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➂] 米美味, 남원 보절미술제 개최 성과와 이후의 전망

-김해곤 예술총감독에게 들어보는 미술제 전후 이야기

 

-미술제를 치르고 난 전체적인 소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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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비해 규모를 확장하는 문제로 긴장을 했었다. 규모가 늘어나는 것을 두고 걱정하는 기류도 있었고. 하지만 기존의 비닐하우스 3개 동에 보절면 농협창고와 빈 점포 두 곳을 추가하여 미술제를 진행했다. 점포가 더 이상 슬럼화 하는 것을 막고 제대로 살려보려 한 것이었는데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미술제가 끝나고 나자 ‘고맙다.’라며 먼저 다가와 ‘TV 잘 봤다.’고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개막식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점은?

 

“합심이다. 준비할 때부터 주민들이며 관람객들의 반응이 어떨까 고민이 컸다. 주민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동력이 흩어져 일을 진행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신경 쓰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선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갈등구조가 형성되다 보면 감정 선(線)이 부딪치기도 한다. 어려움 이런 거 불거질 때마다 매끄럽게 처리하면서 가야 힘이 덜 든다. 일에 궁금증이 없을 순 없지만, 어떤 때는 ‘미술제 한다는데, 너 잘하나 보자’하는 것 같은 느낌이 피부에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우려는 싹 가셨다. 미술제가 잘 치러졌으니까 말이지만, ‘저 사람이라면 바꿀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많이들 해주시는 그런, 의식이 형성됐다고 본다.”

 

김 작가는 이번 미술제에서는 기존의 비닐하우스 3개 동에 보절면 농협창고와 빈 점포 두 곳을 추가하여 판을 벌였다. 점포가 더 이상 슬림화하는 것을 막고 제대로 마을을 살려보려고 고심한 결과다. 서각갤러리와 그림책방을 추가했는데 서각가들이 보여준 의욕이 생각보다 돋보였다. ‘우리 분야도 빠지지 않아요!’라고 말하려는 듯이 활력을 쏟아 부어줬는데 일종의 의욕, 좋은 작품을 선보이려는 선의의 경쟁 그런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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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근 작가의 그림 책방도 빼놓을 수 없는 전시였다. 작가는 첫아이 은별이와 1년7개월 동안 섬진강의 발원지를 여행하며 보고 느낀 이야기들을 <아빠랑 은별이랑 섬진강 그림여행>이라는 그림책으로 엮었다. 오치근 작가는 이 책에 실린 원화 4점과 <수호신 해치>에 실린 원화 2점 외에 수묵화와 천 소재의 프린트 그림 등을 더해서 전시장을 풍성하게 꾸며줬다. 여기다 작가는 책방을 지키면서 독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며 우리 미술제에 긍정에너지를 심어줬다. 신설된 코너가 작년과는 결이 다른 관람객들과 마주하는 모습을 본 많은 분들은 ‘우리 고장을 변화시켜줘서 고맙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인사를 해줬다고 생각한다.”

 

이어 현장 분위기다. “미술제 특성상 비닐하우스를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행사라서 그런지 전시장 분위기에 정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김 감독은 이 대목에서 많은 고민을 표출하였다. “요즘은 농번기 농한기라는 개념이 모호하다. 저희 미술제가 눈 내리고 고드름 꽁꽁 언 그런 농한기, 그런 한파 속에서 열린 것이 아니다. 완전한 농한기가 아니어서 개막식 날처럼 사람이 많이 몰리는 날 말고 그 나머지는 어떤 사람이 몇 시간씩이나 전시장을 지켜줄 것인지가 고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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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이 들려주는 하우스미술관 상황은 이랬다. “제 1관은 하우스의 주인인 황*미 님이 잘 지켜줘서 고맙고, 3관 역시 원*희 님과 같은 젊은 주부가 나서서 역할을 잘 해줬다. 2관은 나이 드신 80세 강*자 할머니께서 시종일관 지킴이가 돼 주셨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추접스럽게 나이든 사람이 얼굴로 서 있냐?’고. 이런 질책 아닌 질책과 염려에 대해서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강 할머니께서는 ‘내가 하나라도 더 알고 있어야 봉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며 그림 이해와 감상에 열과 성의를 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보조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일은 밀리고 손은 없고, 부딪쳐본 사람이 아니고는 그 고충과 난감함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다.”

