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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선언' 이길준 의경, 신월동 성당으로

 
지금 신월동 성당에서 농성 중입니다만,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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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선언’ 이길준 의경 무기농성 돌입
한겨레 | 기사입력 2008.07.27 22:31




[한겨레] 기자회견 열고 "전·의경 폐지"

사복경찰 한때 진입 시도

촛불집회 진압에 투입됐던 의경이 27일 "부당한 시위진압 명령을 거부한다"며 병역 거부를 선언한 뒤 전·의경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서울 중랑경찰서 방범순찰대 소속 이길준(24) 이경은 이날 저녁 7시 서울 양천구 신월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경 복무 중 촛불집회 진압 등의 업무가 나의 신념과 어긋나기에 현역 의경으로서 병역 거부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씨는 양심선언문에서 "애초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에 복무하고 싶어 지원입대한 의경 업무가 생각과 많이 달랐다"며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적개심을 갖고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심한 억압을 느꼈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이씨는 경찰 진압복을 벗는 퍼포먼스를 진행했으며, 신월동성당에서 전·의경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씨의 법률자문을 자처한 이덕우 변호사는 이날 "1995년 합헌 결정을 받은 전투경찰대 설치법은 정치·사회적 변화를 고려해 재심을 받을 필요가 있다"며 "전투경찰대 설치법과 그 모법인 병역법의 위헌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양천경찰서 소속 경찰관 10여명이 사복 차림을 한 채 진입하려다 주최 쪽의 제지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음 '아고라' 누리꾼 등 30여명은 이날 저녁 신월동성당에 모여 경찰 진입을 막기 위한 촛불집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씨는 지난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회견을 열 예정이었으나 이씨 부모들의 만류로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이씨는 이날 "부모님과 이틀 동안 대화를 하며 나의 결정을 이해해주시기로 해 회견장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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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G8]일본에 다녀왔습니다 4

4. 노숙자들과 함께 대안생리대를

대안생리대 만들기 DVD를 10개나 챙겨갔지만 한 동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주면 좋아할 것인가.
일본에도 대안생리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연락처와 약도를 알고 있던 곳은 동경의 IRA라는 조직 뿐.
그러나 포럼 준비로 동경에서의 시간을 다 써버려 결국 IRA에는 접속하지 못했다.
훗카이도로 와보니 일본말은 완전 모르고 영어는 서툴고
어디서 누가 뭘 왜 하는지도 종잡을 수 없이 이틀이 지나가고
사람들과 이렇다할 말을 많이 섞어보지도 못한 채 캠프장에 무작정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놈의 DVD는 다 뿌려야 하는 거 아닌가.
무겁... 다기 보다는 부피가 꽤 되고, 여기까지 가져와서 도로 들고 가려니 왠지 쪽팔리기도 하고
뭔가 그럴 수는 없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10개는 아니더라도 한 5개라도... 5개가 힘들면 2-3사람에게라도...
이런 식이로 자신감 상실 모드로 캠프장을 배회하던 어느 날,
7월 5일 아침, 토오베츠 캠프장 한 구석에서 나는 드디어 심봤다!를 외쳤다.
온갖 아나키 잡지들과 티셔츠, G8 반대 버튼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던 가판에서
회색 표범무늬 면생리대 발견!
내가 그걸 만지작 만지작 하며 자리를 뜨지 못하자 한 일본 활동가가 와서 말을 걸었다.
으흠- 자신이 그걸 만드는 친구들을 안다며.
오호라, 횡재구나! 이렇게 만나는구나 싶어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그가 그 말로만 듣고 이름만 보던 k군. IRA 활동가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본판 면생리대를 구입, 바로 착용에 들어갔다.
그리고 K에게 DVD를 주리라 주리라 했다.

