸로 여기는 인식론적 전제들에 입각한 문제틀이라든가 역사서술들이 '비판의 무기'이길 그친 진 이미, 한참 오래 됐다 싶어요.

      그리고 안 비판적인 경우라고 할 땐 아무래도 이영훈 설대 교수를 염두에 둔 건데, 제가 판단하기론 이영훈 선생은 '특수한 민족 주체에서 보편적 세계시민 주체으로의 진화'를 촉구하는 식으로 방점만 이동시켰다 뿐이지, 유럽적 보편주의 매뉴얼에 따라 주조된 역사발전=근대화와 진보 도식을 인식론적으로 특권화하기로는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사실상 동일한 처지잖나 싶거든요. 중요한 건 이영훈 선생 류와 이른바 비판적,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사학자들 간의 싸움 아닌 싸움이 제 눈엔, 그리고 앞으로 마주해야 할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선 퉁쳐 말해 별 재미도 감동도, 영양가도 없고, 무엇보다 꽤 하찮아 보이겠다는 건데..ㅎ 문제는 이런 식으로 교통정리가 되면서 정말 필요한 논의/공론화의 가닥이 잡히고 있기보단, 외려 더 꼬여 왔달까요. 무척이나 답답하죠. 솔직히 이런 흐름을 조장하는 건 세계부르주아지가 되고픈 한국산 시민들의 욕망을 지적으로 정당화, 정교화해 온 셈인 이영훈 선생이 아니라고 보거든요. 외려 그건 자타칭 비판적 민족주의 사학자들, 그리고 이들과 크고 작게 거리를 두면서도 많은 부분 겹치는 자생적 (통일)민족주의자 내지 대한민국주의자들이 아닌가..;

      해서, 제 생각엔 그 동안 소위 보편성과 특수성 운운하던 구도를 다음 질문을 통해 근본적으로 재편성해가야잖나 해요. 유럽적(=자본주의적) 보편주의 헤게모니 아래서 보편적이라고 간주-정의-분류되는 국지성과 특수하다고 간주=정의-분류되는 국지성들은 어떤 내재적(정치경제적, 지정학적, 일상문화적) 관계 속에서 상이하다 못해 일견 판이한 맥락들을 머금고 또 서로 되먹임해 왔을까?

      이런 물음이 널리 공유돼 가야, 근대자본제 특유의 지랄맞은 울렁증과 오지랖에 치이고 밟히기 십상인 우리가 적어도 앞으로 어떤 맘가짐, 몸가짐으로 다르게 더불어 살아야 하냔 물음에 더 적합한, 그런 갱신된 '비판의 무기'들이 웬만하면 사방팔방에서 쑴뿡쑴뿡 만들어지잖겠나... 싶더라구요.ㅋ

      뭐, 조만간 함 만나서 또 따로 얘기해보자구요..ㅋㅋ


      아우_토피아/ 네,, 개념탑재,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죠. 얼마나 잘 될진 저도 장담하기 어렵고, 제가 딱히 그 작업의 중심에 있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만..ㅎ

    • ou_topia 2011/08/20 1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NeoPool/예. 그럿내요.또 들사림님께서 운도 띄우셨고. 개념탑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는 어쩌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깔려 있겠지요. 피라미드식의 개념탑재. 역으로, 밑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간, 피라미드를 꺼꾸러 세워놓은 "개념탑재"를 들사람님은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시는 이야기인데 늘어 놓았네요.
      요즘 고민거리는 "경로의존성"과 헤겔이 말하는 개념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인데 아는 것이 짧아서 그림이 잘 안그려지네요.

    • ou_topia 2011/08/20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피라미드를 뒤집어 놓았다는 표현도 좀 문제가 있네요. 같은 범주 안에 있어서... 나아가야할 지도를 그린다면 "이런 물음이 널리 공유돼 가야, 근대자본제 특유의 지랄맞은 울렁증과 오지랖에 치이고 밟히기 십상인 우리가 적어도 앞으로 어떤 맘가짐, 몸가짐으로 다르게 더불어 살아야 하냔 물음에 더 적합한, 그런 갱신된 '비판의 무기'들이 웬만하면 사방팔방에서 쑴뿡쑴뿡 만들어지잖겠나... 싶더라구요."란 들사람님의 표현이 있지 않나 싶네요.

