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2057년

월옹논평 2008/03/12 21:51
Commentary No. 207, April 15, 2007

유럽, 2057년
("Europe, 2057")




유럽연합(EU)에서는 최근 창설 50주년 기념행사를 치렀다. EU는 1957년 3월 25일 조인된 로마조약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이 조인식에 참가했던 이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으로는 프랑스 대표였던 모리스 뽀르 Maurice Faure 가 유일한데, 그는 유럽의 최근 상황에 대해 꽤 당혹스런 심경을 내비쳤다.

이와 관련하여 <르몽드>는 머릿기사로 유럽(연합)을 둘러싼 유럽 내부의 “음울함”에 대해 이야기했고, <인터내셔날 헤럴드 트리뷴>의 경우 “술렁임”에 초점을 맞췄다. 50주년인데도 분위기가 신통찮은 직접적인 원인은,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2005년 치른 국민투표에서 새 유럽헌법안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현 EU 의장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은 상황을 긍정적인 쪽으로 추스르고자 회원국들을 기념행사차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다소 모호한 제안으로나마 회원국들이 좀더 진전된 정치적 수순을 이뤄낼 협상안 갱신에 나서도록 좋은 말로 다독이느라 애를 썼다. 지금 궁금한 건, EU가 어찌될 수도 있을는지, 향후 50년 새, 그러니까 2057년에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는지 하는 점이다.

언론매체와 정치인들이 내놓는 암울한 전망 속에서, 여론조사기관 해리스 인터렉티브Harris Interactive에서는 서유럽 5개국(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과 미국을 대상으로 2057년 EU가 어찌될지에 관해 실시한 설문결과를 발표했다. 상당히 놀라운 결과였다. 거의 모든 응답자들이 2057년에도 EU는 제대로 굴러갈 것이며, 유로화가 국제표준 통화로 자리를 잡으리라 확신했다. EU와 미국과의 관계가 나아지리라고 본 응답자는 겨우 3분의 1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결과는 유럽의 지리적 포괄범위에 관한 답변에서 나왔다. (나라별로) 30~50%에 이르는 응답자들이 (당장으로선 사실상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시나리오라 할) 러시아의 EU 가입이 이뤄지리라 봤고, 훨씬 더 많은 비율의 응답자가 (현재 첨예한 논쟁거리인) 터키의 EU 가입이 현실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정치권에서는 요즘 어느 쪽이든 그리 되는 건 아주 안좋은 시나리오라며 요란을 떤다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설문에 응한 유럽인들로서는 수긍을 못하겠거나, 적어도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설문결과가 드러낸 이같은 입장상의 모순은 정치(학)과 지정학geopolitics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정치적 장의 다양한 행위자들 간에 단기적 관심사와 관련해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이 견지에서 보자면 지금 유럽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정학이란 단기적 행위자들을 제약하는 가운데 장기적인 이해를 반영하는 여러 중기적 추세들과 관련이 있다. 지정학적 이해가 나름 깊다거나 어떤 선호 내지 견해가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한데, 정치인들의 경우 확실히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정학적인 추세가 어떤지도 모른 채 그 속에 자리하고 있기 마련이다.

1957년 3월 로마에서 만났던 그룹은 예외적이었는데, 특정한 지정학적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더러 실재했던 역사적 추이도 분명 그랬다는 점에서다. 메르켈 수상은 그의 동료이자 회원국 지도자들이 지정학적 틀에서 유럽을 바라보도록 설득했던 셈인데, 이는 여론조사 결과에 반영된 서유럽 사람들의 기대와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2057년, 유럽은 어떤 형국을 맞이하리라고 내다볼 수 있을까? 어떤 답을 내놓든지간에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세 가지 있다. 가장 먼저, 미국의 지정학적 위상이 급속히 쇠퇴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다극적인 세계체제가 도래하리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유럽 입장에서 문제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미국이 아닌 동아시아와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중국, 일본, 남(북)한이 주도할) 동아시아 지역이 의미있는 방식으로 협력관계를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유럽이 정치적으로 좀더 응집력 있는, 그러니까 러시아와 터키를 끌어안을 만한 구조를 창출해낼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로는, 유럽이 그 자체 기독교에 기반한 대륙에서 다종교를 지향하는 대륙으로 거듭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금 카돌릭 교회가 당면한 지상과제로, 유럽의 “재기독교화”를 줄곧 천명해왔다. 그는 유럽에 퍼진 “위험한 개인주의”를 역사적으로 진행돼온 “세속화”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유럽은 지금 “배교의 늪에 빠져 있”으며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상황인데, 그는 이를 명백한 “문화적 붕괴” 상황으로 규정하고 있다.

