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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2 - 소유냐? 존재냐? (2)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생존을 위해 적당한 이기적 본능을 갖고 있다. 윤리나 질서, 규범 등의 사회 형성 체계들도 이 본질 위에서 구성되는 공존계 형식일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를 통해 이기적인 소유양식에서 초월적인 존재양식으로의 진화를 제시하고 있다.

생존의 기제인 이기주의가 과연 나쁜 것일까? 소유는 배덕이 되는가?
그렇다고도 할 수 없지만 또 명확하게 아니다라고도 할 수 없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유적 존재방식은 뭔가 좀 허무한 감을 준다.
"이기 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 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공유가 아닌 점유만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 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소유적 실존양식은 어느순간 주어와 목적어를 역전시키는 증상을 보인다. 나의 만족을 위해 소유하지만 결국은 소유를 위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 입증하게 되고만다.
또한, 제화와 용역이 한정된 상황에서 소유를 위한 시스템에 속한다는 것은 경쟁이나 배척, 암수마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프롬은 이 부분에서 소유적 실존양식의 한계와 미숙함을 분석하고 존재적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의 차이를 문학에서 나타난 필자의 반응를 통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1. 테니슨의 시

...
작은 꽃이여 - 그러나 만약 내가
뿌리째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련만.

2. 마쯔오 바쇼의 하이쿠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테니슨의 경우 나의 목적을 위하 뿌리째 소유하려 하지만 바쇼의 경우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전자의 경우 나의 목적으로 타자가 희생되는데 반해 후자의 경우 서로 존재하며, 꽃은 보여주고 필자는 바라보는 것 만으로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유의 세계에선 각 객체들이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나의 소유는 타인의 희생, 또는 그 희생에 대한 대가(나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하며 이 메커니즘의 현재의 구현은 별로 공정하지 않다.

3. 반면, 괴테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발견

....
그런데 그늘 속에 피어 있는
작은 꽃 한송이 보았지.
별처럼 반짝이고
눈망울처럼 예쁜 꽃을.

그 꽃을 꺾고 싶었는데,
꽃이 애처롭게 말했네,
내가 꺾여서
시들어버려야 되겠어요?

하요, 꽃을 고스란히
뿌리째로 캐어,
예쁜 집 뜨락으로
옮겨왔지.
..

프롬이 말하고 있는 존재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을 의미한다."

프롬은 1장을 통해 이런 소유와 존재적 실존의 일반적인 고찰에서 두 양식을 소개하고 있으며 언어적 고찰,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사례, 성경에서 나타난 소유와 존재의 차이등을 통해 두 실존양식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 본격적으로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을 소개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 모델까지 제시하고 있다.



무슨무슨 주의자들에게도 소유적 양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주의에 대한 집착이 만성화되어 교조적 태도를 보이는 현상을 갖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가 나의 이념이라는 주체의 산물에서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순간 자신이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버리는 현상이다. 또한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자신의 욕구를 가학적 금욕적 태도를 타인에게 강요하므로 배설하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가령, "모든 재산의 절대적 균등분배라는 의미에서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소유지향적 성향이 꺾이지 않았음을, 완전한 평등에 광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소유지향성을 부인하고 있음을 노출 시킬 따름.. 진짜 동기의 역설적 표출 (중략) 어느 누구도 나보다 많이 가져서는 않된다...."의 경우가 된다.

사실 이 부분을 접했을 당시 내가 좋아했던 개혁이나 진보가 보수나 수구적 사회에서의 약자인 나의 불만에 대한 욕구표출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내면적 동기는 이거였는데 정의, 평등, 자유같은 정당성의 포장지를 외장하지 않았나 하는... (요즘은 심각하게 이 부분을 다시 복기? 하려고 한다.)


프롬이 존재적 실존양식을 제시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도 있는 것"
따라서 존재란 타자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과 실존을 전제한다. 말 그대로 HAVE or DO  와 BE의 차이이다.
그저 있기만 하면 될 따름... 맘이 가는대로.. 진짜 내 내면적 주체가 원하는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단 사회적 허용범위에서...


또한 존재적 태도가 개인의 한계안에서만 가능하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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