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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역사와산'과 함께 다녀오다

 

천관산-'역사와산'과 함께 다녀오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역사와 산'(171회)과 함께 전남 장흥에 있는 천관산에 다녀왔습니다.

2008년 10월 11일(토) 밤 10시 30분에 출발,

12일(일) 새벽 6시 30분에 도착 후 11시쯤까지 대략 4~5시간 가볍게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중턱에서 억새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과 남해, 사진;김기헌>

 

높이가 723m 정도되는 아담하고 이쁜 산입니다.

이런 산이 동네에 있다면 매일이라도 올랐을 겁니다.

능선으로 오를 때 눈앞에 남해 바다가 훤하게 보이고, 산등성이에는 한참 억새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원암에서 바라본 천관산, 사진;김기헌>

 

1시간쯤 오르다 정원암 조금 못미쳐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사실 오래간만이라 아침식사를 싸와야 한다는 걸 몰라서

빌붙어 먹었습니다.

산에서 먹는 밥은 진짜 꿀맛입니다.

그것도 빌붙어 먹는 밥은 더욱 꿀맛입니다.

 

 

<중턱에서의 아침식사, 사진;김기헌>

 

연대봉에 서면, 멀리 소록도도 보이고, 두륜산과 주작산도 보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라도의 정감어린 산의 풍취를 보여준다”고.

 

 

 

<연대봉에서, 사진;김기헌>

 

천관산 가을 억새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만 때쯤, 억새를 보러 천관산으로 많이 온다고 합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내려올 때,

산을 오르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산등성이에 있는 억새들>

 

억새풀 사이의 산등성이길을

둘째 현이와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눴습니다.

처음 알았습니다.

현이가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고 있고, 암벽 등반을 원한다는 것을.

그것도 한방에 하고 싶다는 것을.

현이에게 얘기했습니다.

“세상에 한 방은 없다. 세상은 준비한 사람에게만 기다려 준다”고.

현이가 이 말뜻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함께 산을 오르고, 함께 얘기한다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즐겁습니다.

 

 

<산등성이 억새길을 현이와 함께 걸으며, 사진;김기헌>

 

환희대는 연대봉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산아래를 내려다 보면

왜 이름이 환희대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산을 오르면, 멀리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습니다.

 

 

 <환희대에서 마당쇠와 함께, 사진;김기헌>

 

<환희대에서 김기헌, 사진;박성인>

 

무릎이 아프긴 해도

내려오는 길은 한결 가볍습니다.

오늘 다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마음을 가볍게 합니다.

끙끙대며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웬지 뿌듯해집니다.

다 내려온 다음

다시 올려다보는 산은

마음을 더욱 뿌듯하게 합니다.

 

 

<환희대에서 내려다본 능선, 사진;김기헌>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24시간 여 함께한 '역사와산' 분들이

마치 1~2년 함께 지낸 벗들처럼 정겨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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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제2의 촛불은 비정규 철폐 투쟁으로 - ‘만인 선언, 만인 공동회의’ 준비하며

촛불 탄생 실화와 배후 & 우리의 꿈

제2의 촛불은 비정규 철폐 투쟁으로

‘만인 선언, 만인 공동회의’ 준비하며…"9일, 우리를 잡아가라"

 

송경동 / 시인

<레디앙> 2008년 09월 05일 (금) 07:43:47

 

 

“한가위 전에 기륭, KTX, 이랜드, 성신여대, 코스콤, GM대우, 도루코, 콜트콜텍, 하이텍알시디코리아, 재능교육, 광주시청비정규직… 그 모든 비정규 노동자들을 일터로 보내줄 수 있다면… 890만 비정규노동자들에게도 눈물바람 없어도 되는 따사로운 한가위가 될 수 있다면.”

 

구로동 후미진 골목과 촛불

 

 

4월,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기 전 나는 서울 구로동 디지털산업단지 내 후미진 골목 속에 있는 기륭전자에서 몇 사람들과 함께 비정규직 철폐의 촛불을 켜고 있었다. 처음엔 누구도 잘 주목하지 않는 작은 촛불이었다. 작을 땐 열 명이 채 안되는 이들이 모여 멋쩍어하며 켰다.

 

며칠 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함부로 생각하고 재단했지만, 하루 나갔을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반성했다.

 

그때부터 구로동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난 저녁 10시 경이면 늦더라도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나도 광화문 네거리를 밤새 떠돌다 먼동이 터오를 때면 다시 돌아왔다. 때로는 해산이 끝나고도 무슨 미련이 남아 프레스센터 앞 노상에 앉아 있다 돌아오기도 했다. 잠시 눈 붙이고 나면 다시 기륭으로 향했다. 그렇게 2008년 봄과 여름이 가고 가을 초입이 되었다.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라고 늘상 표현하는데, 정말 어쩌다보니 ‘기륭비정규여성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기륭여성노동자 투쟁 1000일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3월말부터 공대위를 꾸리는 작업부터 주도적으로 함께 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절반은 기륭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과 한 몸이 되어 버렸다. 5월 11일 하이 페스티벌 마지막 행사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 조명탑에 그들이 오를 때, 5월 26일 다시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오를 때, 다시 6월 11일 공장 옥상을 점거하고 전원 무기한 끝장단식을 들어갈 때, 그리곤 이제 단식 83일차가 되는 오늘까지 그들, 기륭 동지들과 한 몸이 되어, 편파적으로 움직였다. 기륭 동지들을 닮아 시시때때로 눈물나던 날들이었다.