 

사실 3관은 100평이 넘는 공간에 학생작품 224점에 400명의 주민들 작품까지 수용한 대형 전시장인 탓에 열흘 동안 공백 없이 미술관을 지키는 문제는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또 제2관은 그림으리 업으로 삼고 있는 전업 작가들의 그림이 83점이나 채워진 장소라서 그림을 분실하거나 파손이 생겼을 때는 그림 값 보상이 뒤따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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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막식에 준비과정에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일단 기금 문제였다. 보조금 말이다. 미술제에 필요한 준비물은 말 그대로 개막을 위한 것이다. 사전에 만단하게 준비를 해야 하는데 20일 남겨 놓고 기금을 수령하게 됐다. 행사가 코앞에 닥쳤을 때야 기금 승인이 난 거다.” 준비할 것은 많고 손에 돈은 없고, 행사를 치러본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한번쯤은 애태우고 한번쯤은 겪어 본 일일 것이다.

 

김 작가는 계속해서 “그 외에는 자신감 있게 밀고 나갔다. 주민이 반대하면 축제가 오래갈 수 있겠나 싶었다. 주민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신경이 쓰였다. 이런저런 것 따지면 일 못한다는 심정으로 달다 쓰다 말없이 열심히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분들이 나중에는 일을 즐기면서 도와주는 빛이 역력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저런 분들이 뜻을 모으면 인구 절벽인 이 고장을 바꿀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조금만 삐끗하면 어려워질 수 있는 일에는 믿음 형성과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재차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다. 워낙 인력난을 겪어서 그런지 다음번엔 면단위 주민뿐만 아니라 남원시 전체로 확장하여 봉사도우미들을 구할 생각이다. 참여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행사를 도울 인력을 구하는 것은 미술제의 지속성과도 맞물려 있는 문제라서 김 감독은 유독 강조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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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째인데 주민들의 입장은 어땠나?

 

“축제를 확장하다는 입장을 밝히자 여러 가지 반응이 느껴졌다. 작년엔 ‘미술제를 한다는데 긴가 민가 했을 테고‘ 설시미술들을 보면서는 ’이게 뭐지?‘ 하는 눈길과 마주쳤다 하우스미술관에 그림이 가득 걸리는 모습을 보면서는 ’어디서 이렇게 많은 그림들이 왔단 말이여?‘ 하는 의구심도 있었을 테다. 전시공간도 훨씬 좁았다. 지난번엔 은천마을에만 국한됐으니까, 그러던 것이 이번엔 면 소재지로까지 확장된 점이다. 관심을,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말을 또 하게 되는데 봉사 인력에 차질이 있었다. 봄부터 약속했던 이장들과 마을 단체장들을 위시한 소위 명망가라는 분들과의 협력 부분에서 더 그랬다.”

 

전시가 막상 시작되자 재밌는 현상도 벌어졌다. “전시품을 본 사람들이 우리는 뭣뭣 있는데 이거 가져와도 되냐? 우리도 괜찮은 거 있다. 내년엔 꼭 참여하고 싶다?” 하면서 ‘문화쌀농’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견물생심인 거다. 전시회를 보고서야 참여의식의 둑이 터지는 구나 싶었다.“ 작가 김연수는 ‘형편없는 작품으로 등단해서 어쨌든 계속 나아지고 있다는 게 큰 행운‘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보벌미술제도 다를 게 없다. 1회를 거울삼아 제2회 때는 더 발전하고 3회째는 조금 더 발전을 하리라는 점에서 말이다. 앞에서 말한 ’그 처음은 미약했지만 그 나중은 더욱 창대하리라.‘고 기대한다.”➃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피플투데이 선임기자. 르뽀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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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7 19:47 2024/01/0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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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➁] 米美味, 남원 보절미술제 개최 성과와 이후의 전망

-김해곤 예술총감독에게 들어보는 미술제 전후 이야기

 