보건대, 지정학적 추세는 교황의 바람과는 따로 노는 듯하다. 무슬림의 비중은 나날이 늘고 있는데, 교회에 나가는 이들의 수는 나날이 줄고 있다. 결국 교황의 말이 옳은 걸까? 달리 말해, 유럽의 “문화적 붕괴” 징후로 봐도 좋으냐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유럽은, 인구학적 재구성으로 실질적이고도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될, 새로우면서도 활력 넘치는 그런 문화적 진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답은 열려 있다.

마지막으로 2057년이면 유럽은, 내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일종의 섬으로 자리를 잡을까, 아니면 첨예한 내부 갈등의 장이 될까? 이는 사회적인 문제로, 신자유주의적인 여러 압력으로 점증하는 내부의 양극화 상황을 얼마 만큼 추스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유럽은, 복지국가 틀에 입각했던 제반 정책을 허물어뜨리라며 목청을 높이는 데 대해 비교적 잘 견뎌왔다. 하지만 그런 고성高聲어린 압력들은 낮아지는 게 아니라, 점차 커지는 중이다.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를 경우, 유럽이 평온한 곳으로 남아 있을 가망은 별로 없다. 구조적 위기에 처해 있는 현존 세계체제에서, 유럽이 외려 긍정적인 변혁의 힘을 그러모으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 또한 열려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 예일대 석좌교수, 사회학


원문보기http://fbc.binghamton.edu/207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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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2 21:51 2008/03/12 21:51

Commentary No. 208, May 1, 2007

아프리카, 2057년
("Africa, 2057")




올해는 아프리카 독립 50주년을 맞는 해다. 50년 전인 1957년 4월 6일, 황금 연안Gold Coast에 위치한 대영제국령 식민지는 가나라는 이름의 독립국가가 됐다. 사하라 이남 지역이라 불리던 곳 중에서 최초였다. 이 독립투쟁을 성공으로 이끈 운동의 지도자는 가나의 초대 대통령 크와메 앵크루마Kwame Nkrumah였다.

세계는 이 날이 아프리카의 역사상 중대한 전환점이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고, 이에 축배를 건네고자 각지의 지도자들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모여들었다. 대영제국에선 켄트 공주와 당시 수상이던 헤롤드 맥밀런 경이, 미합중국에선 리차드 닉슨이 부통령 자격으로 참석했다.

나 자신 그 당시 아크라에 있었지만, 분위기는 확언컨대 굉장한 열정과 긍정으로 충만한 환희가 주조였고, 가나는 물론 아프리카 대륙의 미래에 대해서도 대체로 낙관적이었다. 앵크루마는 이렇게 말했다―“그대 먼저 왕국을 찾으라. 그러면 나머지는 다 그에 따라붙을 테니.” 이 말은 시금석試金石 같은 것이었다.

가나의 독립에 이어 1958년에는 기니가 프랑스령 식민지이기를 과감히 거부했고, 그 뒤1960년 독립 움직임은 봇물 터지듯 전개됐다. 전부 16개의 나라가 이때 세워졌다. 1960년에는 “아프리카의 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이 해는 콩고 위기라 불리는 해이기도 했다. 콩고 위기는 아프리카 독립국가에서 벌어진 첫 내전이자, 탈식민지화 이후 처음으로 유럽 군대가 아프리카에 재진주한 사건이었는데, 아프리카 행정수반의 암살이 처음 일어난 것도 이때였다. 당시 콩고 수반은 패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쪽으로 들이치는 아프리카 해방의 물결”은 몇 년 더, 광물이 풍부하고 (백인)정착민 지배가 이뤄지던 남부 아프리카의 옹벽이 허물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앙골라와 모잠비크로, 로데지아(현 짐바브웨)는 정착민에 의한 통제가 이뤄지리라고 스스로 선포한 독립국가로,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는 남부 아프리카인들이 다스리는 나라로,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말이다. 이들 나라에서 독립적인 아프리카인들의 행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20년이 더 걸렸지만, 결국엔 그렇게 됐다.

