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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통합진보당 사태의 교훈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2/06/29 19:22
  • 수정일
    2012/06/29 19:41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정치비판을 넘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 통합진보당 로고가 확정된 뒤, 공동대표들의 사이좋던 한 때 (사진출처 : 뉴시스)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 대표 경선이 온라 인 투표에 대한 관리부실로 투표가 중단되면서 다시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이달 초 통진당 당기위원회는 이석기·김재연을 비롯하여 자진사퇴를 거부하는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후보의 제명을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최종 확정은 결국 이번 경선에서 당권을 누가 잡느냐에 달려있다고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와 무관하게 사실상 NL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비화하고 있는 선거구도와 끊임없는 잡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관심에서 이미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사태를 키운 통합진보당 주류의 착각


지난 5월2일 통진당 진상조사위가 당내 비례대표 선출 과정에서 총체적인 부정투표가 있었다고 발표한 뒤, 통진당은 연일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와 신문지상의 1면을 오르내리며 광우병·FTA·노무현·천안함 등 굵직굵직한 이슈들을 모두 묻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가히 5월은 가정의 달이 아니라 통진당의 달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통진당 사태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것은 부정선거 자체의 문제보다는 그에 대응하는 당 주류세력*의 태도 때문이었다. 

부정선거 혹은 부실선거가 벌어진 사실 자체는 명백했다. 온라인투표에서 같은 IP로 집단투표가 벌어졌다는 것, 현장투표에서 묶음 투표가 있었다는 것, 선거인 명부에서 부정 의혹이 있다는 것 등은 통합진보당 주류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선출된 비례대표들이 사퇴하는 게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진당 주류세력은 진상조사위의 조사결과에 ‘정치적 의도’가 있으며 믿을 수 없다고 하며 갖가지 핑계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5월4일 진상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첫 번째 통진당 전국운영위원회는 밤새 인터넷으로 회의 를 지켜 본 사람들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 어느 정도 중재안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이정희는 시간 끌기와 관료적 진행으로 일관하다가 사회권을 유시민에게 넘겨주고 퇴장해버렸다. 

이정희가 퇴장하고 나자 주류세력은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회의를 방해했고, 그 때문에 나머지 운영위원들은 회의를 전자투표로 속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운영위원 50명 중 28명이 ‘조속한 사태수습 후 5월12일 중앙위원회 이후 공동대표단 총사퇴, 순위 경쟁 명부상 비례대표 당선자 및 후보자 총사퇴, 선거관리 관련자 전원 당기위원회 회부, 혁신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그러나 파행적인 운영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통진당 주류는 전자투표라는 의사결정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결정사안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5월10일 열린 전국운영위원회에선 그 전 회의에서 퇴장했던 이정희가 자기 정파에 유리한 회의 진행을 위해 자신은 사회권을 양도했을 뿐 전국운영위원회 의장직을 사퇴한 것은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말을 바꾸었다. 

이정희는 진상조사위 결과가 발표된 직후에도 “4·11 총선 비례대표 온라인 투표 관리 부실, 현장투표 관리 부실과 부정 투표는 심각한 잘못으로 국민 여러분과 당원 여러분께 사죄드린다”고 말했다가 불과 하루 만에 조사결과를 전혀 수용할 수 없다고 말을 뒤집은 바 있었다. 이런 말 바꾸기는 이정희가 단지 당 주류세력의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했으며, 한때 가장 촉망받던 진보정치인이라던 그녀의 정치생명은 이로 인해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전국운영위원회에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이틀 후의 중앙위원회로 모든 것이 미루어졌다. 하지만 결국 12일 중앙위원회에서 폭력사태라는 최악의 사태가 터지며 통진당 사태는 막장의 끝을 보여주었다. 

주류는 자신들도 구성에 동의한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가 근거가 없고 과장되고 부풀려졌다고만 얘기했을 뿐 그 자신이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한 반박 근거를 내놓은 적이 없이 의혹만 제기했을 뿐이었다. 주류세력은 5월8일에 자신들이 주장하던 공청회를 개최했으나 “마녀사냥”, “당과 동지에 대한 무고”, “집권 가능성 소멸”, “당원들의 고통” 등 감정적인 호소를 늘어놓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반증도 제시하지 못하고 질문조차 일절 받지 않는 쇼를 연출했다. 

