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젤 연구는 게젤의 언어로

칼럼

1. 게젤 이론은 게젤의 언어로 연구해야 한다. 케인즈나 맑스의 언어로 게젤의 이론을 연구하면 안된다.

의학에 비유하면,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는 생리
physiology에 해당한다. 그리고 케인즈나 맑스가 다룬 것은 병리pathology에 해당한다. 케인즈가 다룬 것은 병든 몸에 스테로이드 같은 대증요법을 가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맑스가 다룬 것은 환자에게 이것저것 장치를 붙이고 몸의 기능을 모두 통제하려는 것이다. 의학에서는 생리가 기준이 되어야 하지 병리가 기준이 될 수 없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케인즈가 자기 책에 '일반이론General theory'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어폐가 있다. 정부가 유효수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일반적'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제질서는 병들어 있다. 그 자체에 결함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게젤 이론을 게젤의 언어로 연구해야 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게젤의 언어가 쉽기 때문이다. 게젤은 독창적인 경제이론을 만들면서 특별히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았다. 거의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로 경제학 전체를 꿰뚫었다. 필자는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천재들의 공통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쉬운 언어로 가장 어려워보이는 주제를 다루는 것. 그래서 경제학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 이게 게젤 경제학의 탁월한 점이다. 필자는 책을 읽다가 지식인들이 자기들만의 은어 만드는 걸 즐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일상어로 할 수 있는 말을 굳이 전문어를 만들어 바꿔쓰는 걸 보면 어렵게 이야기하는 걸 즐기고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런 행위의 뒷편에 자리잡은 건 천박한 허영심이 아닐까? 있는 말 없는 말 다 쳐발라서 빈 껍데기를 요란하게 꾸미려는 것이다. 아니면 진실을 가리려는 것이다. 지혜롭고 진실한 사람일수록 쉽고 간단한 말로 뜻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게젤은 그렇게 한다.

한편, 게젤이 부정한 단어는 게젤 이론을 연구할 때는 쓰면 안된다. 그런 단어는 게젤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게젤은 경제학에서 '가치value'를 부정했다. 그는 가치이론을 부정한다. 가치이론을 쓰면 돈(수요)을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변함없는 내재가치가 있는데 뭘 관리하나? 하지만 돈의 가격은 변동한다. '돈의 순환량'과 '재화의 순환량'의 비에 따라서 변동한다. 그래서 돈의 가격(구매력)은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관리되어야 하며, 그것을 관리하려면 돈을 규칙적으로 순환할 수 밖에 없는 강제조건에 묶여 놓아야 한다. 돈이 돈소유자의 임의에 따라 시장으로 몰리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면 그 가격을 어떻게 관리하겠나?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도 돈은 시장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중앙은행이 돈을 회수해도 쌓여있던 돈이 시장으로 흘러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면 '재화의 순환량'에 대한 '돈의 순환량'을 컨트롤할 수 없고 돈의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다. 이처럼 가치이론을 돈에 적용하면 경제학과 그 실천이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경제학에서 가치는 다룰 수 없고 가격만 다룰 수 있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돈가격은 돈수요와 돈공급으로 결정된다. 돈수요는 상품공급이고 돈공급은 상품수요인데, 여태까지는 상품수요가 불규칙했다. 상품수요는 돈이 구현하는데, 돈순환이 돈소지자 마음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게젤이 살던 시대는 금본위였고, 금본위는 가치이론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것은 "금에 변함없는 내재가치가 있으므로 돈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웃기는 소리. 가치가 아니라 가격만 존재할 뿐이다. 오늘날, 금본위 회귀가능성을 완전히 없애고 돈가격을 안정시키려면 '꾸준한 돈수요'에 맞는 '꾸준한 돈공급'을 구현해야 한다. 돈이 순환될 수 밖에 없어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게젤은 스탬프머니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스탬프머니는 일정주기마다 스탬프를 하나씩 붙여야만 그 돈을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돈을 가진 사람이 그 주기가 닥치기 전에 돈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돈의 (가치가 아니라) 가격을 조절하는데 성공하려면 가치이론을 폐기해야 한다. 따라서 게젤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가치'라는 단어로 게젤 이론을 설명하려고 하면 안된다. 게젤이 부정한 단어로 게젤 이론을 설명하는 것은 모순이다.