3개 공중파 방송과 24개 언론매체가 주목한 보절미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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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美味, 남원‘보절미술제’는 단 열흘 동안 한시적으로만 기능(技能)한다. 농한기를 틈타 잠시 비어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여는 미술제이기 때문이다. 미술제의 주체도 힘 있는 사람이 아닌, 지역 농민들이다. 보절면은 인구절벽에 직면해 있는 곳이라서 애당초 문화행사를 열기에는 무엇 하나 탐탁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첫째는 제한된 공간, 불완전한 환경 때문이다. 전시공간이 비닐하우스인지라 제대로 된 조명시설을 갖추질 못했다. 부득이 자연채광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농사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수답’ 신세다. 천수답은 때맞춰 하늘에서 비가 오면 좋고 아니면 한해 농사를 망치게 되는 경작지 아닌가. 이처럼 ‘하우스미술관’은 조명시설이나 제대로 된 보호막도 없고, 비나 우박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지붕이 날아가고 하우스를 떠받치고 있는 지주대가 와장창 무너지는 판이라서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환경이다.

 

하지만 이번 미술제에 3개 공중파 방송과 24개 언론매체가 주목을 해줬다.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악조건 속에서 열리는 행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면 전체를 합해도 인구가 1370명뿐인 곳, 그 중에서도 처음엔 은천마을을 특정해서 시작했으니 ‘이게 뭔가?’ 싶었을 것이고, 사람 구경하기 힘든 곳에 그림이 걸린 장소도 비닐하우스라는 기상천외한 장소이고 보니 그야말로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점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누가 봐도 덜 갖춰진 곳이었던 만큼 그 자체를 두고 화제를 삼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미술제는 열렸다. ‘시작이 반’이라고 작년에 이어 두 번 째로 말이다.

 

개막식 참석과 미술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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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달이 지났다. ‘보절미술제’에 다녀온 것은, 개막식은 오후 2시, 제2관에서 할 모양이었다. 멀리서 봐도 전봇대에 매달린 플랜카드와 입구에 놓인 여남은 개의 축하화환이 ‘저기가 개막식을 할 장소인가 보구나.’를 짐작하게 해줬다. 김 작가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느라 눈인사 허리인사가 한창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일단은 ‘와 대단하다’라는 말 한마디쯤은 안심하고 내뱉을 수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의 질로 보나 양으로 보나 보통 이상은 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둘 셋 모여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며 개막식 내방객들을 위한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가득 놓인 것을 보면서 기대감이 점점 높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3관은 깃발이 휘날리는 다리 건너였다. 거긴 초.중.고생들의 그림과 사진 등 갖가지 형태의 주민참여 작품들이 가득했다. “이렇게나 많구나!” 학생 작품 224점에 400여 주민참여 작품을 합하면 못해도 624점인데 이 많은 것을 이곳에 다 진열을 할 수 있구나. 비닐하우스도 ‘예전에 내가 알던 비닐하우스가 아니구나.’ 싶었다. TV에서는 특용작물을 재배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농민들을 소개해주곤 했는데 그 같은 대형 하우스를 바로 이곳에서 보고 잇는 것이었다. ‘이 정도규모나 되니까 그림 수백 점 걸기는 일도 아니구나.’

 

제2관으로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작품을 낸 학생들 중 전북도지사, 전북교육감, 시장 상을 수상하게 된 학생들과 그들의 보호자가 대기하고 있는 모습에 더해 지역민들과 면장을 비롯하여 지역 기초의원들이 자릴 잡았다. 각지에서 모인 전업 작가들도 20여 명이나 찾아와 미술제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문화적 약자를 위한 미술제, 대안공간으로서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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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절미술제는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미술제, 문화약자들과 함께 하는 미술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업 작가들을 위한 대안공간으로서의 역할이다. ‘보절아트페스타’라는 명칭을 놓고 보면 ‘페스타’는 축제라는 뜻이니까 지역민을 위해서는 ‘보절아트파스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것 같고, 전업작가들을 위한 대안공안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하우스미술관’이라고 하는 안내장을 마련한 걸로 보인다. 두 가지 성격이 어우러진 점은 나빠 보이지 않아 보인다. 기획자의 역량과 인적 네트워크가 얼마만큼의 선(善)기능으로 작동하고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니까.