그런데 캠프장을 나갈 때까지도 나는 K에게 DVD를 주지 못했다.
워낙 정신도 없고, 신경쓸 것도 많고. 하여간 그렇게 친구를 놓치고
나는 또 배회모드.
7월 8일날 돌아와야 하는데 5일도 그렇게 흘러가고 말았다. ㅡ,.ㅡ;;
남은 건 돌아오는 8일을 빼고는 이틀.
7월 6일은 토요라 캠프장으로 이동을 했는데
텐트 치고 밥 해먹고 회의하고는 기진맥진이었다.
그런데 K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완전 땡큐! 그에게 DVD를 건네고...
7일엔 필사적으로 DVD를 뿌리고 피자매연대를 알리는 활동에 매진하고저
가방에 DVD를 몇 개 넣어가지고 다녔다. 밥먹을 때, 쉴 때마다 사람들을 만났다.
넌 뭐하니? 난 한국에서 멘스트레이션 패드, 리유저블 코튼...  나프킨 만들어. 이런 식으로 말을 걸고...
역시 생존이 무서운 듯. 영어가 거침없이 튀어나가면서 결국 이 운동에 대해 아는 친구들을 만났다.
일본에서 노숙자들의 블루텐트에서 함께 대안생리대를 만드는 아티스트 겸 활동가 이야기는
일본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듯 계속 회자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에게 DVD를 선물로 돌렸다.
그리고는, 5탄에 잘 설명될 몇몇 친구들, 퍼실리에이터들에게
눈빛으로 우정을 나눈 몇몇 친구들에게 DVD를 돌렸다.
일본에 좀더 남아있을 돕에게도 3장 정도를 넘기고. 그리고 2장의 DVD가 남아있었다.

8일, 아침이 밝아왔다.
캠프장을 떠나긴 해야하는데
어젯밤까지 확인을 하긴 했지만, 훗카이도 외곽인 토요라에서 신 치토세 공항까지
어떻게 하면 잘 갈 수 있을지 먹먹한 상태였다.
그 때, 나오기 직전, 한 친구를 만났다. 이름은 쿄헤이.
토요라 캠프장 오는 버스를 타려 오도리 공원 갔을 때,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나무그늘 같은 데 앉아서 뭘 만들고 있던 친구였다.
내가 이래 저래 해서 여길 가야하는데 어쩌고 했더니, 그는 다른 친구까지 데려와서 인터넷으로 막 알아봐주었다.
덕분에 우린 비행기 시간을 놓치지 않고 올 수 있었는데... 어쨌든
그러면서 통성명하고 소개하다가 내가 피자매고 어쩌고 하니깐 그 친구 매우 반가워하면서
막 어디론가 갔다.
나는 이미 DVD를 손에 들고 있었다. ^^
그 친구는 자신이 퍼블리쉬 하는 사람이라면서 책을 한 권 주었는데
노숙자들과 함께 대안생리대를 만드는 그 여자분이 쓴 책이었다.
자신은 그걸 출판한 사람이고.
내 참! 이제서야 나타나다니...
하여간 그래서 몇 마디 말은 못 나눴지만, DVD를 모두 건넸고
한국에 돌아와 내가 뿌린 DVD에 적힌 이멜이나 홈페이지에 이들이 접속한 흔적이 없나 기다리고 있었다.

당분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피자매연대 홈페이지에 G8활동하고 돌아온 소식을 간단하게 올려두었지만
별 반응도 없고.

며칠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카페를 지키고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대안생리대 만들 재료를 사고 몰드 단추를 박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죽지 않았구나... 하면서 좋아라고 천을 잘라주고는 피자매 홈페이지를 보는데
답글이 달렸다.
쿄헤이.

아 증말, 쌩유 지 뭔가!
아주 입이 헤벌쯕 벌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즉각 영단어를 이리저리 짜집기해 답장을 달았다.

쿄헤이가 알려준 블로그들을 들어가보니
내가 돌아온 7월 8일 새벽에 대안생리대 만들기를 하던 블루텐트에서 사람들이 쫒겨났다고 했다.
G8 때문에, 공원에서 텐트치고 잠자던 노숙인들이 쫒겨난 것이었다.

참,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은거야!
 이 씨$%*#@ 일본정부! 신자유주의!


하여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제 너무 졸려 5탄은 조만간 써야겠다.



Hello,
I am Ogawa Kyohei, a Japanese publisher.

