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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니시카와 나가오, 역사비평사, 2009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니시카와 나가오, 역사비평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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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은 우리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화제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다른 문화나 사람과의 부딪힘에서 오는 긴장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네이션'이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다. 정체성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주장하는 문제일때 ‘국적’은 우리가 가장 손쉽게 또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준비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이름은 정말 나를 규정지을 수 있는가? ‘한국인’이란 가면은 정말 나일 수 있는가? 나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석연찮음의 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동안 아무런 인식 없이 이미 주어져 있던 "한국인"이라는 이름 안으로 숨어버리곤 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며, 진실된 삶을 살고 싶은 - 그런 삶이란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 몸부림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한번도 내셔널리즘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 본 적이 없는 나이지만, 이것에 대한 나의 고민은 결코 가볍지도 녹록치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고민은 차치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리는 것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유치하고 지루하고 또한 단순하며, 세상을 보기 좋게 정리해주는 ㅡ 색안경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마는 ㅡ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그렇듯이, '허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가진 손쉬움과 편리함 때문에 그것의 단순함과 허구성을 눈감아 버린다면, 내셔널리즘이라는 논리에 일정한 부분을 내어준 우리의 삶 역시 특별할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자유가 결핍'된 삶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어쩐지, 다시 개인적인 감각의 이야기로 돌아와 버린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

그동안 한국 저자들의 내셔널리즘에 관한 책을 읽어오면서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이 책들은 내셔널리즘을 부정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실은 그 반대의 결론들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내셔널리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꼭 정해진 도입부처럼 거론되곤 하는 ㅡ 혹은 이 논쟁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식의 어중간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여주는 ㅡ '번역 문제'에서도 들어난다. 위키백과의 한국 내셔널리즘 페이지에서 이 시원찮은 논쟁의 단면을 찾을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내이션을 '국가'와 '민족' 어느 쪽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혹은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을 다른 범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짧은 토론글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를 따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이 이야기는 꽤나 그럴듯하다. 번역의 어려움이나 역사적인 이유, 일본어를 그대로 차용함 따위의 여러가지 근거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속사정은 항상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이 이미 우리의 사회를 세울 때에 기본 재료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기엔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구의 '민족주의'와 프란츠 파농의 '민족주의'를, 한마디로 말해 "식민, 제국주의의 저항에서 필연적으로 시작된 긍정적인 통합의 논리"를, 함부로 나쁘다고 매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어느 정도 '저항의 흐름'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가 내셔널리즘을 다룰 때,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내셔널리즘을 나누어서 생각해야 하며, 그것들은 각자 다른 이름을 가져야할 정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논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 민족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심리 자체가 내셔널리즘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동안 이러한 나의 생각에 권위를 붙여줄 고마운 책을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니시카와 나가오의 이 책에서 그야말로 속 시원한 문단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112P) 일찍이 좋은 원폭과 나쁜 원폭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좋은 내셔널리즘과 나쁜 내셔널리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의도로, 어떤 민족에 의해 만들어졌든지 국가는 국가이고 국가로 가능하기

       때문에 국가 간에 영속적이고 진정한 연대는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후발국의 내셔널리즘은 선진국의

       내셔널리즘을 뒤집은 것 혹은 약간 손질한 것으로서 결국 똑같은 내셔널리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30

       년의 세월에 걸쳐 증명해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내셔널리즘이 좋은 표정을 보이면서 기대를 품게 했던 역

       사적인 시기가 있었다. 프랑스혁명의 한 시기, 메이지의 한 시기, 혹은 열강의 제국주의적 지배로 고통 받

       는 제3세계의 저항으로서의 내셔널리즘 등. 그러나 이들의 좋은 내셔널리즘은 내셔널리즘 그 자체의 내

       적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쁜 내셔널리즘으로 전화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 아니었던가.

