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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감

내가 낯설다.
벚꽃이 피면, 매년 봄 가슴이 짠해져,
저 벚꽃 다시는 안 볼테다, 그렇게 다짐을 하곤 했는데
남산길, 버스를 타고 지나거나 걸어가거나
길가에 그야말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에도
나는 아무 감응이 없다.
꽃들이 만개하였는데도 이렇게 시큰둥한
나는, 내가 맞나.
꽃들을 굳이 보려고도 하지 않지만,
어쩌다 보더라도 그냥 하나의 풍경처럼 지나가버리는 것이.
대추리에서는, 날마다 지나다니던 길가에 맨 처음 쑥이 올라오는 것도 발견하고
밭 구석에 흔하디 흔하게 피어나던 손톱만한, 코딱지만한, 깨알만한 꽃들에도
맘이 환해졌던 것에 비하면,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싶게.
저런 것들, 그냥 저렇게 심어놓은 것들.
기다리지도 않았고 사랑하지도 않았던 그런 꽃들.
장난감처럼 진열된 나무와 꽃과 사람들.
대추리에서 나올 때, 마지막으로 한 일은
작년에 밭에 꽂았던 허브들을 캐는 것이었다.
뿌리째, 가지째,
플라스틱 바구니의 바닥을 삽으로 쪼개 구멍을 내고
거기에 소쿠리 쪼가리를 잘라 채를 만들어 구멍을 덮고
그리곤 흙을 퍼담았다.
잘린 허브들을 이식(移植)했다.
의미는 없었다.
우리, 이사가자,
여기 두고 가지 않을게.
그냥 그런 마음만이었던 것 같다.
장기 척출하는 외과의사처럼
가는 혈관들은 잘라내고
살아남고 적응할 수 있을정도로만, 딱 그만큼만
담았다.
그리고 이사를 왔다.
예민한 레몬밤은
결국, 말라죽고
무던한 스피아민트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옥상에 나란히, 그렇게 진열된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대추리가 아니라면 이 곳에서라도
새 삶을 새롭게 피워내야한다고 생각했다.
꺼져버릴 것 같은 몸을 쉬게 하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억척같이 살아내는 저 스피아민트처럼
그렇게 살아내면 될 것 같았는데
시푸르고 퉁퉁하게 자라는 모습이
괴기스러운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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