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한국 최초 미국무대에서 성공한 걸그룹과 프로듀서
-미국 ‘에드 설리번 쇼’ 22번 출연한 김시스터즈-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우물 안 개구리’는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인 줄 알면서도 보폭을 넓혀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든 개척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개척자의 길은 십중팔구 수많은 걸림돌로 인한 가시밭길, 그중에서도 해외 진출과 같은 낯선 곳으로의 모험은 이중 삼중의 고충이 뒤따르곤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9년도에 JYP의 걸그룹 원더걸스가 미국 진출을 위해 용감하게 나섰고, 뒤를 이어 소녀시대, 보아, 그룹 엑소, 씨엘 등이 잇따라 미국 진출 시도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초창기 시도는 그리 큰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선제적이며 능동적인 도전은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던 중 2012년도 반가운 소리 하나가 들려왔습니다. 가수 싸이가 성공적으로 미국 무대에 서게 되었던 것, 싸이의 경우 선(先) 현지 진출 후 위치 확보를 기대하는 식의 방법을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유튜브 영상이 널리 퍼져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을 때 ‘아일랜드 레코드’ 소속의 유명 프로듀서인 스쿠터 브라운 쪽이 싸이의 영상을 재밌게 보게 되었습니다. 스쿠터 브라운은 때마침 콘텐츠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재미동포 이규창 씨를 통하여 싸이 측과 계약을 성사시킵니다. 이후 방탄소년단을 위시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다수의 K-Pop 예인들이 위상을 높이고 입지를 굳혀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K-pop에 대한 희소식은 금 번 2020 여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라는 디스코 팝 장르 곡이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확인시켜주고 있으니까요.

60,70,80,90년대 매번 해외 진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초창기 해외 진출 시도라야 대부분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만, 거짓말 보태서 연예인들의 해외 진출 기사가 나올 때마다 국내 팬들의 ‘묻지 마’ 응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격 향상에 도움 되는 일이라 생각해서 현실과 기대감을 분리하지 않은 채 이성적인 사고는 접어두고 “애국이 따로 있나? 해외 진출을 한다는데, 말로 부조하고 박수로 일조하면 서로 좋은 일인 거지!”라는 식의 단순, 명쾌, 순진한 정서가 작용한 때문이었던가 봅니다.

집단으로 발현되는 군중심리는 때로 무조건적일 때가 있잖습니까?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죠. 우리 선수가 골을 넣기라도 하면 온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은 환호가 쏟아지고 상대에게 골을 먹으면 갖은 야유와 한숨이 파도를 치듯이 뒤덮습니다. 승리하면 축제 분위기요 지게 되면 그야말로 뒤끝이 작렬하는 겁니다. 골인했을 때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리려고 작심했던 희망이 사라지는 판이니 애먼 한탄만 쌓이는 거죠.

연예인들을 소비하는 심리나 운동경기를 관람하는 태도나 오십 보 백 보입니다. 당사자들은 설레발, 순진한 팬들은 묻지 마 응원, 언론과 방송들은 ‘밑질 것도 없고 해될 것도 없다’는 생각해서인지 폼 날 것 같은 뉴스라 생각되면 소나기 퍼붓듯이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흐지부지 없었던 일이 되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말이죠. 이런 패턴은 자주 반복됐습니다. 입으로는 ‘기와집 열댓 채 지었다 허물었다’를 누군들 못 하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계은숙 씨가 일본 가요계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죠. 그러다가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확실하게 성공을 거둔 사람으로 김연자 씨를 꼽을 수 있고요.

옆 나라 일본 진출만 해도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미국에 진출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이었는데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 진출이 그리 쉬웠겠습니까? 그런 현실 속에서도 “김시스터즈가 성공했다”더라 정도는 바람결에 꽃잎 흩날리듯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게 알고 보니 작곡가 겸 악단 장인 김해송과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의 딸 들이었습니다.