I met Ms. Dion Kim at No-G8 camp and was given the DVD of bloodsisters.
and I am excited by this site, (web-translation-service is useful, so I can understand outline of bloodsisters. "work in 4 hours" is very nice!)

Now I watch the DVD.
It is easy to understand how to make sanitary cotton napkin.
I can see nice technics to make.
Those napkins look so cute.

I published a book about homeless women writing by Ichimura Misako.
(Korean translation of this book will be published.)
I will send the DVD to her.
Maybe the DVD make her glad and is useful for her activity.

She is an artist and live in street as a homeless.
And now Misako make and sell sanitary-cotton-napkins with other homeless women.

'Nora' is the brand name of those sanitary-cotton-napkins made by homeless women.

Nora and Misako has web sites.
target=_blank>http://noratokyo.exblog.jp/

target=_blank>http://bluetent.exblog.jp/


And translation to Korean
target=_blank>http://www.excite-webtl.jp/world/korean/web/?wb_url=http%3A%2F%2Fnoratokyo.exblog.jp%2F&wb_lp=JAKO&wb_dis=2


target=_blank>http://www.excite-webtl.jp/world/korean/web/?wb_url=http%3A%2F%2Fbluetent.exblog.jp%2F&wb_lp=JAKO&wb_dis=2



To Ms. Dion Kim and her friends

I caught have important and exciting comunication.
People coming from other state taught us Japan is a police state.
(Japanese is used to limited freedom.)
I caught feel what is free.

Thank you very much for coming!


Kyototto Publishing
Ogawa kyohei
target=_blank>http://kyototto.com

kyohe(a)kyotot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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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G8]일본에 다녀왔습니다 3

3. 다시 말하기- 대추리와 오키나와

"어... 대추리는... 마음에 상처가 남은 것 같아요."

오랜만에 만난 나카이에게 대추리 다큐멘터리는 언제 만들거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카이와 기쿠꼬를 만나기 전에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울컥하고 말았다.

얼마만에 상처라는 말을 들은 것일까.
얼떨결에 동경 포럼에서 반전/반기지 세션에 참가해 대추리 투쟁을 발표하게 되긴 했지만
내 스스로는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던, 아마 앞으로도 그랬을 이야기.
사실 나는 소주와 평택 사투리와 눈물 콧물로 범벅된 그냥 그런 것에서 단 한 마디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도 낑낑거려서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고 따끔하게 많은 도움들을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싸울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여튼, 신주쿠 역에서 나카이와 기쿠꼬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 속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만나고 싶었던 것이 확실했다.
나카이는 자신이 10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온 것을 알아달라고 농담처럼 건냈지만
그렇게 만났으니 할 말은 많았다.
만나서 적당한 밥집을 찾는데만 40분을 보낸 것이 너무 아까웠을 정도로.
도토루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면서
서로의 안부와 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리  메일을 주고받은 덕에, 나카이가 필리핀의 정치적 살해에 관한 tv 다큐물을 제작중이라는 것,
기쿠꼬가 결혼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나카이는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하나는 그 tv 프로그램 dvd, 하나는 기쿠꼬 결혼식 촬영 편집한 dvd.
참으로 나카이다운 선물이라 할 밖에.
나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요 며칠간 급하게 편집하고 만들었다고 했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었다.
그리고 함께 오신 일본 사진작가분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오키나와를 비롯한 현장의 사진들을 찍고 전시를 하시는 분이었는데
대추리에도 몇 번 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 찍었던 사진들을 실었던 잡지를 보여주셨다.

현재 오키나와는 신기지 건설 때문에 상황이 급박하다고 했다.
헤노코 투쟁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주민들이 반대하니까 다른 곳으로 기지부지를 다시 선정했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그곳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직접행동으로 기지건설을 막기 어려운 곳이라고 했다.
바다와 기지의 배치에 대해 손으로 요리조리 막아가면서 설명을 해주셨는데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지 안쪽에 신기지를 짓는 거라서 어떻게 막아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 한국에 와서 자료를 뒤지다 알게 되었다.
아휴- 씨*$&(%^@# 미군기지.

