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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수봉산 기슭 다수곳로, 한 소년이 한창 공사중인 다세대 건축현장 앞에 서 있다. 이 다세대 주택은 얼마 전 수봉산 일대의 고도제한이 완화되면서 소소하나마 이 일대의 붐을 이루고 있는 재건축현장 중 하나이다. 빙 둘러 포장이 처져 볼 것 없는 공사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은 얼마 전까지 그곳에 있던 집에 살았었다. 집이 팔리면서 소년은 이사를 갔지만 여전히 전에 살던 집을 궁금해하며 때때로 찾아와 새로 짓는 집을 바라보곤 한다. 소년의 시선에는 새로 짓는 건물에 대한 소년다운 호기심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 짙은 건 그리움이다. 이제 그 소년의 가족만이 요령 있게 닫을 줄 알던 삐걱거리던 창문도, 소중한 물건을 감춰두던 소년만의 비밀장소도 더 이상 없다.
우리에게 <빨간머리 앤>으로 잘 알려져 있는 L.M.몽고메리 소설의 원제는
그런 의미에서 원제 ‘초록박공집의 앤’은 의미심장하다. 작자 몽고메리는 앤의 ‘빨간머리’라는 신체 특징보다 공간적 배경 ‘초록박공집’에 주목하여 ‘초록박공집’을 앤의 장소로, 앤과 함께 제목으로 선택했던 것이니 주인공 앤의 이름과 나란히 쓰인 ‘초록박공집’은 앤과 함께 이 작품의 주인공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장소’란 오랜 기간 이용되고 인지되면서 이용자 자신의 환경으로 기억된 공간을 의미한다. 단순한 물리적 용도로 정의되는 한 ‘공간’이 다른 공간과 구별되는 인간적 의미를 지닐 때 이를 ‘장소성(Sence of place)’이라고 한다. 즉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집’은 그냥 ‘집’인 것이지만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을 쌓으며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될 때 이곳은 ‘우리집’, ‘철수네 집’, ‘앤의 초록박공집’이 되는 것이다. 즉 <빨간머리 앤>이 한 세기를 넘어, 다양한 연령대의 관심과 애정을 받게 된 것은 후미지고 작고 낡은 초록박공집을 단순한 공간을 넘어 자신의 특별한 ‘장소’로 만들어가는 고아소녀 앤의 역할에 의식하건 그렇지 못하건 감동하고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빨간머리 앤’의 공간적 배경이 된 마을이 있고 ‘초록지붕집’이 관광명소가 되어 있으며 <빨간머리 앤>의 작가 몽고메리의 생가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고 부러워하면서 크고 번듯한 건물을 짓고 큰소리로 광고하는 데는 열을 올리고 있지만 지금 다수곳로에 서서 없어진 자신의 집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시선에는 무감하다. 그러나 지금 제각기 발디딘 자리에 부여하는 자신만의 의미가 아니라면 먼훗날의 소중한 장소 또한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그려낸 <빨간머리 앤> 같은 멋진 작품도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끝없이 허물고 부수고 이사가고 이사오는 방법 외에 나날이 새로워지며 새로이 소중해지는 방법이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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