  2. ou_topia 2011/08/20 1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댓글을 계속 다네요.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제 좀 고리타분하니까 세련된 우리에게 걸맞게 “우리는 인류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바꾸자. 여기에 자칭 좌.우 다 오케이.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

    • 들사람 2011/08/23 0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그렇게 봐도 좋을 구석이 있다고 해야잖을까요.. 그간 좌파가 견지해왔던 '세계사적 진보' 개념의 역사철학적 난점 내지 실천상의 오류가 보수/개혁적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정치적 반동 과정이 보여온 흉물스러움과 나란히, 한결 더 도드라지면서 어떤 곤혹스러운 진퇴양난을 만들어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잖나 해요. 가령 제대로 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이뤄지기 위해서라도 그 전단계로서 부르주아지 혁명의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식의 소위 좌파적 실천 노선 내지 역사인식들(국지적 수준의 민족자주 혁명들에서 세계적 수준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 한편으로 이런 인식상의 가정이, 가령 김문수, 이재오 같은 소위 옛 좌파계 운동가들이 종종 자기네 충정도 몰라주는 영구 같은 '노동자-민중'과 작별하고 차라리 자본주의 권력기계의 복판에서 놀겠노라고 한 일이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던 무렵 일본산 좌파 그룹 상당수가 구미권 식민주의 제국들과 전쟁을 벌인 대일본제국을 저항의 지렛대로 여기고 "근대의 초극"이란 기치 아래 '통일전선'과 엇비슷한 실천에 쉽사리 매혹(아니면 미혹)됐던 일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변절, 투항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이유는 아녔는지도 살펴봐야잖나 싶거든요.

      요즘 구미권의 '지적 기린아'란 (제가 보기엔 구미권의 제도권 학계도 확실히 맛이 가긴 갔나 보다 싶은 생각을 들게 하는) 평가 속에 한창 번역, 소개되고 있는 경제-문명사가 니얼 퍼거슨이나 이영훈 같은 지식인 부류가, 말씀하신 방식의 지적 업데이트 작업을 '제 발로' 정당화하는 자유시장문명 옹호/예찬파라고 할 수 있겠죠(이런 의미에서, 이영훈 교수 류의 지적 움직임은 니얼 퍼거슨 류가 소위 자유시장근본주의의 복고 속에서 이런 극보수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한 것과 확실히 그 맥을 같이했던 것으로 이해해야잖나 해요. 지난 20~30여 년 간 자유민주주의 축적권력의 세계화 노선이 대안 따윈 불필요한 "시대정신"인 양 간주됐던 지구적 맥락에서 보자면,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진행됐던 이영훈 류의 작업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그저 거슬렀을 뿐인 단순한 시대착오는 아녔던 셈이죠. 보다 더 알차고 가차 없는 비판을 위해서도 이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껏 국지적인 동시에 전지구적으로 진행돼왔던, 근대자본주의 체제에 특유한 문명화 효과(='세계-내-시민'이라는 계급적 주체의 탄생, 불균등한 산포 과정?)의 미덕을 지적으로 옹호, 예찬하고, 나아가 정당화하는 데 힘써온 자유시장진리교의 지적 사제들이랄까요. 제가 보기엔, 그 미덕은 원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가공할 추악함으로 얼룩진 것이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추악함을 자양분 삼아 번성해온 것이라는 점을 결코 놓쳐선 안 될 테지만요.. 그런데 이 점이 자신들이 추켜세우려는 근대시민사회 문명의 미덕과는 아~무 상관이 없거나 적어도 '부수적인 폐해'였던 양 혹세무민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애써온 '지적 세련화' 작업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바 아니겠나..ㅋ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문제는 이런 정당화 작업이 19~20세기 초중반 같았으면 정치적 좌우파를 가로질러 형성돼 있던 진보(주의) 헤게모니의 위세 속에서 상당한 동의를 이뤄냈을 텐데, 거꾸로 지금은 이런 식으로 정당화를 하려 들면 들수록 정치적, 문화적 역효과가 비유럽 권역은 물론이고 유럽 내부에서조차 과거에 비하면 아주 커지기 십상이라는 데 있잖나 싶네요. 자본주의 세계경제 자체도 끽해야 돌려막기 식으로 연명해 가며 깔딱대고 있다지만, 뭣보다 세계-시민사회에 그럴 듯한 지적, 문화적 자기정당화 레파토리를 새로이 짜맞추는 일도 잘해 봐야 뻔뻔한 리메이크거나 낯뜨거운 독백일 공산만 더 증폭시키면서 그 막장을 보여주고 있는 거 아니냐.. 뭐 저는 그렇게 봅니다. 저들에겐 저들이 애를 쓰면 쓸수록, 그래도 어찌 해 볼 만한 전망이 아니라 도무지 어찌 해 볼 수 없는 절망의 기운이 어른거린다고 할까요. ㅋ