대추리 투쟁이 끝났다고 말한 적이 있던 입이 미웠다.
한 친구는 당신의 투쟁이 끝난 것이라고 수정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뭔가가 끝난다는 것을 경험하기엔 내 삶의 이력이 너무 짧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키나와 상황으로부터 대추리가 다시 내 안에서 달구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내가 사는 이야기도 했다.
연구실에서 공부를 한다고.
나카이는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잠시 입을 다물다가, 잘 모르겠다... 당분간은 이렇게 공부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고,  나도 상처가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자꾸 공부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카이와 기쿠꼬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살짝 울고나서 두려움이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포럼 발표문을 좀더 수정하고 통역하는 친구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자
그 친구들은 함께 있어주었다. 그리고 내 발표문과 그것의 일본어 번역에 대해 몇 가지 코멘트를 해주었다.
모두들 진지하게 발표 준비를 함께 해 주었다.
단어 하나, 문맥 하나까지 꼼꼼히 짚어주고 코멘트 해주고.
밤새 사진편집을 도와준(거의 도맡아 해준) 낙타는 적확한 표현들을 배우려 녹음기를 꺼내놓기도 했다.
정말 발표 하나에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달라붙어주는 것이 고마웠다.
나카이는 내가 발표할 때 질문할 거라면서 특유의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내게 이런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발표장에 도착하자 좀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오키나와 현장에서 오기로 했던 발표자는 끝내 오지 못했다.
발표자는 나와 또 한 분.
peace depot에서 현장조사 등 연구활동을 하는, 반기지운동 30년을 하셨다는 노장 학자.

어쨌거나,
발표를 마치고 연구실 사람들과 함께
나카이, 기쿠꼬, 사진작가분 모두 술집에 갔다.
거기서도 우리는 긴 긴 이야기를 했다.
나카이에게 왜 발표 때 질문하지 않았느냐고 또 장난스럽게 묻자
쑥스러웠다고... 그리고는 디온다운 발표였다고 코멘트해주었다.
기쿠꼬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웃고 울고 떠들면서 얼굴이 벌개지도록 술을 먹었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지킴이들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그리고 그저께 서울에서 몇몇 지킴이를 만나 또 술을 푸면서 얘기했다.
진관장은 이랜드 노동자 인터뷰 책을 냈고
두시간은 인근 청소년 수련장에서 논술 선생을 하고 있고
일자는 아직 대추리 필름을 편집중이고
준호는 방효태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길'이라는 다큐를 냈다.
준호에게 다큐 dvd를 강탈해와서
어젯밤 나카이가 준 2개의 dvd와 준호의 영화를 보았다.

어제는 김 뭐시기와 대추리와 인권활동가들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었다.
대추리는 감당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묻고 있어서 가끔은 홱 돌아서는 것으로 모자라
땅 속으로 꺼져버리고 싶게끔 만드는 게 있다.
역시나, 사는 게 단순하지 않다.

다음 주에는 네모 군대 환송식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평화바람도 궁금하고 또 누구도 궁금하고 또 누구도 궁금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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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G8]일본에 다녀왔습니다 2

2. 시위대의 스타일 - 코스프레, 블랙 블록 그리고 삼보일배

자신들의 정치색은 그들의 주장, 말, 행동에서도 나오지만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해 하나의 스타일이라고 규정해야 될법한 것들이 확 눈에 띄었다.
그들도 나에게서 어떤 스타일을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몇몇 그룹들은 의상과 사운드에서부터 확실한 스타일을 보여줬다.
간지가 좔좔... 그보다는 어떤 독특한 에너지가 뿜어져나온다고나 할까.

7월 5일 삿뽀로에서의 시위 동영상이 어딘가에 돌랑가 모르겠지만
그냥 눈으로만 보더라도 그 스타일은 명확했다.




까맣게 온몸을 칭칭감고 큰 소리로 리드미컬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작은 북 등을 두들기거나 행진하는 사람들,
만화 주인공처럼 코스프레를 하고 나와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만드는 사람들,
나처럼 약간 어정쩡한 편한 복장의 얼굴을 가린 사람들,
거대한 퍼핏(종이인형)을 매고 가면을 쓰고 경찰들을 우롱하는 사람들,
고양이 분장을 하고 음악을 연주하던 내 친구들.