 

이런 종류의 문화기획은 해외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1995년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가 개설한 인문학 코스도 그렇다. 얼 쇼리스는 부익부 빈익빈의 고리를 끊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던 중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클레멘트 코스’라는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다. 우리나라도 서울문화재단이나 문예진흥원과 같은 각 기관에서 공연예술단체들을 대상으로 공모 선정하는데 이게 다 문화 소외지역을 지원하는 정책 중 하나다. 차 상위 계층을 상대로 발행하는 문화누리카드도 비슷한 맥락이다. 연 8만 원 가량이 적립돼 있는 문화누리카드로는 영화를 비롯하여 음악 무용 연극 미술 관람에 이어 도서구입도 가능한 문자 그대로 문화를 향유하는데 사용하도록 정부가 발급해준 지원 카드이다.

 

김해곤 작가가 시도한 미술제도 문화적 약자를 위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90세의 촌로처럼 평생 문화예술과 멀어진 채 농경지에 매인 사람들은 정보부족과 이동 수단 부재 그리고 건강과 같은 악조건으로 인해서 문화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림 구경을 위해 미술관이 있는 도회지로 나갈 여건도 안 되고 엄두 자체를 못 내기 십상이다. 이 지점에서 구상하게 된 것이 <米美味, 남원보절미술제>라고 생각된다. 농한기를 맞아 잠시 비어 있는 비닐하우스를 이용하여 그림을 걸어 지역민들에 의한 지역민들을 위한 열흘간의 축제다. 이를 전제로 보절미술제의 총감독이자 기획자인 김해곤 작가와 연결하여 일단 미술제 이후의 성과와 개선점을 비롯한 미래 비전에 대해 작가의 의견을 들어본다. ➂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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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8 10:41 2023/12/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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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 米美味, 남원 보절미술제 개최 성과와 이후의 전망

-김해곤 예술 총감독에게 들어보는 미술제 전후 이야기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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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 시작되는 첫 금요일이었다. 전북 남원의 보절면 황벌리 은천마을 일대는 열흘간 열리게 될 미술제 개막으로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이곳의 남다른 점이라면 주민들의 대다수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옥토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 고장이라는 점이다. 총 835가구 중 67.2%가 농가로 분류되는 점을 봐서도 그렇다.

 

행정상으로는 25개 이장(里長) 단에 면장 한 사람, 작금의 대한민국 어디서나 안고 있는 인구 절벽의 고민을 비켜 가지 못한 이른바 한미한 시골이다. 하지만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는 곳이었다. 자연 호수가 26개나 돼서 제아무리 혹독한 가뭄이 닥친다 해도 이곳만은 물 걱정 가뭄 걱정이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때마다 갖가지 농산물이 아쉽지 않게 구색을 갖춰 생산되는 고장이다. 보절면에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의 사는 재미가 쏠쏠한 이유다. 여기다 만행산 천황봉은 자칫 평이하게만 보이는 이 고장에 ‘웬 파격이냐’ 싶게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농경지로 이름 난 지역에 높이 909m 천황봉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고 보면 이를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선을 압도하게 만든다.

 

보절미술제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미술관으로 이용된 곳이 비닐하우스이고 미술제를 꾸린 사람들은 은천마을 주민들이다. 면 전체의 인구가 1370명 남짓인 고장인지라 미술제 발원지인 마을 일대는 사실 고령화와 인구절벽 탓에 사람 구경하기가 흔치 않은 현실이다.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제2회 미술제를 11월 3일에 개문발차 하더니 10일간의 전시를 성황리에 끝마치게 됐다. 이를 보면서 누군가는 말한다. ‘그 시작은 비록 미약하지만 그 나중은 창대하지 말란 법 없다.’고

 

남원 보절미술제 탄생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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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은 그렇다. 민족종교 증산도 도전(道典)에 보면 교조 강증산(일순)은 ‘똑똑한 사람 둘만 있어도 일은 된다.’라고 했고, 기독교 경전의 구약 편에도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이 기록돼있다. 이쯤 해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일이 되고 안 되고는 많은 사람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보절미술제만 해도 발단은 우연한 기회에 단 두 사람의 대화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바로 90세의 촌로와 김해곤 작가의 만남이었다.

 

“자네 뭐 하는 사람인가?”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나랑은 평생 관계없는 그런 일이네그려.”

