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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5
    짝사랑에대한 변명(1)
    진아
  2. 2007/10/14
    일부일처제에대한 반론...(1)
    진아
  3. 2007/10/14
    자치의 문제(1)
    진아

짝사랑에대한 변명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게 아니다.

그의 사랑이나 관심을 얻고싶은 마음따윈 없다.

나는 그와의 사랑도 연애도 꿈꾸지조차 아니한다.

그와 나의 관계의 어떠한 진전도 없으리라.

 

그런데!!!

그런데 나의 이 마음은 어인일인까?

온통 그를 향하는 이 마음은?

그가 미치도록 보고싶은 이 마음은?

드문이라도 만나면 조금이라도 오래

그의 곁에 머물기를 원하는 이 욕망은 뭐란 말인가?

보고싶어도 보고 싶다고 말할수없고...

그가 보고싶어 달려왔지만

그는 내곁에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그가 내앞에 나타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미쳐 돌아버리고 말것만같은

이 괴로움은 뭐란 말인가?

 

마음 단속을 잘 했어야 했거늘...

내가 방심했나보다.

정말 그에게 마음을 뻇겨버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어찌하여 하필 그란 말인가?

그 오랜시간...

나의 안중에도 없던 그를...!

그 변변찮은 인물에 어찌 내가....!

(원래 난 남자의 훤칠한 외모부터 보는 사람이다.)

 

아뭏든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나를 거절할것이고

나또한 그를 거절할것임을 안다.

 

포기하는것도 사랑이라면서...

상대의 행복을위해 물러나주는것도 사랑이라면서...

꽤나 고상하고 지적인 인품에

스스로 나름 흡족해하며...

오~~!

게다가 둘다 촘촘하고도 두터운 현실을

자각해버린 사람들인지라

섣부른 사랑은커녕 만남조차 조심스러울밖에!???

결국 서로가 서로를  정중히 거절하고말

교양있는 사람들이란걸 안다.

 

그와 만나 조심스레 그의 생각을 알아내고

그의 말에 눈 반짝이며 경청하다

맞받아치는 짜릿함...

감히 사랑은 아닐진대...

사랑보다도 더 강렬한 소통의 매력이 있다.

그가 준책,

그가 한 이야기,

그가 부른 노래,

그와 나눈 실없는 농담과 진담들이

어찌나 즐겁고 정다운지...!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서 얼른 떠나질 못한채

내 온 영혼에 녹아내리고 있나보다.

 

그는 양의 품처럼 따스하고

정다운 목소리이지만

냉정할땐 엄청 냉정하고

잘라야할땐 과감히 자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르고 뒤돌아보지않는 사람.

그 단호함은 남자다운 매력이기도하다.

 

그의 생각의 폭과 깊이는 넓고 깊다는것도 맞다.

창조적인 감수성과

생활의 단단함

둘다 지닌 남자다.

 

더 중요한건

그와의 소통이

리듬을타며 빠르고 강렬하게 흐른다는것도 느낀다.

다 아는데...

나는 그를 선택할수없다.

그도 나를 택하지 않는다는것도 알고있다.

 

찰라의 느낌도

사랑이라고 쳐주다면

내가 느낀건 소통이며...

사랑이었다.

그러나 느낌!

그뿐이다.

더이상의 전진은 없다.

애틋한

그 느낌만 간직하겠다.

소통의

그 강렬한 순간만을 기억하겠다.

그러면 성공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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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에대한 반론...

나는 일부일처제에 결코 동의하지는 않는다.

 

우선 사랑이란걸 어떻게 볼것인가가 문제인데

사랑은 영원불변의 지고지순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것은 성경책이나 미디어의 순정영화속의 테마일 뿐이라는거다.

사랑은 도덕적 당연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랑은 찰라적이기도하고

불완전하고 울퉁불퉁한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사랑은 한사람만을 위해 열려져 있지도 않다.

누를수록 억압할수록 터지게 마련인게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제2의사랑,제3의사랑을 해방시키자는 이야기인가?

너무 위험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생각만이라도 좀 다르게 해봐야 하지 않을까한다.

 

두째,일부일처제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줄기차게 자녀를 출생하고 양육해야하는 짐을 덜어보고자

고대적 여자들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말은 꽤 설득력이 있다.

고대 인간의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다는것을 감안할때

한 여자가 평생동안 자녀를 열명정도 출생한다면

여자는  평생 아이만 낳고 기르다가 죽었을거니까!

게다가 다른 동물들과 비교했을때

한 인간의 양육 기간은 현저하게 길어

근 20년씩이나 되니 자녀의 양육이라는건  

굉장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혹자는 일부일처제는  권력,경제적,물리적 힘이 열등해서

여자를 차지하지 못하는 남성들을 위해,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라고도 한다.

머 그것또한 설득력이 있기도하다.

일부일처제야말로 가장 안전하고도 강력한

성적 구속력이니 말이다.

 

 

오늘 이웃을 따라 교회에 갔다.
"Lord,I trust myself unto thee
Lord,I give my true love unto thee
Lord,I give my whole thankness unto thee.."
장엄한 성가였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가 뭘까?
그건 아이가 엄마의 품을 찾듯
인간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사랑에대한
근본적이고도 원시적인 갈망이 있는게 틀림이 없다.
감동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지옥간다."
라는 말을 힘주어 설교하신다.
띠옹~~~!
한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사랑은 절대적 믿음을 강요하는 폭력이란걸 입증하는게 아닌가!

그렇다면 사랑은
근본적이고 절대적이고 인자한 신뢰와 애정이기도한 동시에
지극히 구속적인 폭력일까?

 

도대체 사랑을 어떻게 규정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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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의 문제

개인의 행복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공부모임을 통해 느낀데로

주체적으로 사는거!

개인의 자립적 삶을통해 획득하는

자기 존엄성

개인적 <자치>...

 핵심이다.

 

근데 이상하다...

 

그 자치라는게

도시에서는

흔히 돈하고 연관이 되어 있다는거다.

갸우뚱...

 

더욱 이상하다.

그 자치라는게 가만보면

건강한 성인남녀에게만

국한된거 같다는 느낌이다.

 

늙고 병든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이나

아니면 몸과 마음이 성치못한 병자이거나

아니면

그들을 부양해야하는 사람인 경우엔...

자치를 획득하기가

좀 어려워보인다.

그들에게는 흔히 '복지'라는 말을 쓰곤한다.

 

복지...

그러나 결코 자치는 아니다.

복지는 폭력이란 말도 있쟎은가?

복지란 그들에게

주어질수도있고

주어지지 않을수도 있다는거 아니가?

누군가(복지의 주체가) 나에게 그  복지의 혜택을 주겠다는것...

결국 난 그걸 기다리며 얻어먹는 객체?

결코 복지는 자치가 될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에게 자치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에게 개인이 자립적 삶을통해 획득하는

자기 존엄성의 획득은 어렵다는건가?

 

갸우뚱할수밖에... 

 

우리는 이 자치의 문제를

어떻게 풀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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