그의 이러한 전제는 <아시아 국가들을 연결시키는 연대의식은 민족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국민통합의 곤란함에 직면해서 '민족' 대신 '에스니시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해도, 사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서도 잘 들어난다. 민족주의는 아시아를 연대시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우리는 “동양의 민족주의와 서양의 제국주의적인 폭력의 그것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원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름과 모양을 바꾼다고 해도 그 ‘내적논리’는 변하지 않는다. 내셔널리즘의 긍정성을 바라보는 일은 좋은 핵폭탄과 나쁜 핵폭탄을 구분하려 애쓰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내셔널리즘은 통합의 이데올로기이며, 통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 배제의 논리가 내셔널리즘에 내재되어 있다. 나가오의 말처럼 이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는 한 ‘이상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좋은 내셔널리즘도 '필연적으로' 나쁜 내셔널리즘으로 전화해 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현재 좋은 내셔널리즘과 나쁜 내셔널리즘을 나누려고 애쓰고 있는 논의 자체를 재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읽어 정확히 어떤 구절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서경식의 책들과, 연세대의 국어국문학과 교수라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저자의 책들을 읽으면서 나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 확실히 이런 부분이었던 것 같다.

*

그러나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내셔널리즘이 통합의 논리라면 한국에는 여전히 "통합"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그것이 악으로 진화해 나갈 것이라고 해도, 현재의 필요성에 의해 그것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것은 북한과 남한이라는 한국의 상황 때문이다. 나에게는 통일을 바랄 간절한 이유가 없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회의 자유를 가로막는 ㅡ 모든 논의를 막아버리는 ㅡ 떠들고 싶은 우리들의 입을 닥치게 만드는 ㅡ 분단의 논리가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상황을 극복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의 지성이란 명함을 내건 사람들이 내걸었던 통일의 전제란 '한민족'이라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흡수 통일이니, 무슨 통일이니 이름은 많았지만 통일을 해야하는 이유는 한민족이라는 연약하고, 이제는 낡은 정당성 만을 가지는 그것 아니었던가. 심지어 이것은 내셔널리즘의 언어가 아닌가. 그렇다면, 만약 내가 지금 이 '긍정적'이라는 내셔널리즘까지 부정해버린다면, 이제부터 나는 무엇으로 통일의 논리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민족이 부정된다면 통일의 이유조차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새로운 근거를 창출해 내야 하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눈을 돌려야만 하는가.

*

한편, '긍정적'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작은 전제였을 뿐이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단어 '문화'와 문명'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이 단어들이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는 추적하는 과정으로부터, 그것의 이데올로기성을 추론해낸다.  "내셔널리즘은 문화 속에서 생존을 이어나가고 있다. (...) 내셔널리즘은 '민족'으로부터 도주하여 '문화' 속에 몸을 감췄다. (...) 문화란 내셔널리즘 최후의 보루이다."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이 저자는 이 단어들이 내셔널리즘의 언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근대의 국민국가가 프랑스 혁명에서 부터 시작되었던 것처럼, '문명'이란 말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문화'는 문명이라는 단어를 의식하며 프랑스에 대항에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싶었던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단어다. 저자는 일단 '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지역과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지역의 대립을 단어 의미의 대립과 연결시키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흰색과 검정색이라는 반의어가 실은 색깔이라는 하나의 범주아래 묶이듯이, 이 두 개념은 의미상에 있어서 분명 대립되는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단어들인 것이다. 그 후에도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항상 붙어 다니며 이 단어들은 때로는 혼용되어 쓰이고 때로는 다른 역할을 수행했지만 위치에 따라서 쉽사리 서로의 역할을 교환할 수 있었던 개념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명이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문맥 속에서, '문화가 개별주의를' 주장하는 문맥 속에서 사용되었으나, 보편주의든 개별주의든 근대국민국가의 시각이었으며 그것은 곧 내셔널리즘의 언어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자의 논리는 보편주의 형태를, 그에 대항하는 약자의 논리는 개별주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

     나 이 관계는 약자가 강자로, 혹은 강자가 약자로 전화하면 곧바로 역전될 것이다. (...) 문화 = 개별주의를

     고집했던 독일 제국이 나치즘을 거쳐 보편주의로 뒤바뀐 역사, 혹은 개별주의로 출발한 일본제국이 청일

     러일 전쟁을 거쳐 마침내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하면서 보편주의로 변모하려 했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명이 쓰였던 '보편주의의 맥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문명은 애초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사용되었던 단어로, 왕정을 부정하고 '국민'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나라의 수준을 측정할 잣대가 되어 세계의 나라들을 침략해도 되는 나라, 침략 당해야 하는 나라로 나누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만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보편'의 가치였던 문명이 곧 시대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국제법은 문명 - 반개 - 미개로 3분되어 있었고 ㅡ나는 이 '반개'라는 단어가 무척 재미있다. ㅡ 이 기준에 의해 줄세워지고 짝지어진 나라들은 식민지를 가질 수 있는 나라, 식민화되어야 하는 나라라는, '제국주의'의 논리속으로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관계 속에서 대등한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국가로 인정받아야만 했

