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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퇴학생 김정도 동지 인터뷰>
2011년 7월부터 동국대학교에서는 학과구조조정이 추진되었다. 윤리문화 학과와 북한학과, 반도체 학과 등의 통․폐합 계획이 제기되었다. 자신들이 다니는 학과가 일방적으로 없어질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당연히 학교 측에 수차례 논의테이블을 요청했다.
그러나 학교는 학생들을 무시하고 학과구조조정을 계속 추진했다. 결국 학생들은 2011년 12월 5일, 총장실-경영관리실 점거농성을 시작했지만 9일째 되는 날 새벽, 학술부총장과 교직원에 의해 강제침탈 당하였다. 침탈 직후 세워진 천막농성장도 오래 지나지 않아 폭력적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2월 29일 동국대는 퇴학 3명, 무기정학 2명, 유기정학-사회봉사 25명이라는 학생자치 역사상 초유의 무더기 징계를 내렸다. 2012년 2월 9일에는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은 무기정학, 당시 연대사업국장이었던 김정도 동지에게 퇴학이라는 재심 결과를 확정지었다. 동국대는 학칙 상 징계를 받아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은 재입학이 불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어 이번 퇴학은 사실상 고려대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출교조치로 볼 수 있다.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동국대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 학생분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도 라고 한다.
동국대에서 이전에도 전반적인 학과구조조정이 진행된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다. 특히 2011년에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듣고 싶다.
전체적인 구조조정의 흐름 속에서 동국대는 2007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매년 학과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거의 1,2년을 제외하고는 학생들이 매년 총장실 점거를 했었다. 작년에 퇴학 사태를 정점으로 크게 언론에 부각되었다.
작년에 구조조정 대상 학과가 9개에서 10개 학과정도 되었고 특히 윤리문화학과랑 문예창작학과가 핵심이었다. 윤리문화학과는 내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폐과가 된다. 문예창작학과는 커리큘럼이 완전히 망가지고 국문과로 흡수가 되는, 그런 형태의 구조조정 안이 있었다.
이렇게 학교의 일방적 구조조정 추진에 대해 학생들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작년에는 문예창작과가 가장 먼저 부각되었다. 여름방학 때부터 문예창작과 학우들은 학교 본부 앞에서의 1인 시위를 하거나 단체로 피켓시위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 학내에서 진보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구조조정 투쟁이 벌어지면 항상 앞장서 왔던 분들이었고 이 투쟁에 같이 해야겠다 싶어서 ‘우리의 학문을 지키기 위한 동행(이하 ‘동행’)’이라는 대책위를 준비했다. 9월경에 대책위를 꾸렸고 총장실 점거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했었다. 기자회견도 수차례 열고, 삼보일배도 하고 108배도 하고 대화요청 공문도 많이 보내는 등 당시 총학생회와 함께 여러 가지 활동들을 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생색내기 식의 설명회를 두어 차례 열었을 뿐이었다. 학교에서 계속해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동행 차원에서 좀 움직일 수 있는 학과들을 모아서 연합 학생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총장실 점거가 의결되었고 작년 12월5일에, 총학생회 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선되고 나서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서 총장실 점거를 했었다.
점거한 사람들은 주로 폐과가 예정된 문예창작과나 윤리문화학과랑 학내 활동가들 중심이었을 것 같다.
맞다. 점거준비와 총학생회 선거 준비가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12월5일에 점거를 시작했고 8박 9일째 되는 날 새벽, 12월 13일에 운동복을 입은 학술부총장이 직접 150여명 되는 직원들과 학교 경비업체 직원들을 이끌고 와서 점거 중인 총장실을 침탈했다. 학생들은 그 과정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으로 끌려 나왔다.
끌려나온 직후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을 바로 시작했다. 천막농성이 5일째 되던 날, 원래 켜놓는 천막농성장 주변 전등을 다 끄고, 그 당시에도 경영관리실장이었고 지금도 경영관리실장인 사람이 술을 먹은 채 직원들을 100여명 대동해서 천막을 강제 철거하는 일이 또 다시 벌어졌다. 농성장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동문 선배님들도 계셨는데 그분들도 집단 구타당했다.