통진당 주류가 보인 이런 식의 태도들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기에 운동사회 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통진당이 총선 이후 원내 제 3당으로 약진하면서 그들을 지켜보는 눈은 훨씬 늘어났고, 사태의 출발부터 폭력사태에 이르기까지 관심 있게 지켜보던 대중의 비난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5월12일 통진당 중앙위원회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사진출처 : 노동과세계) 


본질을 비껴난 비판들


사태의 본질은 애초부터 명확했다. 통진당에 대한 비난 여론은 비상식적이고 절차를 무시하는 주류세력의 행태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뻔뻔스러운 언사들이 불러온 것이었다. 

정치적 의도가 있든, 부풀리기가 있든 선출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경선으로 선출된 비례대표가 모두 사퇴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통진당 주류는 트집 잡기와 시간 끌기로 무작정 버티며 자기정당화를 위한 궤변을 일삼기 시작했다. “유죄의 증거가 없다면 무죄”라는 이정희나, “선거부정이 70%, 50%는 돼야 총체적 부실”이라 할 수 있다는 이석기, 묶음투표에 대해 “풀이 다시 살아나서 다시 붙은 경우”가 있다는 김선동 등의 말은 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비웃음과 공분을 샀을 뿐이었다. 

5·12 폭력 사태 이후 극우에서 극좌까지 모든 정치세력은 이 사태에 대해 강박관념처럼 논평을 쏟아냈다. 

<뉴데일리> 같은 극우 언론들은 처음부터 색깔론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몇 차례 역(逆)북풍을 경험한 조·중·동 등 메이저 보수언론들도 5월 4~5일 전국운영위원회 이후 비난 여론이 격화되자 앞 다투어 색깔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폭력사태가 벌어진 뒤, 통진당 문제에 대해 전사회적으로 뭇매가 쏟아지자 운동사회도 비판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5월14일 비례대표가 총사퇴하지 않으면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정치적으로 왼쪽에 속하는 정치단체들은 대동소이한 입장을 내놓았다. 사태의 본질은 단순히 민주주의 문제가 아니라 통합진보당의 사상과 정치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즉 이번 사태의 본질은 주체사상, 의회주의, 혹은 스탈린주의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런 비판들이 정말 본질적인 것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통합진보당의 사상이나 의회주의 문제를 억지로 연관 짓자면 아예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굳이 새삼스러운 문제도 아니고 이 사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의 분노도 통합진보당의 주류세력이 주사파라서, 의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노골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가 원인이었다. 보수진영의 이념 공세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통합진보당 주류가 갖고 있는 사상문제는 사상의 자유·표현의 자유문제로 방어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주체사상, 의회주의 비판보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진보진영 또한 더러운 부정과 만날 수 있는 0.1%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매사 스스로를 돌아보겠다”는 진보신당의 논평이 차라리 돋보였다. 



그들만의 문제인가

 

△ 자진사퇴를 거부해 논란의 중심에 선 이석기
(사진출처 : 경향신문)

5월21일 설마 했던 검찰의 압수수색이 실시되고 보수언론과 이명박, 새누리당이 혼연일체가 되어 대대적인 이념공세에 나서자 운동사회 일각에서는 통진당 사태가 조·중·동의 여론조작 때문이라는 해괴한 방어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이 일방적으로 조·중·동의 여론조작에 호도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대중을 조작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뿌리 깊은 엘리트주의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운동사회의 대다수는 통진당 노선 비판을 통해 사태를 “그들만”의 문제로 몰아가려고 애썼다. 주체사상, 의회주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신들의 정치적 포지션에 따라 통진당 문제를 자신들로부터 분리시키고 나름의 정치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논리였다. 요약하면 통진당 주류는 운동사회 내에서 특이한, 질 나쁜 종자들이라는 주장들이었다. 통진당 주류세력이 이번에 저지른 범죄적인 행태의 양과 질을 보았을 때 아주 설득력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과연 그런 비판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시민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며 동시에 폐쇄적인 운동사회의 문화전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유시민이 제기한 것처럼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이런 비판은 사실 정치공세에 가까운 것이며 국회의원의 국가관을 검증하겠다는 우파들의 논리와 합치되는 면이 있다. 통진당 뿐 아니라 운동사회 전반이 소위 국가와 국기를 존중하지 않고 민중의례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역사적·정치적 근거가 있다. 국민의 정서라는 문제로 가볍게 부정할 문제가 아니고 진지한 논쟁이 필요한 문제인 것이다. (박스기사 참조) 