김시스터즈의 리더인 김숙자 씨에 의하면 언니 영자 12살, 본인 나이 9살, 막내 여동생 애자가 8살 적부터 부친에 의해 구성된 가족뮤지컬 쇼로 시공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부친은 5~6세 난 자녀들에게 클래식에 가사를 붙인 아주 빠른 속도의 노래로 연습을 시켰다고 하는데, 이후 부친이 북한군에 끌려가 변을 당한 후 어머니 이난영은 대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남긴 악극단을 운영하려면 돈이 들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이난영은 재능 있는 자식들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됩니다. 체격 큰 미군들을 상대로 흥을 돋우고 리듬을 타며 공연을 하자면 아무래도 코러스도 필요하고 막간을 메꿔줄 막간 가수도 필요했을 테지요.

세 자매는 미군들이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노래를 불렀고 미 8군 무대에도 섰습니다. 부산 피난 시절 낮엔 학교에 밤엔 무대로 달려갔습니다. 모두 열 살 갓 넘은 나이에 말이죠. 출연료 대신 받은 것은 위스키나 양담배 소시지 같은 현물이었습니다. 이것을 암시장에서 쌀과 돈으로 바꿔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이후 키가 훌쩍 커버린 큰 언니 영자는 무용단으로 가고, 언니의 빈자리를 외사촌 민자로 채워 숙자와 애자 민자로 팀을 이뤄 김시스터즈의 멤버를 확정 짓습니다.

이난영은 자매들에게 가야금, 장구, 북 같은 우리 악기를 기본으로 바이올린과 트럼펫 등 서양악기와 한국무용에 발레 레슨까지 시켰습니다. 연습량을 다 채워야 바나나와 초콜릿이 상으로 주어졌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간식이었던 바나나 초콜릿은 어린 나이에 혹독한 연습을 견디게 해주는 작은 보상이었는지 모릅니다. 안 그래도 자매들은 청음 실력이 좋고, 악기 습득력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라 할지라도 갈고닦지 않으면 빛날 수 없습니다. 혹독한 훈련은 그래서 당연하고도 상시적인 일과였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톰 볼’이라는 미국인 프로듀서가 한국에 옵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아시아계 특집 쇼를 구상하던 중 김 자매들의 소식을 듣고 실력을 테스트하러 온 것입니다.

4주 계약을 하고 달려간 라스베이거스였습니다. 한국을 떠나 생면부지 타국에서 처음 해본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이 호평을 받은 덕분에 연장 계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선더버드 호텔 측과 연 8개월씩 15년간 전속 가수로 공연을 펼치게 돼요. 이들은 40분 공연을 매일 밤 2~4개씩 소화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줍니다. 20여 종류의 악기를 연주하는 실력에 재기 발랄하고 속도감 있는 동작과 환상적인 화음에 높은 음악성을 가진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라스베이거스를 기반으로 점차 뉴욕과 시카고 등 미국 전역으로 입지를 넓히게 됩니다. 김 자매들의 활약상은 라이프지에 실리고 시카고 TV 가이드 지에는 표지로도 소개됩니다.

주급 400달러로 시작한 출연료가 이내 1만 5천 달러가 되고, 급기야 2만 달러를 받게 됐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예인의 가치는 출연료가 증명해 줬습니다. 당시 한국인의 1인당 연 국민소득이 2천 달러였으니 김시스터즈의 수입이 얼마나 고액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라스베이거스 고액납세자 6위는 이들의 공식적인 납세 기록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휴양과 여흥을 위해 모여드는 라스베이거스 공연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고는 가능치 않은 일이고, 비틀스가 미국을 강타할 때 교두보로 삼았던 CBS 인기 TV 쇼 <에드 설리번 쇼>에 김 자매들은 무려 22번 출연하는 기록을 세웁니다. 이난영은 63년도에 도미하여 딸들과 함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 트로트 가수로서는 미국 최고의 메이저 쇼 무대를 밟은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트로트 양식이 정립된 시작점에서부터 일세를 풍미했던 가수 이난영, 그 자신 재즈와 블루스 장르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미국 무대에서도 먹힐 수 있는, 보컬 실력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에 춤 실력까지 갖춘 걸그룹을 조련한 엔터테인먼트 계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최초로 미국 무대에 진출하여 성공 가도를 달린 걸그룹은 ‘김시스터즈’이고 그들을 길러낸 최고의 프로듀서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람 그 이난영이었습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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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 18:09 2020/09/1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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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제가요] 트로트 양식의 시작점과 시대적 양상
-가요사,,,이애리수와 고복수 그리고 이난영과 남인수까지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예인들의 눈부시고도 고달픈 삶은 그들이 부른 노래와 세월만큼이나 천차만별로 회자되며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갑니다. 하여 트로트 양식이 시작된 지점과 변화의 양상을 짚으며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가수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여정만큼이나 신산한 흔적과 고달프고도 오래된 기억과도 마주치는 일일 것입니다.