그 뒤로 우리 투쟁도 사그라들었다가 2월17일, 입시설명회가 있던 날, 기자회견을 크게 하고 학교측과 몸싸움을 했다. 12월 29일에는 당선자 신분이었던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지금은 그만두었지만은 그 당시 연대사업국장인 저, 이렇게 3명이 퇴학을 당했고, 2명 무기정학, 5명 유기정학, 사회봉사 20명으로 사상 초유의 대량징계가 발생했다.
이후로 징계 수위별로 입장도 깨알같이 다 다르고 여러 입장 차이들과 크고 작은 다툼, 감정싸움, 상처를 주고받는 과정들이 있어서 조금 정체 되었다.
산발적으로 소규모의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는 했었고. 개강 이후에 좀 대중적으로 다시 한 번 투쟁을 만들어보자 해서 4월4일에 전체학생 총회를 시도를 했는데, 동국대가 총회 정족수 기준이 5분의 1로 조금 높은 편이라 총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그 전후로 저도 또 개인적인 사정도 안 좋고, 총회가 무산된 탓도 있고 해서 공황상태였다. 그래서 좀 잠잠해 있다가 최근에 조금씩 집회에 나오고 있다. 이제 안 되겠다 싶어서 5월 중순부터 다시 투쟁을 만들어보려고 학내에서 학생들도 만나고 있고 외부 집회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도 만나고 있다.
‘동행’의 목표가 학과발전협의체 구성이던데 학과구조조정반대가 아니라 학과발전협의체로 목표를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학과발전협의체가 노동자투쟁으로 빗대면 노사정위원회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다. 학과발전협의체라는 것이 사실 말도 안 되는 건데 그러한 요구 이상으로 학생들을 설득하기 어려웠다. 이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한계이기도 하다. 학과 구조조정의 문제가 동국대만의 문제도 아니고 특정학과만의 문제도 아닌데 학교 안에서 조금이라도 문제를 풀어내려면 대학생들의 전국적인 투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학교 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대치가 학과발전협의체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교 발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학교가 잘 살아야 학생이 잘 산다’, ‘회사가 잘 되어야 노동자가 잘 된다’라는 것을 깨야하지만 투쟁하는 주체들도 그 논리를 넘어서기가 상당히 힘들다.
사실 대학기업화나 구조조정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은 좀 소수였고, 민주적인 구조조정, 민주적인 등록금 심의위원회 뭐 이런 거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내가 항상 “그럼 민주적으로 구조조정하면은 받아들일 수 있냐, 민주적 구조조정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그렇게 항상 얘기를 하지만 다수의 동의를 얻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투쟁의 요구나 슬로건이 조금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
투쟁 과정에서 학생들의 여론은 어땠는가? 분기점마다 약간 변화가 있었을 것 같긴 하다.
투쟁을 1,2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학교가 너무 일방적이지 않느냐, 학생들이랑 적어도 논의는 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런 대중적인 분위기는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탄압이 거세지거나 투쟁 수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간다. 뭐 말씀하셨듯이 분기점마다 동참하는 학생들의 수도 점점 더 줄어들고. 총장실 점거할 때 한 200여명 정도 점거에 동참했었는데. 지금 제가 천천히 사람들 다시 만나고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3명이 남은 거나 마찬가지다. 총학생회장님, 부총학생회장님, 저, 이렇게. 지금 두 분은 무기정학 상태다.
나머지 징계대상자들은 유기정학이라 징계기간이 다 끝난 건가
그렇다.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면 ‘해고는 살인이다. 현장으로 돌아가자.’ 이런 구호를 외치는데 이게 퇴학을 당하고 나니까 그 구호를 외칠 때 느낌이 정말 다르더라. 이게 정말 내 문제니까. 내 현장은 학교니까.
이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요즘 열심히 투쟁하려고 노력하는데 하루하루 느끼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게 많은 그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고려대도 그렇고 중앙대 출교도 그렇고 처음에는 이슈도 많이 되고, 나름 학내에서 투쟁동력이 있다가 점점 장기화가 되면 될수록 징계당한 사람들로 소수화되는 것 같다. 그리고 학내에서 기반이 없어지면서 투쟁이 사회단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거나, 아니면 법정투쟁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다.