그렇지만 한편으로 통진당 문제가 기존 운동사회 문화의 문제이기도 한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통진당 사태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그들의 정치와 무관하게 운동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파적 이해에 따른 절차 무시, 상식의 무시, 민주주의의 훼손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대공장 대의원 대회 등에서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 통합진보당을 비판한 민주노총의 현 지도부나 과거 지도부였던 심상정, 조준호도 이런 행태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심상정과 노회찬만 해도 불과 얼마 전 그들이 추진하는 3자 통합을 진보신당 당원 다수가 반대하자 수백 명의 추종자를 데리고 자기들이 만든 진보신당을 버리고 통합진보당에 넘어간 이력이 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심상정은 소속 당에서 결정한 경기도 지사 후보직을 선거일 직전에 일방적으로 사퇴하고도 당에서 어떠한 징계를 받지 않고 넘어간 전적이 있다. 이런 일들은 사실 이번 통진당 주류세력의 행각과 본질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은 행위들이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을 의회주의라고 비판하는 소위 좌파 정치단체들 사이에서도 지난 몇 년 간 이합집산 과정에서 통합진보당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문제들이 무수하게 발생했다. 정당한 문제제기에 대해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정치적 주도권 싸움으로 문제를 왜곡하며, 자기 정파 사람을 무조건 감싸 안고 타 세력을 헐뜯는 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소위 “운동판”에서 매우 낯익은 풍경이다. 

특히 이런 행태들은 성폭력 같은 문제에서 고질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예를 들어 2008년에 벌어진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그 당시에만 반짝 이슈가 되었을 뿐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있다. 

통진당 문제가 터지기 전에 비례대표로 선출된 정진후 후보가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2차 가해자들을 옹호한 전력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지지모임 등은 정진후 후보 사퇴를 요구했지만 통진당은 주류든 비주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운동사회의 많은 조직에서도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문제가 된 주요한 활동가나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 책임회피와 궤변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번 사태에 충격을 받은 것은 통합진보당 주류세력이 보이는 “자기들만이 옳다”고 믿는 폐쇄성과 맹목성, 반성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비난만 난무하며 결과에 대해 평가나 반성은 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를 끝없이 합리화하는 태도는 통합진보당 뿐 아니라 운동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따라서 이번과 같은 사태가 통합진보당 만의 문제이고 우리는 무관하다는 태도보다는 오히려 기존 운동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부족한 민주주의와 폐쇄적 문화


남한의 운동문화는 주로 80년대와 90년대 초에 형성되었다. 현재 운동의 지도적인 활동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활동가로 성장했다. 군사독재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운동사회에는 군사규율과 복종의 내면화에 기반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긴박한 투쟁 속에서 민주주의 의식이나 자발성이 함양될 여유는 없었다. 혼란을 불러오는 민주주의 보다 규율과 헌신, 일사불란한 행동이 강조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욕구가 소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매도되는 개인의 자율성이 들어설 틈이 없는 문화였다. 

90년대 들어서 운동사회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흔히 후일담 문화로 표상되는 집단적인 피해자 경험은 그런 문화가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던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런 군사규율적인 집단주의는 당시의 시대분위기에서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며, 운동사회가 이 나라의 민주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성과로 지난 20여 년 동안 사회전반의 민주의식은 크게 높아졌으며 민주주의를 몸으로 체득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운동사회의 문화가 오히려 소위 일반 대중의 상식과 의식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제기하는 대중의 의식은 현재 사회의 상식이자 선진적인 의식이며, 여기에서 촛불투쟁이나 희망운동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운동문화와 다른 자발적인 개인들의 연대가 나타나고 있지만, 운동사회의 폐쇄성과 비민주성은 이런 새로운 운동과 기존의 운동사회의 결합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냥 부정하고 멸시하다보니 운동사회 내부의 민주주의는 스스로 경멸해마지 않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보다 못한 것이 되고 있다.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않고 다수를 믿고 자신의 입장을 밀어붙이거나 비밀투표의 원리가 보장되지 않는 거수투표로 정파적인 집단투표를 따르도록 분위기를 몰아가는 관행은 운동사회 내에서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이렇게 개인의 최소한의 형식적 권리조차 지키지 않는 운동사회 의 조야한 민주주의가 민주적 의식에 눈뜬 세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번 통진당 사태에서 주류든 비주류든 공히 당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운동가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봉건적 집단주의와 온정주의를 조장하는 것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자기의 이해를 위해 묻고 따지는 것이다. 계급투쟁이라는 것도 자기 이해를 지키기 위한 개인들의 투쟁이 동질적 이해 조건에 있는 집단의 투쟁으로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맑스도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의 성격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고 불렀다. 헌신이니 희생이니 하는 전근대적 가치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가치인 것이다.