이 와중에 1957년~1960년 사이의 들뜬 분위기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 군부 쿠데타, 내전, 심지어 국가간 전쟁으로도 모자라 유가상승으로 (기인한 게 아니라) 더 악화된 1970~80년대의 극심한 경제 위기가 겹치면서 잦아들었다. 검은대륙에 대한 비관이 낙관을 대체했다. 정치적 독립에 나머지는 다 따라붙을 거라 했지만, 그렇게 되고 있지가 않았다. 앵크루마가 틀렸던 걸까?

앵크루마 자신은 서유럽·북미에 대한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의 경제적 종속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식민주의의 종언은 신식민주의로 이어지리라고 경고했다. 앵크루마가 내린 처방은 아프리카의 통합이었고, 이에 따라 그는 기준을 높여잡았다. 북아프리카 지역을 끌어안고자 그가 무던 애썼던 일은, 아프리카라는 범주를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통합운동이라는 원대한 구상은 1960년대를 거치며 아프리카통일기구(OAU)라고 하는 취약한 형태의 구조로 귀착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용두사미가 됐다. 나중에 아프리카연합(AU)으로 이름을 바꿔달았다지만, 예전의 취약함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2007년, 아프리카의 전반적인 정치·경제적 구도는 1957년 당시 이 대륙에 들이쳤던 희망과 기대치와는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간간이 경제적으로 나아졌다고 봐줄 만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여러 통계수치들이 보여주는 바, 아프리카는 6대주로 분류된 대륙들 중 가장 취약한 위상을 지녀왔다.

정치적으로도 간간이나마 새로운 숨결이 일고 있다 할 만한 구석이 있긴 하다. 하지만 대다수 국가는 부패한 정치인들, 자신들이 창출한 정권에 대한 의미심장한 반대 움직임을 용납치 않으면서도 다수의 자국 인민들 삶을 향상시키는 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부패한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향후 50년 간 아프리카 상황은 어떤 양상을 띨까? 물론,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상당 정도로 합당한 기대를 해볼 수는 있겠다. 뭣보다도,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순 없을 것이다. 국제적인 국가간 위계(=열국체제상의 위계구조)를 놓고 봤을 때, 오늘날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은 대체로 바닥에 포진해 있다. 이 현실 앞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반응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일부는 위계가 더 높은 국가군으로 이주하고, 일부는 새로운 여러 운동을 구축하면서 민족해방 투쟁의 파고를 재차 드높이고자 진력하는 중이다.

투쟁의 이러한 두 번째 대목에서, 2057년경의 지정학적 구도는 첫 번째 대목과는 판이해질 것이다. 그무렵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과 프랑스 행정부의 직접간섭 능력이 사라지리라는 건 거의 확실하다. 이를테면 중국, 심지어 브라질 같은 새로운 간섭자들이 이들 두 나라를 대체하리라는 견해도 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할 순 없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굉장히 개연성이 떨어지는 시나리오다.

내가 믿기로, 향후 25년 간 상대적 홀대에 시달려온 아프리카의 지정학적 위치는 외려 아프리카 지역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이 거듭난 여러 해방운동들을 출현·번성케 할 공산이 크다. 지난 1957~2007년 사이 아프리카가 겪었던 역사에 대해 면밀한 파악이 이뤄진다면, 경제구조들을 변혁하는 데 아쉬운 건 뭐며, 대륙 내부의 계급적 양극화에 맞서 투쟁하는 데 아쉬운 건 무엇인지에 관해 좀더 실질적으로 대응할 만한 운동으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이다.

1957년 앵크루마가 독립자축 행사를 주재하기 전까지, 그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반대파들은 그의 지지자들을 일러 “거렁뱅이들veranda boys”이라며 코웃음쳤다. 앵크루마에 힘을 보탠 투쟁세력 다수가 도시빈민 출신으로, 상주할 거처 없이 남의 집 베란다에서 잠을 청하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관련 문헌 다수에선 은폐돼 왔지만, 이는 전성기 아프리카 민족주의에 계급갈등 요소가 있었음을 방증한다.

계급의식은 장차 아프리카 정치의 중심화두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근대 세계체제 전반의 구조적 위기와 이로부터 격화하는 지정학적이고 세계경제적인 혼돈이란 조건과 맞물리면서,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운동들은 지구적 정치투쟁에서 오늘날 우리 대부분이 바라마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부디 이렇게 바라도 되도록 하자.



이매뉴얼 월러스틴
/ 예일대 석좌교수, 사회학



원문보기http://fbc.binghamton.edu/208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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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2 21:50 2008/03/12 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