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05 18:54

두 친구 이야기

독일에서 오래 공부하고 돌아온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물건을 줍는 데 고수다. 가구, 그릇, 그림, 장식품, 옷 등 그가 줍지 않는 게 없다. 그는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그걸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 곧 줍게 되니까. 내가 필요하다 싶을 때 꼭 그 물건이 눈에 띄거든” 하고 말한다. 그가 19년 동안 살았던 괴팅겐이라는 도시는 매달 한번씩 물건 버리는 날이 있었다는데, 그가 ‘쓰레기더미에서 물건 고르기’의 고수가 된 것은 여기서부터였다. 기업체를 상대로 컨설팅 일을 하는 이 친구는 이따금 업무상 화려하고 드레시한 옷을 차려입고 나서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벼룩시장이나 쓰레기더미 출신이다. “옷 수선 하는 단골 아줌마만 있으면 돼. 옷감만 좋으면 다 뜯어고쳐주니까.” 그가 아낌없이 돈을 지출하는 품목은 포도주와 여행 정도이지 싶다. 시를 쓰는 친구가 있다. 김우창은 한용운을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라 했지만 이 친구는 풍요로운 시대의 궁핍한 시인이다. 한달에 시 세편을 쓴다면 일년에 36편꼴이고 연봉이 3백60만원인 셈이다. 에세이를 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업시인의 연봉이 1천만 원 넘긴 어렵다. 그는 한 달동네 꼭대기에서 찻길로부터 2백미터쯤 떨어진 2층집의 옥탑방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가난에 찌들었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유이()한 사치는 술값, 밥값 내는 것과 책 사는 일이다. 그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는데, 읽고 나면 대개 남 준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는 “방이 좁아서 쌓아둘 데도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우리가 농담삼아 ‘세상에는 니체를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거나 ‘세상에는 지리산을 종주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을 지어내지만, 정말이지 세상에는 인생의 기준이 자기 내부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이 있다.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힘차게!’를 외치며 달려가는 이 속도전의 사회에서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독자적인 생활방식이야말로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하다. 이 두 사람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1만분의 1에 해당하는, 아니 어쩌면 1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캐릭터다. 우리 사회는 어째 점점 탐욕스러워지는 것 같다. 1%의 부자가 전국 사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편중현상이 심해지는 추세라니, 민주화가 진행됐다고 하지만 ‘평등’ 없는 ‘자유’의 반쪽 민주화였던 셈이다. 욕심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문명의 동력이다. 또한 기회가 없으면 욕심도 없으니, 탐욕은 열린 사회의 특징이다. 서양에서 사람들이 부쩍 탐욕스러워진 건 르네상스 이후라고 하는데, 계급과 부가 세습되고 변화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중세까지 사람들이 순진했지만 계급과 명예와 부가 시장에서 유통되는 근대로 넘어오면서 점점 야심만만해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닐 우드에 따르면, 사회를 분열시키는 악덕이자 저주의 대상이었던 탐욕이 19~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이익’ ‘이윤’ 같은 공명정대한 단어로 거의 교체되면서 존경할 만한 가치로 거듭났다. “억누를 수 없는 탐욕은 저주이며 오로지 현명한 사람만이 부유하다”(키케로)거나 “탐욕은 인류에게 내려진 가장 강력한 저주”(세네카)라고 탐욕을 마음껏 저주할 수 있었던 것도 옛날옛적의 일이다. 지금은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위선자의 덕담처럼 실속 없이 겉돌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바, 탐욕 자체가 자본주의적 심성이기 때문이다. 올 여름은 너무 덥다. 권력을 가지고 부를 거저 얻으려는 자들, 부를 가지고 권력을 사려는 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보내는 여름은 더욱 무덥게 느껴진다. 유난히 더위를 타는 사람들의 ‘마음의 피서’를 위해 두 친구의 이야기를 전한다. -조선희칼럼.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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