하여간, 그간의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투쟁들에서처럼 몇 만,
몇 십만의 시위대들은 모이지 않아 아쉬움도 많았지만,
각국에서 모여든, 일본에서 함께 한 2-3천여 시위대가
그 나름대로 시끌벅쩍하고 화려찬란하게 거리를 장식해갔다.
이들의 스타일은 확실히 한국의 촛불시위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는 또 다른
어떤 질감을 갖고 있었다.
함께 걸으며 소리치면서 만난 그 그룹들 중에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가장 선두에서 메탈 음악을 크게 튼 트럭 뒤를 함께 가던
펑크족들. 흑적기를 들고 가던 사람들.




블랙 블록 사람들의 그 스타일에 반해버렸고
그렇게 춤추고 외치면서 차선을 넓혀가는 모습은 짱 멋졌다.
시위대 중간을 가로지르던
가볍고 발랄한 듯한 코스프레 복장을 한 일본언니들에 경악했으며
거대한 퍼핏들의 코믹한 제스쳐들도 경찰을 우롱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아주 유효해보였다.
전체적으로 그날 조용하던 거리는 이들의 포스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거리에 사람들도 신기해하며, 또 유쾌하게 우리를 쳐다봤고
방패 뒤에 선 간부급 경찰들도 시위대를 구경하다 손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웃기도 했다.





윈저 호텔 근처의 캠프장으로 옮겨갔을 때,
한국에서 온 사람들도 뭔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제안에
촛불을 들고 플랭카드를 들고 시위도 했는데, 이것도 하나의 스타일일 듯.
7월 8일 행동에 대해, 최대한 호텔 근처에 가게 되면 그곳에서 삼보일배를 하자고 제안을 했었는데
당일 아침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어서 친구들이 잘 했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스타일에 대한 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봐야 알 것이다.
크흐... 다음에 집회 때는 뭔가 좀더 난동을 피워야 할 것 같다는.
거리에 표정을 어떻게 만들건지 많은 힌트들을 얻어온 것 같다.
한국 상황에서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쪽팔림을 당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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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G8]일본에 다녀왔습니다

6월 29일 일요일에 일본으로 떠나 7월 8일, 그저께 서울로 돌아왔다.
하루가 3-4일은 되는 듯한 빡빡한 일정들을 소화하면서 생에 첫 일본행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은 금새 깨져버렸지만,
동경에서의 발표, 그리고 회담장 근처에서의 회담반대 투쟁들을 조직하는 과정들은
그만큼의 밀도와 강도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열흘간의 일정을 대충 정리하면
6월 29일 도쿄에 도착,
7월 1일 G8 반대 포럼에서 대추리 투쟁에 대한 발표,
그리고 7월 2일 훗카이도로 이동해 포럼에 참석,
7월 4일 토배츠 캠프, 7월 5일 삿뽀로 시내에서의 큰 집회,
7월 6일부터 8일까지 소베츠 캠프에서의 회의와 대안마을 구성 등이 될 것이지만
좋은 사람들, 다양한 운동 문화들을 접하고,
혼자 고민하던 몇몇 주제들에 대해 내 나름의 고비들을 넘었다는 생각도 든다.
돌아오자마자 빨래들을 하고, 텐트와 짐들을 정비하고
연구실에 나와 사람들과 세미나도 하고 이야기 봇다리를 풀고 있는데
아직 여독이 다 풀리지 않아, 계속 잠만 쏟아진다. 책도 잘 안 읽히고.

그래도 보고 느낀 거는 정리를 해둬야겠지?



1. 일본에서 테러리스트 되기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미리 출발한 연구원들과 활동가들이 일본 공항에서 억류되거나 추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헐. 도대체 이진경, 고병권 선생님은 왜 잡힌 것일까.
8시간이 넘도록 공항에 잡혀 심문을 받은 이야기를 듣고,
나와 동행인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서 촛불집회 때 받은 찌라시들을 함께 들고 촛불시위를 하자고 제안하려 했기 때문에,
김포공항에까지 찌라시와 자료들을 들고 갔지만,
세관검사 때 G8관련 문서가 발각되면 저렇게
억류, 혹은 추방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공항에서 연구실로 다시 자료를 반송시켜버리고.