화향백리, 주향천리 ‘인향만리’라는 말,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리를 간다 하는데 어째서 인간의 향기만은 유독 만 리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여타의 종(種)들과는 달리 스스로 업적을 쌓고 그 치적으로 말미암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우리의 대중가요도 작은 물방울이 냇물을 거치고 강을 이루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이 부침과 우여곡절을 거듭한 후에야 오늘날과 같은 서민 풍의 노래 장르로서의 위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윤심덕의 ‘사의 찬미’도 굴곡진 가요사의 한 단면이겠네요. 어떤 이들은 ‘사의 찬미’를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라 하는데요. 윤심덕이 관비 유학생으로서 동경음악학교에서 서양음악을 전공한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녀는 음악 활동과 신극 운동에 참여하다가 ‘메기의 추억’과 ‘어여쁜 새악시’ 등 외국의 번안곡을 취입하러 일본행 배에 오르게 됩니다. 녹음은 오사카에 있는 닛토 레코드사에서 했다고 하고요. 직접 가사를 지었다고 하는 ‘사의 찬미’는 막판에 윤심덕의 주장으로 수록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더라도 이 곡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느린 선율로 변환하여 가사만 입힌 번안곡에 불과했습니다.

‘사의 찬미’는 제목 그대로 죽음을 찬미하고 삶에 회의적인 지극히 암울하고도 퇴폐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주인공은 노래 제목과 부합하는 행동을 결행하고 맙니다. 귀국 도중 현해탄 선상에서 목포 갑부의 아들이자 유부남인 극작가 김우진과 동반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으니까요. 이일은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초특급 스캔들로서 구구한 억측과 화제성을 증폭시키며 인구 약 2천만인 가난한 나라 식민 조선에서 10만 장이라는 당시로는 경이적인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아무튼 대중가요의 시작점은 1932년 이애리수가 내놓은 ‘황성 옛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어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 이르러 트로트 풍의 노래 양식이 완성되고 정돈되었다는 것이 평단의 대체적인 정설입니다.

이후 뛰어난 미성의 소유자인 남인수가 등장하여 ‘애수의 소야곡’과 ‘낙화유수’를 내놓으며 20년 이상 최정상의 자리를 지킬 불세출의 가수가 출현했음을 알립니다. 뒤를 이어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출시되며 트로트는 더한층 대중들의 곁으로 다가섰던 것, 한편 일제 막바지에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과 ‘나그네 설움’이 나와 큰 호응을 얻었고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과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서민들의 취향과 사회적인 관심을 저격하며 40년대를 일단락 짓습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노래의 시대적 양상과 변화입니다. 30년대 노래에는 나라를 잃은 설움이 주조를 이루었는가 하면, 일제 말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는 강요된 친일노래가 판을 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땅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고 이에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은 왠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거라 삼팔선’을 통하여 강대국들이 우리 땅에 임의로 그어놓은 3.8선에 구애받지 말고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니까요. 트로트가 친서민적이요 대중들의 삶에 기반한 노래 장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50년대에 들어서자 백설희는 그 유명한 ‘봄날은 간다’로 옥구슬처럼 탱글탱글하고 멋진 목소리를 뽐냅니다. 이 곡은 화려하지만 덧없고 변덕스러운 봄날의 속성에 빗대어 대중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역설의 미학을 발휘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와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발표되는데, 이때는 또 6.25가 끝나 환도(還都)와 귀향(歸鄕)으로 바쁜 데다 공산주의를 피해 3.8선 이남으로 남하한 실향민들까지 뒤엉키는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떠나는 청춘 남녀의 엇갈린 운명을 표현하고 있지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50년대는 혼란과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는 해야겠는데 너 나 없이 가난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그렇더라도 남인수의 음반은 요즘으로 치면 초 대박급인 수만 장이나 팔렸다고 합니다. 대중예술의 힘일까요. 팬심의 발로일까요. 그의 목소리는 고음에서조차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이 맑고 시원한 넘사벽 그 자체였다고 하고요. 예술가의 매력과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문화예술이란 결국 자연의 모방이자 인간의 상호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소박한 창법과 단순한 음악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인기를 얻은 시점은 만주로 연해주로 타향살이 타국살이를 위해 조선 땅을 떠나는 사람들의 많았던 30년대 초였고, 같은 고복수의 노래 중 첫 소절이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하는 ‘짝사랑’은 흥미를 유발하는 의문형 기법이 재밌고 매력적이어서 인기를 부르는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부인 황금심의 ‘뽕따러 가세’는 요즘 모 방송 프로그램의 타이틀로 차용되면서 시대적 트렌드와 맞물리며 재소환의 예를 보여주고 있고요.