     다. 근대적인 국가의 형성이란 다른 근대적 국민국가와 동일한 원리를 공유하는 것이며, 그 동일한 원리가

     바로 '문명'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문명'이란 그 나라가 근대국가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리

     고 이러한 '문명' 이해는 그 시대 국제법의 특질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근대 국제법에서는 유럽적인 문명국

     만 국제법상 주체인 주권국가로 간주되었고, 미개하거나 반미개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혹은 그에 개입할 권

     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류의 진보를 믿었던 콩도르세의 책에서 사용되었던 문명의 개념, 국제법의 창시자인 그로티우스가 가지고 있었던 제국주의적 시각, 후에 마르크스의 인도론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에서 문명이란 단어의 이러한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

우습게도 '문명'이 국가의 성립의 중심 요소였고, 국가들을 줄 세우는 데 사용된 단 하나의 기준이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도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제국의 시대와 이제는 전혀 다른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는 우리들에게도 '나라줄세우기'의 관습은 여전히 쟁쟁하며, 그 기준이 되는 가치는 여전히 유일의 권력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바로 '경제력'이라는 기준 말이다.

*

'문화'는, 프랑스에 대항할 개념이 필요했던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문명에 反하여 만들어낸 단어이다. 문명이라는 단어 안에서는 내셔널리즘이 '제국주의'와 동반되어, 혹은 보조되어 쓰이고 있다면, 문화에는 조금 더 내셔널리즘 적인 성격이 뻔뻔하게 드러나는 듯 하다. 초반에는 '문명'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던 문화는, 칸트와 피히테를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개별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노라면, 나는 역시 내셔널리즘이란 "저항의 이데올로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개별이라는 것은 보편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에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 서평을 시작하면서 말했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와 닿아있다. 각 인간집단들이 세계 속에서 혹은 다른 나라들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규정할 것을 요구하는지, 혹은 “규정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인 것이다. 정의니, 규정이니, 한계니 통합이니 하는 것들은, 어쩌면 언어의 불완전함과, 그 애매함에서부터 출발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충분히 흥미로운 질문이기는 하나, 우선 이 글부터 끝내야겠다.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우선 칸트를 보자. 저자가 문화라는 단어가 '칸트를 거쳤다'라고 한 것은 곧 문화 개념의 개념을 칸트가 차용해 자신의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논의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세계시민주의에서 또 다른 내셔널리즘의 형태를 읽어낸다.

     "세계시민주의라는 입장에 주목한다면, 거기에서 국가를 틀로 삼는 문명 혹은 문화라는 개념에 의해 국가

     에고이즘을 비판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길을 찾고자 하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 공통의 패러독스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 새로운 형태의 국가(국민국가)와 내셔

     널리즘으로 가는 길을 지향했던 것이다."

문화의 '내셔널리즘'적인 속성은 피히테를 거치면서 확실한 방향을 잡게 된다. 그것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익숙한 제목의 저서를 통해 드러난다. 피히테는 '독일 국민의 우수성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독일 국민의 유구함과 민족으로서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독일어의 순수성과 결부'시켰다. 물론 피히테 자체가 내셔널리즘적이었다기 보다는 그 후에 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내셔널리즘적 요소가 강조되었다는 저자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한다.

*

책의 제목은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이지만 저자는 사실 그 방법에 대해 설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무책임하게도 국민을 그만둔 뒤에는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알수 없는 것을 억측으로 꾸며 이야기 하지 않고, 알수 없으니 알수 없다고 말하는 이런 태도에 나는 오히려 호감을 느낀다. 1930년대에 태어나 '나이 먹음'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노학자의 이런 태도에는 고개가 숙여지고 마는 것이다.

