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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투쟁과 인간성

그러나 기독교적 겸허가 인간 활동에 아무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귀족들에 대한 비천한 사람들의 역사적 투쟁 또는 순수한 사람들에 대한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의 역사적인 투쟁에서 보면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분열을 더이상 견디지 못한 사회는 차라리 한동안 죽은 듯이 취해서 사디스트처럼 분열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도취가 인간의 비참함을 해소시킬 수는 없었으며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될 뿐 증오를 막을 어떤 경계선도 그어지지 않았다. 역사적 혼란을 지배하고 그와 더불어 대중의 끝없는 요구에 해결을 약속하는 유일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대혁명뿐이었다. 인간성이 배제된 인간 형태-지상의 끝, 즉 진흙탕을 사는 인간성-의 창조가 지배자, 착취자들의 일이라면,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가장 단순한 상호성의 법칙에 따라 위대한 어느 날 저녁 소요하는 대중이 외치는 죽음의 외마디가 지배자들의 위선적인 아름다운 말을 덮어버려서 그들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는 일이다. 피투성이의 희망이란 바로 그런 것으로서, 그것은 매일매일의 민중의 실존이며 계급투쟁과 반항적 불복종의 다른 말이다.

 계급 투쟁의 가능한 종착지는 단 하나인데, '인간성'을 멸망시키려고 노력한 자들의 멸망이다.

 

- 조르주 바타이유, <소모의 개념> p, 46,  <<저주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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