다시 이난영과 남인수의 예를 들어봅니다. 네이버의 한 기사에 의하면 ‘목포의 눈물’은 대중가요의 전성시대를 연 공전의 히트곡이며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데서 보듯 시대성, 화제성, 예술성, 대리만족 등 여러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기에 남인수와의 로맨스는 다른 예술인들이 갖지 못한 엄청난 차별점이 됩니다. 아마 이일은 그들의 음악적 궤적을 논할 때마다 인간적인 매력의 근거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음악인들이 추구하는 진선미의 결정체는 무엇일까요. 가수든 연주가든 작곡가든 자신들의 음악행위 앞에 명곡과 명음반, 명가수 명연주와 같은 말이 헌정되는 일이 아닐까요? 각각 44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1천여 곡을 부른 남인수와 48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5백여 곡을 부른 이난영입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함께 써 내려간 러브스토리야말로 둘의 음악 인생에 있어 최고의 화룡정점이라 생각합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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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2 22:14 2020/09/0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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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제가요] 오래된 트로트명곡에 대한 단상
-1930년대 ‘목포의 눈물’과 1950년대 ‘봄날은 간다’-⑤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우리 정통대중가요에도 명곡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분명 1930년대부터 시작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90년 가요사에서 60년대 이전의 가요에 국한해 짚어보자면 최고의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는 노래는 1935년도에 레코드를 취입한 이난영 씨의 ‘목포의 눈물’에서 시작하여 백설희 씨가 1953년도에 부른 ‘봄날은 간다’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지만 두 곡은 오늘날까지 노래 제목에서부터 내용 일부분이나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만인에게 회자되며 사랑을 받고 있다 생각되는 곡이기에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포의 눈물’과 ‘봄날은 간다’가 “어떤 점에서 명곡일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봅니다. 먼저 ‘목포의 눈물’은 제목부터 묘합니다. 문학적 수사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도시 이름에 눈물이라는 말을 매칭 시킨 것은 무척이나 이질적이고도 엉뚱한 표현이라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언어를 접목하여 은유든 직유법이든 의미 전달에 성공하는 경우에는 상식을 파괴하는 표현법으로서 희소성을 갖습니다. 예술 분야에서만 허용되는 특별한 문법체계이겠지요. 더하여 발표 당시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꾸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경우엔 좀 더 우월한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그렇습니다. 시어나 노랫말이 다양하게 해석될수록,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생각의 파장이 넓고 깊을수록, 명곡.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하겠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이런 점에서 제목부터 한 점 따고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겠고요. 노랫말도 그렇습니다. 내용이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고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지만 애매하고도 추상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직선보다는 곡선의 멋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성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특이한 점이죠.

 