다만 책의 초반부에서 문명과 문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대해 유럽을 무대로 해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전개해나가던 생각들이, 그 최근의 발전과정을 분석한 후반부에서는 '일본'에 국한되어 서술되고 있어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식민지배로 인해 '저항의 가치'에 매료된 다른 나라들로 그 시각을 넓혀 나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들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의 민족분쟁들과 저자의 논의를 접합하는 것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다. '문명'과 '문화'에 관한 저자의 분석은 최근에는, 일본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분석인가 아니면 전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분석인가. 즉 이제 문화와 문명이라는 단어는 정말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실제적인 대상을 가르키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보통 내셔널리즘을 논의하는 책들은, 내셔널리즘 그 자체에 갇혀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접합점이나, 공유되는 속성들 같은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가곤 하는데, '세계주의'에서 끌어낸 '내셔널리즘'에 대해 생각하도록 독자를 이끌었던 부분도 좋았다. 여러모로 읽기에 즐거운 책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생각들을 나열했더니, 서평을 쓰기보다 다듬는데 적잖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니시카와 나가오가 반복해 인용하는 루소의 글로 급했던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라는 루소의 문학적인 표현은 한번쯤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여기서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이라는 것은 아마도 나와 저자에게는 내셔널리즘이, 누군가에게는 국가의 권력이 또는 때로는 종교가 될테다. 그 꽃장식이라는 것은 쇠사슬을 보조하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게 혹은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구절인 것이다.
 
    
"정부와 법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안전, 행복에 필요한 것을 주는 데 비해, 학문 문학 예술은 그만큼 전제

     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훨씬 강력한 것이고,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 인간이 그 때문

     에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자유의 감정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만들어

     이른바 세련된 국민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욕구가 왕좌를 축조하고 학문과 예술이 그것을 강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자의 논리는 보편주의 형태를, 그에 대항하는 약자의 논리는 개별주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

     나 이 관계는 약자가 강자로, 혹은 강자가 약자로 전화하면 곧바로 역전될 것이다. (...) 문화 = 개별주의를

     고집했던 독일 제국이 나치즘을 거쳐 보편주의로 뒤바뀐 역사, 혹은 개별주의로 출발한 일본제국이 청일

     러일 전쟁을 거쳐 마침내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하면서 보편주의로 변모하려 했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명이 쓰였던 '보편주의의 맥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문명은 애초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사용되었던 단어로, 왕정을 부정하고 '국민'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나라의 수준을 측정할 잣대가 되어 세계의 나라들을 침략해도 되는 나라, 침략 당해야 하는 나라로 나누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만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보편'의 가치였던 문명이 곧 시대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국제법은 문명 - 반개 - 미개로 3분되어 있었고 ㅡ나는 이 '반개'라는 단어가 무척 재미있다. ㅡ 이 기준에 의해 줄세워지고 짝지어진 나라들은 식민지를 가질 수 있는 나라, 식민화되어야 하는 나라라는, '제국주의'의 논리속으로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관계 속에서 대등한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국가로 인정받아야만 했

     다. 근대적인 국가의 형성이란 다른 근대적 국민국가와 동일한 원리를 공유하는 것이며, 그 동일한 원리가

     바로 '문명'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문명'이란 그 나라가 근대국가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리

     고 이러한 '문명' 이해는 그 시대 국제법의 특질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근대 국제법에서는 유럽적인 문명국

     만 국제법상 주체인 주권국가로 간주되었고, 미개하거나 반미개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혹은 그에 개입할 권