예를 들면, 공짜돈을 정의할 때 "돈 가치가 정기적으로 줄어드는 돈"이라고 하면 안될 것이다. "돈 액면가격이 정기적으로 줄어드는 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액면가를 영어로 face-value라고 하는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표현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만, 'face-price'가 경제학적으로는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value는 경제학적으로 정의할 수 없으므로. 그건 윤리학이 다룰 문제다.)

"토지가치세"라는 말도 쓰면 안된다. "토지세"라고 해야 한다. 필자는 지대(와 지대를 자본화하여 나오는 땅값) 말고 다른 토지가치가 있는지 조지스트들한테 묻고 싶다. 없다면 굳이 토지가치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거 가치이론을 읊어대던 사람들처럼 "변함없는 내재가치"를 뜻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사용해서는 안된다. "가치"라는 단어가 경제학에서 그동안 어떤 맥락으로 쓰였고 어떤 혼란을 유발했는지 고려해본다면, 굳이 그 단어를 사용할 까닭이 없다.

"가치를 생산한다"고 해서도 안된다.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가치가 아니라 가격을 얻게 될 것이다.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도 안된다. 게젤의 제안은 돈순환과 땅을 공유하는 것이다.

'가치'라는 말은 모호하다. '가격'이라는 말은 명료하다. 경제학은 명료한 단어로 기술되어야 하고, 더이상 가치라는 단어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필자는 오래 전 맑스주의자들과 토론하다가 그들이 유독 "가치"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걸 발견했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다음과 같은 까닭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기존 경제질서에서 노동은 제 값(가격)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가격"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동자들한테 지금 받고 있는 노동의 가격은 부족하다. 더 받아야 한다. 더 받으려면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한데, 그것이 "가치"다. "원래 노동의 가치는 이만큼인데 가격은 잘못 책정되었다."는 논리다.
(이것은 비단 맑스주의 뿐 아니라 그것에서 영향받은 대부분의 사회운동이 읊조리는 레퍼토리 같다. 예를 들어 슬로우푸드 운동에서는 친환경 지역농산물의 진정한 '가치'를 자본주의는 모른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배경을 이해한다. 하지만 가치를 이야기하면 주관적이 될 수 밖에 없고, 그 가치는 누가 결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의 노동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 내가? 그러면 공정하겠나?

노동자들이 주장해야 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가격"이다. 다만 왜 노동의 가격이 잘 먹고 잘 살기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오르지 않았는지를 살피고, 그 원인이 되는 화폐제도와 토지제도의 결함을 바로잡아야 한다.

 

필자는, 맑스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게젤 연구모임을 만들어서 이 이론을 연구해볼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확신이 서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 보길 바란다. 그저 주어진 경제질서에 대하여 반항하거나 대증요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적인 결함을 바로잡아 새로운 경제질서를 유도하려면 지성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사회유기체의 몸뚱아리에서 발생하는 염증의 일부 또는 그것을 억누르는 대증요법이 될지, 그 염증을 치유하는 힘이 될지는 여러분의 지성에 달려 있다. 여러분은 정부를 전복해서 새로운 정부가 수요와 공급을 통제하거나 부자들한테 세금을 왕창 걷어서 복지에 쓰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나도 기꺼이 그런 방식에 찬성하겠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자는 경제행위의 원동력이 되는 개인의 능동적인 동기를 억제하여 전체 경제의 활력을 감퇴시킨다. 내가 일한 만큼 얻을 수 없다면 아무도 더 열심히 일하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전체 파이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후자는 그 늘어난 복지만큼 지대가 상승하여 그 효과를 상쇄한다. (난 이에 대하여 조지스트들과 얘기해봤는데 그럴듯한 반론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일방적 진술만 늘어놓았다.)

한 가지 더, 게젤을 공부하려면 게젤의 책을 읽어야 한다. 케인즈, 찰스 아이젠스타인, 데이비드 하비 같은 사람들은 게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논문이나 관련 기사도 주의해야 한다. 수십년 묵은 수많은 오해로 범벅이 되어 있다. 게젤을 알려면 게젤의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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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22:43 2016/08/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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