‘목포의 눈물’의 존재감은 시대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목포는 눈물’이다. ‘목포는 설움이다’라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노래가 나온 시기는 1935년 일제 강점기입니다. 목포 주변에 있는 1004개의 섬들은 결코 기득권층이 사는 곳이 아니었고요. 섬은 목포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기대어 염전을 일구고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식민 백성들의 터전이었습니다. 목포가 대처로 나온 가난한 집의 맏형이라면 주변의 섬들은 형의 출세 소식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는 두메산골의 동생들이라고나 할까요. 신흥도시 목포의 뒷자락엔 그렇게 숨죽이고 사는 사람들의 터전 천여 개가 있었습니다. 목포는 지금도 ‘섬들의 수도’라 불리며 애잔한 정취를 발산하고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노래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첫 구절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으로 끝나는데요. 여인은 이별로 인하여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그게 바로 ‘목포의 설움’이라고 주장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 노래의 청자들은 그 같은 주장에 이의 없이 동의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점이죠. 여인의 눈물이 ‘목포의 눈물’이고 이어 목포의 눈물은 곧 ‘망국의 설움’이라는 식의 가치 전도가 예상되는 가운데 이 역시 이심전심 이해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원곡자인 이난영(이하 경칭 생략)을 보죠. 약간의 콧소리 섞인 고음에 대책 없이 넓은 음역 대에서 애조를 가득 띠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난영에게서 배태되는 애조는 일제 강점기라서 그런지 유난히 세기말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목소리는 맑고 좋다는 식으로 단순 명쾌하게 규정할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탁음이 섞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득 “요즘 가수들 중에 누가 저처럼 치명적으로 애조 띤 음색으로 변화무쌍한 결을 드러내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백설희의 목소리는 이난영에 비해 굵고 맑은소리를 자랑합니다. 참 백설희 이전에 꾀꼬리라는 애칭을 가졌던 황금심에 대해서 소개해야겠네요.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보다 3년 늦은 1938에 발표됩니다. 이후 1953년에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가 나오면서 우리 정통대중가요 계는 그야말로 최고의 여가수 3인방을 배출하는 모양새였습니다. 백설희의 목소리는 은쟁반에 알이 굵고 실한 옥구슬이 구르는 소리라 한다면, 황금심의 소리는 백설희의 것보다는 조금은 더 얇고 맑고 섬세하게 구르는 옥구슬 소리라고 밖에는 더 이상 알맞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현대에 와서도 즐겨 소환되는 노래에는 그만의 특장점이 있습니다. 정상급 가수들 중에서 다시 부르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 곡이죠. 그런데 발표 당시에는 대박이 나고도 세월이 흐른 후엔 관심이 덜한 경우가 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멋과 한 그리고 대중성이 조금 더하고 덜한 차이에서 난다고 생각합니다. 탁월한 보이스의 소유자인 황금심의 노래는 앞의 두 곡보다는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화가 됩니다. 이에 비해 ‘목포의 눈물’과 ‘봄날은 간다’는 멋과 한 그리고 대중적인 면에서 항상 기시감을 주고 있습니다. 곡의 수용자들이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응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융통성을 허락하는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봄날은 간다’도 ‘목포의 눈물’에 못지않게 제목 멋있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곡입니다. 이 노래는 6.25동란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나온 곡으로서 우리나라 시인 100명이 응답한, 광복 이후 대중가요 중 가장 아름다운 노랫말 1위로 선정된 곡으로 알려져 있죠. 노랫말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라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첫 구절은 특히 시각적 이미지가 강하죠. 그림 한 폭이 그려집니다. 연분홍 치맛자락을 휘날리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 한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1953년이라면 망국의 아픔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습니다. 더구나 6.25의 상흔 한복판에서 힘든 생활고를 겪던 때였고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물로 허기를 달래는가 하면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래의 첫 소절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며 낭만이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랫말의 힘이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누군가의 요란한 약속도, 연인의 사랑의 맹세도 공수표로 맴돌고 있는 사이에 봄날은 흔적 없이 가버립니다. 열아홉 처녀는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꽃이 필 때도 울고 꽃이 질 때도 울었다 합니다.

2절도 3절도 ‘봄날은 간다’로 끝나는데 맥락은 똑같습니다. ‘실없는 그 기약에 매달리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봄날은 갔다 하고 ‘얄궂은 그 노래만 듣다가’ 봄날은 또 속절없이 갔다 합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거듭되는 약속과 맹세에도 불구하고 봄은 쉽게 오지도 않거니와 왔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봄날은 간다’ 역시 곡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속적 향토적 감성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모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봄날은 간다’와 ‘목포의 눈물’은 우회적인 표현과 곡선적인 미학에 세대 불문하고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부르기 좋은 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노래로 여겨집니다. 하여 인간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까지 실어 담을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해주면서 변함없이 사랑받는 곡으로 살아남아 있습니다. ⑥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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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2 22:10 2020/09/0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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