물론 군사독재 하의 엄혹한 현실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했고 적들의 탄압을 이겨내기 위해 규율에 대한 엄수가 필요했다. 반체제적인 운동을 하는 세력들은 언제든지 엄혹한 탄압을 당할 위험이 있으며 운동이라는 것의 성격상 이타적 헌신과 희생, 규율적인 측면을 결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비민주적인 조직문화를 가리는 가리개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봉건적 집단주의와 맞물려 민주적 의사결정의 부재로 만들어진 활동가 중심의 폐쇄적인 문화는 외부의 눈에 의해 견제 받지 않는, 비상식적인 조직논리와 정치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많은 활동가들이 입만 벌리면 대중, 대중하면서도 정작 대중의 생각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대중의 눈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통합진보당 주류세력의 비상식적인 행태는 이러한 운동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몇 년 간 주사파라는 낡은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해 온 것은 통진당 주류세력이었다. 이정희처럼 대중적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을 키우고 전통적인 통일운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반값 등록금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등, 주사파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나름 노력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들이 이번 사태로 몽땅 물거품이 되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대중과 만나고자 하는 시도를 표면적인 이미지 문제로만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민주통합당 등은 혁신비상대책위원회를 대표하는 강기갑이 통진당 대표로 당선되지 않으면 야권연대도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선거는 NL(인천) 대 NL(울산)의 대결로 사실상 NL 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이 되고 있다. 

통진당의 가치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통진당을 야권연대에서 내치기 어렵고, 내부에서도 분당을 고려하는 세력은 없기 때문에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통진당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통진당 사태는 상처만을 남긴 채 노동자와 일반 서민들에게 정치 일반에 대한 불신만을 남겨놓을 공산이 크다. 

통진당 사태의 교훈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런 논의들은 대개 통진당에 대한 비판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노동자정당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위기는 보다 근본적인 데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들은 일면적으로 보인다.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기존 운동의 재편성이 아니라 최근 뚜렷하게 싹이 보이고 있는 새로운 주체들의 운동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운동사회의 조직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없이는 새로운 대중운동과 접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운동사회에서는 통진당 주류세력이 보여준 맹목적인 규율과 복종의 문화를 여전히 부러워하는 활동가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사고와 태도를 계속 가져가서는 통진당 사태가 보여주듯이 이른바 “진보”에도 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태영 picollo@jinbo.net


* 주) 이정희, 이석기, 김재연 등이 속한 정파를 언론에서는 보통 당권파나 경기동부연합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당권은 이미 빼앗긴 상태이며, 경기동부연합은 편의적으로 그렇게 부를 수는 있겠으나 그들 주장대로 이미 없어진 조직이고 지금의 주류 세력과 꼭 일치하지도 않기 때문에 적절치 않은 명칭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기사에서는 그들을 통진당 주류세력으로 통칭한다.

  

애국가를 안 부르면 아니 되오?

통진당이 자체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문제제기는 5월 통진당의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쏟아질 때 유시민이 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상규가 애국가를 부를 수도 있다고 답해서 가라앉았다가, 얼마 전 이석기가 기자회견에서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는 발언을 하면서 다시 불거져 나왔다. 

이에 대해 심상정은 6월18일 이석기가 “딴 세상에 사는 것 같다”며 “헌법을 뒷받침하는 국회의원이 국가를 부정하면 공인 자격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으며 통진당 현 지도부는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자신들은 “애국가를 대한민국 국가로 받아들이는 대다수 국민들의 견해와 정서를 존중하고 이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심상정의 발언은 이 사람이 과연 오랫동안 민주노총 지도부를 역임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진영도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운동사회가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은 소위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 맞다. 혹자들에게는 대한민국 정부가 친일, 친미 정권이기 때문에, 혹자들에게는 지배계급의 정부일 뿐이기 때문에 운동사회는 정파를 막론하고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태극기를 무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면 안 되는가? 지배계급의 국가와 국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국민들의 대표로 선출 되서는 안 되는가? 민주주의의 기본은 정치사상의 자유이며 이는 그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이나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애국가 문제는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진지하게 논의해야할 문제이며, 그냥 분위기에 따라 영합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정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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