“어렵게 만 생각하실 건 없습니다. 맛있는 것도 드실 겸 그림 구경하시러 저랑 같이 미술관에 한 번 가시지요?”

“나 같은 사람이 그림 구경을 하러가? 어디 먼 곳까지?”

“(비닐하우스를 가리키며) 여기라면 보러 오실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100번이라도 구경할 수 있겠지.”

 

김 작가는 순간적으로 결심한다. ‘봄에는 작물을 재배하는 저곳을 가을에는 문화를 재배하는 곳으로 만들자’ 이렇게 역사는 시작됐다. 이후 마을 사람들의 힘과 크고 작은 열정이 보태진다. 그 결과 보절면 황벌리 은천마을의 비닐하우스는 미술관으로 변신하여 그림이 걸린다. 소위 보절미술제이다. 비닐하우스를 미술관 삼아 미술제를 개최했으니 대외적인 명칭은 ‘보절비닐하우스미술제’인 건가 그냥 ‘보절농민미술제’ 아니면 쉽게 ‘보절미술제’라고 부를까?

 

황벌리 은천마을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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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김 작가를 처음 본 것은 지난 5월이었다. 정말 우연히 “‘작년에 남원에서 하우스미술제’를 보고 주민들이 좋아하셨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모르면 무식하다고 그때 반사적으로든 생각은 이랬다. “이게 무슨 뜻이람?” 어떻게 비닐하우스가 미술관이 되고 사람 구경도 제대로 못하는 시골 마을에서 미술제를 열수 있단 말이지, 혼자 자문자답을 하며 반신반의했다. 미술제 운운 자체가 뜨악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눈 앞 20센티쯤 앞에서 콩나물 대가리 비슷한 의문부호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비닐하우스에서 미술제를 열었는데 주민들이 좋아했다.‘는 작가의 말마디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뚜렷한 잔상으로 남아 의식 한가운데서 똬리를 틀고 있는 모양새였다. ’지워버려야 하는데, 떨쳐버려야 하는데‘ 떨치지 못하고 지우지 못하고 있다 보니 마음은 무겁고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중순경에 남원에 가게 되었다. 남원시 춘향파크 안에 있는 한 카페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이어 미술제를 열었다는 현장으로 이동하여 비닐하우스 1.2.3동을 둘러보았다. 하우스는 생각보다 넓었다. 무엇을 하던 충분히 큰 공간임은 분명한 것 같았다. 시쳇말(時體)로 그날의 방문은 한 인간의 꽉 막혔던 의식에 구멍을 뚫어준 계기가 되었다. ‘유능한 기획자가 있다면 안 될 건 없겠구나.’

 

그 순간 두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비닐하우스미술관을 보면서 말이다. 벚꽃의 전격성과 TV에서 봤던 태국의 ‘매끌롱 기찻길 시장’의 가변성이었다. 철로 변에 좌판을 깔아 놓은 상인들은 매번 기차가 들어올 때마다 재빨리 포장을 걷고 물건을 치워줘야 한다. 늘 불확실성에 직면하는 상황인 것이다. 빨리 피고 빨리 지는 벚꽃의 찰나성(性)도 그렇다. 비바람과 우박 또는 태풍이 들이칠 때마다 지붕 채 날아가 버리는 비닐하우스의 위태위태한 점 또한 지속성 면에서 뭐가 다를까 싶었기에 이 같은 생각이 나도 모르게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 보절미술제는 단 열흘 정도 임시 공간에 그림을 거는 미술제였다. 올해로 두 번째 열린 미술제는 박물관이나 여느 미술관처럼 튼튼한 건물에서 열린 것이 아니다. 1관엔 볏짚더미와 왕겨를 이용한 설치미술로 꾸몄고 제2관은 ‘창작의 숲’ 회원들을 비롯한 전국의 54명의 화가들이 출품한 83점의 그림을 걸었다. 제3관은 학생 224명의 글.그림과 400 여 명의 주민들의 참여가 있었다. 면사무소 근처 빈 점포를 비질하고 닦아 참가자 11인의 서각 갤러리로 또 다른 점포에는 그림 책방을 열었다. ➁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피플투데이 선임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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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7 19:17 2023/12/17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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