맞다. 말했듯이 학내에서 대중적인 동력을 확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물론 소수의 학생들과 총학생회에서 같이 연대해주긴 하지만. 밖에 연대하면서도 보면,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뭐 지금도 이해할 것 같다고 하면 자만일 수도 있지만 해고자 복직투쟁 하시는 분들이 10%는 이해가 되더라. 현장에서 왜 고립될 수밖에 없는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여러 가지 요인들이 많은데. 물론 혼자 퇴학을 당하게 되면서 감정적으로 좀 움츠러든 면도 있고, 혼자 끙끙 앓다가 서로 싸우고 이러면서 사이가 더 벌어지는 경우도 있고. 서로가 서로를 보는 시선들도 되게 고깝게 보는 것도 있고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거리를 좀 좁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징계 반대 투쟁에 함께 대응하는 단위가 있는가?
초기에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라고 불교계 단체랑 <동국대 민주동문회 준비모임>이 총학생회랑 같이 총장 면담요청도 하고 불교계를 통해서 크고 작은 압박도 넣고 성명서도 냈다. 동문회에서는 신문 일간지에 1면 광고도 냈었다.
그분들 역시 이 투쟁에 함께 하고 있고 민변을 통해서 변호사분도 구했지만. 실질적인 투쟁을 만들어나가는 대책위는 되지 못하고 있다. 그분들이 잘 못하신다는 게 아니라 좀 이슈파이팅에만 집중되는 측면이 있어서.
사실상 제가 투쟁을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상을 그려봤는데 학내에서는 그동안 좀 틀어진 사람들과도 관계를 회복하고 계속 총학생회도 만나고 의견조율하고 하면서 작지만 꾸준히 1인 시위도 하고 선전전도 하고 할 생각이다.
나머지는 사실 상 법률투쟁인 것 같다. 6월 초․중순에 소송도 하고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다. 이제 대학 기업화 문제로 사회적인 이슈파이팅을 할 예정이다. 6월7일 11시 30분에 저희 동국대 본관 앞에서 ‘대학기업화 반대’, ‘표적 징계 철회’, ‘본부 규탄’을 위한 청년학생 기자회견이 있다. 동국대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운동 단체나 중앙대나 고려대에서 퇴학을 당하셨던 분들을 모시고 기자회견도 하고 항의방문도 할 생각이다.
이건 조금 아쉬운 소린데 어느 투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시작할 때는 가장 절박한 분들부터 시작을 하면 사람들이 붙는다. 그런데 또 움츠러드는 국면에서는 가장 절박하지 않은 사람들부터 총장실에서 나가고 징계투쟁에서 손을 떼더라. 근데 어느 순간 쌍용차 투쟁에서 보이는 것처럼 산자와 죽은 자, 그런 게 있더라.
산자와 죽은 자라는 그 여섯 글자가 나에게 정말 와 닿았다. 나는 사실 투쟁을 처음 시작할 때는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불교학과인데 불교학과는 구조조정하면 수혜를 보는 입장이었고, 산 자였다. 이제 투쟁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퇴학을 당한 전후로 보니까 지금은 내가 또 가장 절박한 상황이고 어느 순간엔가 죽은 자가 되어있더라, 어느 순간에. 지금까지는 내가 이런저런 활동하면서는 항상 산자였고 항상 연대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게 당사자가 되어있고 가장 절박한 사람이 되어있으니 매우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든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투쟁 계획과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해달라.
투쟁 계획은 아직 크게 잡힌 게 없다. 앞으로도 계속 학내외에서 크고 작은 집회 다니면서, 학생들 만나면서 계속 알려낼 예정이다. 이게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니까 집회에서도 계속 선전전 할 거고.
복학을 하면 좋지만, 그것보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대학 기업화라는 의제를 가지고 이슈파이팅을 계속 해보자는 생각이 있다. 여느 해고자 동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현장에서 당했던 그 신체적인, 물리적인, 정신적인 그런 폭력들을 생각하면 마음 같아선 안 다니면 그만이다. 근데 항상 탄압하는 사람들은 투쟁하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떠나는 것을 가장 바라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올 때는 나오더라도 일단 복학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몇 년이 되었든 복학은 꼭 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언론에 계속 알리고 관심이 시들어갈 때쯤 또 뭔가를 계속 하면서 묻히지 않게끔 잘 해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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