그리고 일본행. 일본 공항에서는 감시와 검문이 삼엄했다.
너무나 친절하게 얼굴 사진에, 지문까지 받아내는 저들. 배알이 꼴렸지만 어쩌랴.
철저히 관광객 모드로 이 모든 굴욕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마지막 세관검사를 할 때, 우리들의 짐이 관광객치고는 너무 컸던지라
그 직원이 질문을 던졌다. 산에 가시오? 후지산에?
몇 마디로 대충 때워 넘겼는데, 가방 보여달라고 하더라...
자료들 반송시키길 잘 했다... 결국 무사 통과.
밖에서는 마중나온 친구가 거의 울듯이 반가워했고, 억류될까봐 많이들 걱정했다고 했다.

어쨌든 이렇게 들어가는 일부터가 일이었다.
사방에 경찰들이 군데군데 있고.
그래, 우리 테러리스트다. G8반대하러 우리가 왔삼. 속으로 외치며
어정쩡하게 관광객 행세를 했다. ㅡ,.ㅡ;;

삿뽀로로 갈 때에도 큰 배낭과 텐트 때문에 의심받을까 살짝 조마조마 하였지만
잘 통과.
삿뽀로에서 토배츠 캠프 갈 때, 여경들이 따라붙었다는 것인데
그냥 무시해줌으로써 이 역시 통과.
근데 너무 웃겼던 것은,
캠프장 근처 역에서 내려서 둘러보는데,
개찰구 앞에 흰 수트를 입은 한 사내가 수첩을 들고 뭔가를 적더라는 것이었다.
아니, 저건 명백한 정보과 형사.
너무도 드러나게 뭔가를 적고, 우리 일행을 따라와 사람들을 쳐다보는데, 약간 어이가 없었다고나 할까, 귀여웠다고나 할까.
일본 사람들은 그런 형사들에게 가서 따지거나 물리력을 행사하거나 하지 않고
그냥 자기네 일들을 하더라는 것도 약간 놀라운 모습.
일본의 시위대도, 그리고 경찰들도
협상범위 이외의 것을 시도하거나 경험해본 적이 너무도 오래되었거나,
그런 적이 없는 듯 보였다.
다른 나라에서 온 활동가들이 조금 과격한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그런 활동을 하려할 때 일본 활동가나 조직가들이 낯설어하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들에서
그냥 유추할 뿐이긴 하지만.

가장 큰 집회였던 삿뽀로 시내에서의 시위 때, 찌라시를 높은 빌딩에서 뿌려보고자 했으나
일본 활동가들인 한 할아버지뻘 아저씨께서는
그건 일리걸 하다.. 불법이다. 너무 위험하다, 연행될거다, 걱정된다 했었는데
내가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재밌을 거다 했지만, 사방에서 말리는 모습들.
물론 준비도 부족하긴 했지만, 상황 자체가 당최 적응이 되지 않았었다.
이후 법적인 내용을 알고 나서 그들의 반응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일본인의 경우 한 번 연행되면 최대 23일까지 구금이 가능하고,
그 사이에 변호사 외에 접견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48시간 내에, 그것도 하루 3번까지 외부인과의 면회가 가능한 반면
일본에서는 일단 잡히면 23일동안 외부와 완전히 고립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거의, 집회 시위의 자유는 엄따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니 이후에도 일본 조직자와 시위자들은 계속 경찰의 허가 유무에 따라 활동을 제한하게 되었고, 다른 나라에서 온 활동가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언쟁을 하기도 했다.
연행의 위험성이 커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시위 조직자들이 내부검열하는 상황이 되니
일본이 경찰국가라는 말이 실감이 갔다.
한국에서 온 한 미디어 활동가의 말,
“한국의 집시법이 자유롭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일본에는 다시 오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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