  3. ou_topia 2011/08/23 06: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세기 말에는 예술가들의 촉각이 살아있어서 한편으로는 20세기가 가져다 줄 비극을, 다른 한편으로는 promise를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하나의 상으로 제시하였던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은 돌려먹기가 아니면 살아남기에 급급한 행동과 실천만 보인다는 생각이 저도 듭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던 무렵 일본산 좌파 그룹 상당수가 구미권 식민주의 제국들과 전쟁을 벌인 대일본제국을 저항의 지렛대로 여기고 "근대의 초극"이란 기치 아래 '통일전선'과 엇비슷한 실천에 쉽사리 매혹(아니면 미혹)됐던 일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변절, 투항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이유는 아녔는지도 살펴봐야잖나 싶거든요.” 이 대목에서 이남, 이북에서 숙청된 수많은 좌파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해방 뒤 인민공화국 문교부장을 역임한 국문학자 김태준은 최후 법정진술에서 ‘지금 조선에는 고전을 수집, 정리하고 고증하는 것이 중대한 일이다. 앞으로 용인된다면 상아탑에서 여생을 살겠다’고 말했으나 한 달 뒤 처형됐다.”(김연수, “꾿빠이, 이상” 72쪽)이 겹칩니다. 그 사람들이 이야기했던/지향했던 이론과 실천이 뭘까 궁금합니다.

    • 들사람 2011/08/24 0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아닌 게 아니라, 근대식민주의 하부구조의 변주된 지속으로써 동(남북)아시아 일대에서 형성됐던 반공-준전시동원형 민주주의 축적체제의 발전 와중에 안타깝게 이지러졌거나 굴절, 봉인돼버린 '사회주의 경험'과 기억의 결들을 어떻게 오늘에 되살려야 할지는, 그야말로 '인터내셔널한' 고민과 중지를 요하지 싶네요.

      근데 제가 절망의 기운이 어른거린다고 한 건 어디까지나 '저들', 그리고 저들의 '사명'이 펼쳐지는 무대라 할 세계-시민사회의 돌려막(아 살아남)기 식 통치술이죠.. 실은 이보다 더 많은 걸 아우르고 있는 '현실'이 아니라요.ㅋ 이 역사적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민주적 공론장"에서 뻔히 보여도 안 보이는 '유령' 취급받거나 정치적 잡티처리 됐을 뿐이지, 시민 아닌 시민 계급들의 반체제적 실천/존재감은 세계 곳곳에서 진작에 살아 움직여왔잖냔 검다. 확실히 있다고도 할 수 없지만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희망'의 길(루쉰)을 저마다 내고 또 잇고자, 근대자본제 시민사회의 진보&발전이 아니라 그것의 '중지'를 희망해온 "역사의 천사"들(벤야민)로서라고 할까요. ㅎ 튼실한 희망의 그물망을 짜 나가기엔 물론 '아직까지' 크게 아쉽고, 모자라고 성긴 상황일진 몰라도 말이져.

      하여, 중요한 건 결국, '지루한 반복'에 빠질 게 뻔한 현실의 철저한 부정이 곧 잠재된 현실로서 우리 일상에 깃든 미래(의 해방)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 될 수 있는 폭넓고 두터운 좌파적(=반자본주의적) 실천의 각을, 그것도 여러 종류들루다 결연하고도 꾸준히 벼려 가는 일 아닐까 해요. 이런 여지가 적어도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시절, 다시 말해 민족(자결)주의가 강력한 정치적 광명이요 지름길로 간주됐던 시절보단 확실히 좀더 커졌단 점에서, 지금과 앞으로가 '그때 그시절'보다 딱히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요.

  4. 藝術人生 2011/08/24 1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질문을 잘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히 받아서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구요.

    • 들사람 2011/08/24 2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뭘요, 앞서 한 얘길 질문으로 접수해주셨다니 제가 되려 감사할 일인데요.^^ 아닌 게 아니라 님 나름대로 키워온 문제의식 내지 질문들하고 접을 좀 붙여주시길. 중국/대만 쪽 동향/정세에 대해서도 좋은 얘기 해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