     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류의 진보를 믿었던 콩도르세의 책에서 사용되었던 문명의 개념, 국제법의 창시자인 그로티우스가 가지고 있었던 제국주의적 시각, 후에 마르크스의 인도론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에서 문명이란 단어의 이러한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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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문명'이 국가의 성립의 중심 요소였고, 국가들을 줄 세우는 데 사용된 단 하나의 기준이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도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제국의 시대와 이제는 전혀 다른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는 우리들에게도 '나라줄세우기'의 관습은 여전히 쟁쟁하며, 그 기준이 되는 가치는 여전히 유일의 권력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바로 '경제력'이라는 기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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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프랑스에 대항할 개념이 필요했던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문명에 反하여 만들어낸 단어이다. 문명이라는 단어 안에서는 내셔널리즘이 '제국주의'와 동반되어, 혹은 보조되어 쓰이고 있다면, 문화에는 조금 더 내셔널리즘 적인 성격이 뻔뻔하게 드러나는 듯 하다. 초반에는 '문명'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던 문화는, 칸트와 피히테를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개별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노라면, 나는 역시 내셔널리즘이란 "저항의 이데올로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개별이라는 것은 보편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에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 서평을 시작하면서 말했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와 닿아있다. 각 인간집단들이 세계 속에서 혹은 다른 나라들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규정할 것을 요구하는지, 혹은 “규정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인 것이다. 정의니, 규정이니, 한계니 통합이니 하는 것들은, 어쩌면 언어의 불완전함과, 그 애매함에서부터 출발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충분히 흥미로운 질문이기는 하나, 우선 이 글부터 끝내야겠다.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우선 칸트를 보자. 저자가 문화라는 단어가 '칸트를 거쳤다'라고 한 것은 곧 문화 개념의 개념을 칸트가 차용해 자신의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논의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세계시민주의에서 또 다른 내셔널리즘의 형태를 읽어낸다.

     "세계시민주의라는 입장에 주목한다면, 거기에서 국가를 틀로 삼는 문명 혹은 문화라는 개념에 의해 국가

     에고이즘을 비판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길을 찾고자 하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 공통의 패러독스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 새로운 형태의 국가(국민국가)와 내셔

     널리즘으로 가는 길을 지향했던 것이다."

문화의 '내셔널리즘'적인 속성은 피히테를 거치면서 확실한 방향을 잡게 된다. 그것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익숙한 제목의 저서를 통해 드러난다. 피히테는 '독일 국민의 우수성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독일 국민의 유구함과 민족으로서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독일어의 순수성과 결부'시켰다. 물론 피히테 자체가 내셔널리즘적이었다기 보다는 그 후에 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내셔널리즘적 요소가 강조되었다는 저자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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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은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이지만 저자는 사실 그 방법에 대해 설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무책임하게도 국민을 그만둔 뒤에는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알수 없는 것을 억측으로 꾸며 이야기 하지 않고, 알수 없으니 알수 없다고 말하는 이런 태도에 나는 오히려 호감을 느낀다. 1930년대에 태어나 '나이 먹음'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노학자의 이런 태도에는 고개가 숙여지고 마는 것이다.

다만 책의 초반부에서 문명과 문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대해 유럽을 무대로 해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전개해나가던 생각들이, 그 최근의 발전과정을 분석한 후반부에서는 '일본'에 국한되어 서술되고 있어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식민지배로 인해 '저항의 가치'에 매료된 다른 나라들로 그 시각을 넓혀 나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들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의 민족분쟁들과 저자의 논의를 접합하는 것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다. '문명'과 '문화'에 관한 저자의 분석은 최근에는, 일본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분석인가 아니면 전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분석인가. 즉 이제 문화와 문명이라는 단어는 정말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실제적인 대상을 가르키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보통 내셔널리즘을 논의하는 책들은, 내셔널리즘 그 자체에 갇혀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접합점이나, 공유되는 속성들 같은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가곤 하는데, '세계주의'에서 끌어낸 '내셔널리즘'에 대해 생각하도록 독자를 이끌었던 부분도 좋았다. 여러모로 읽기에 즐거운 책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생각들을 나열했더니, 서평을 쓰기보다 다듬는데 적잖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니시카와 나가오가 반복해 인용하는 루소의 글로 급했던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라는 루소의 문학적인 표현은 한번쯤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여기서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이라는 것은 아마도 나와 저자에게는 내셔널리즘이, 누군가에게는 국가의 권력이 또는 때로는 종교가 될테다. 그 꽃장식이라는 것은 쇠사슬을 보조하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게 혹은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구절인 것이다.
 
     "정부와 법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안전, 행복에 필요한 것을 주는 데 비해, 학문 문학 예술은 그만큼 전제

     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훨씬 강력한 것이고,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 인간이 그 때문

     에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자유의 감정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만들어

     이른바 세련된 국민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욕구가 왕좌를 축조하고 학문과 예술이 그것을 강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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