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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26
    무용 / 지아장커
    보노보노

무용 / 지아장커

 

1. 유용 = 자본제 생산

 첫 번째 에피소드. 광동의 한 의류공장에서 여공원들이 재봉틀을 다루며 옷을 만들고 있다.  특별할 것 없는, 흔하디 흔한 제3세계 공장의 풍경. (여기서의 제3세계란 단순한 지리적 분류를 뛰어넘어, 자본주의 국가 내부에서 제1세계와 함께 상존하는, 동시에 언제든지 확대-재생산이 가능한 '광대한 게토'를 의미한다.) 그리고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 이것은 뒤에 펼쳐질 (영화적) 마법을 위한 준비단계일 뿐이다. 다만 그 유용한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산의 외부에선 곧 무용한 존재로 전락한다는 점만은 상기해두자.

 

2. 무용 = 예술

 유용성의 논리에 대항하는 아티스트 마커의 방식. 그것은 비인격화된 상품 대신에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만든 이의 혼과 역사가 담긴 '예술품'으로서의 옷을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기획은 서구 명품브랜드들의 전략과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를 따르고 있다. 아티스트에 의해 창조된 독창적 디자인, 대량생산되지 않는 옷의 고유성,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옷의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점까지. 이러한 명품들은 이제 '자본제 생산논리'에서 벗어나 '유한계급 논리'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위치한 사람들은 자본제 생산이 만들어내는 살벌한 현실에서 벗어나, 품위와 낭만으로 가득한 탈자본주의적 문화들을 향유할 수 있다. 무용한 것들에 대한 접근은 유용한 것들에 대한 걱정과 부담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나는 이렇게 무용성을 추구하는 예술들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 부른다. 나는 이런 예술들을 존중하며,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고부가가치를 생산해내주길 바란다. 다만 예술의 자율성이니, 정치-사회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니 하는 헛소리들은 자제해줬으면 한다.

 

3. 무용한 존재들의 절대적 유용성

 첫 번째 에피소드의 반복, 혹은 변주. 노동자들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같지만, 이번엔 생산과정이 아니라 옷을 입고 고치는 모습들을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합리적 교환이 아니라, 인정과 호혜에 의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양장점. 그리고 탄광일로 얼룩진 작업복을 벗고 몸을 씻는 노동자들의 '숭고한' 뒷모습. 자본제 생산(유용)의 차원과 예술(무용)의 차원을 넘어서 옷은 그들의 삶에 녹아 스며들고, 결국엔 삶과 구분되지 않는 '부분으로서의 삶'이 된다. 비록 자본제 생산에 의한 비예술적인 옷들이지만, 그것들은 사람들의 삶에 밀착해서 예술을 뛰어넘은 예술성을 구현해낸다. 침묵의 응시가 유도하는 부끄러움, 반성적 사유, 그리고 필요에 대한 감각들. 이것이 내가 앞에서 말한 (영화적) 마법의 정체이며, 이러한 마법은 또다른 반복과 변주를 통해 확대-재생산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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