 

목숨 건 투쟁은 동지를 불러모으고

 

비정규 투쟁은 쉽지 않았다. 특히 기륭 투쟁은 3중고, 4중고의 투쟁이었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도 부당해고당했지만 대법에서도 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법외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3년여를 지나오며 사측은 대부분의 라인을 중국으로 이전해 버렸다.

 

고용을 받아줄 공장이 없다는 얘기 앞에 우리 쪽 사람들도 오히려 수긍하는 쪽이었다. 더더욱 지금의 최동렬 회장은 기륭을 인수한 지 6개월이 채 안되는데 왜 자기에게 모두 책임지라고 하냐고 했다.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우리 쪽 사람들도 눈치를 살폈다. 거기다 남은 조합원들도 생계에 나가 있는 사람들을 빼면 10명이 전부였다. 위로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인 투쟁이었다.

 

하지만 기륭 여성 비정규직 동지들은 최선을 다했다. 딱 하나 빼놨던 것, ‘죽음을 거는 투쟁’까지를 선택했다. 그 완강함과 진정성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2008년 상반기 비정규투쟁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몇 명이 외롭게 지켜왔던 농성장엔 이제 나도 모르는 얼굴들이 태반이다. ‘대학생 릴레이단식단’이 들어와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 움직인다. 10개 단체나 모임들이 주도해서 스스로 ‘기륭을 사랑하는 네티즌연대’를 만들고 독자적으로 사업들을 만들어 간다.

 

근자엔 기륭의 주거래사인 미국 시리우스사 공략을 위한 원정투쟁단 보내기 기금 모금 사업을 펼치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1억 짜리 광고를 네티즌 모금을 통해 달성해 보겠다고 한다. 가히 제2의 기륭 공대위가 되고 있다. 광화문 촛불 96차와 103차, 그리고 105차 촛불문화제가 기륭 공장 앞에서 열렸다.

 

광화문 촛불의 수수께끼

 

그러다 보니 근래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기륭이 광화문 촛불과 만나게 되었는지를 묻는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어떻게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네티즌들과 연대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기실 광화문 촛불은 그간 민중민주 운동을 해왔던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투쟁이었다. 전혀 의외의 조직 경로와 여타 전투적 운동들을 넘어서는 완강함, 모두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운동,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창조적으로 자기를 생성해 가는 새로운 자율적 운동 앞에서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평범한 촛불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가 관건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광화문 촛불운동을 처음에 시작했던 사람들을 만나자 의문이 풀렸다. 우연히 4월말 처음 오프라인 집회를 기획했던 네티즌들을 만났다. 촛불이 튀어나온 것은 4월 말이었지만, 나름 지난한 준비가 있었다.

 

처음 아고라 토론방을 중심으로 광우병 소와 관련된 문제 제기를 꾸준히 올리는 이들이 있었다. 금세 여론이 형성되었다. 광우병 문제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주의와 관련한 문제 제기였다. 오프라인에서 갈 곳을 딱히 찾지 못한 수많은 민주 시민들이 토론과 소통에 참여했다.

 

자연스레 까페 모임들이 제안됐고, 너댓개의 소통 까페들이 조직되었다. 네티즌들은 이 까페 공간을 통해 다양한 자체 학습과 공동 행동들을 실험했다. 리플 달기부터, 사이버 리본달기 등등. 어느 정도 조직력이 형성되자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동호회 까페들 조직에 들어갔다.

 

촛불 탄생의 기원 '실화'

 

목적의식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결집해 있는 생활 관련 까페들에 접근해 갔다. 유명한 패션까페, 음식까페, 유명 연예인 팬까페들이었다. 그곳에서 읽을만한 글들을 꾸준히 올리며, 베스트 만들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과 함께 다시 초보적인 수준부터 사이버 공동행동을 실험, 조직해 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상에서 관계와 생동하는 삶을 느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이 밥상머리에서조차 죽음을 느껴야 한다는 현실에 분노했다.

 

수위가 점점 높아져 위력적인 사이버행동들이 진행되었다. 이제 거리로 나설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날짜를 정하고, 전체 까페들에 공지를 올렸다. 4월 26일,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조직 확인을 해보니 1만에서 3만이 확인되었다. 누가 주역이 아니었다. 모두가 놀라면서 2008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모든 새로운 운동은 물론 정세가 밑바탕이 되겠지만 의외의 정성과 노력, 믿음과 꿈에 의해 실현된다. 사이버라고 무슨 신화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일상의 연장일 뿐이다. 사이버 영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편지를 통해 오가듯 오갈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도 유령이 아닌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 만나고자 하면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모두는 평범하다는 사실. 결핍이 그리움과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존중을 연다는 믿음을 가졌다. 서로 외롭고 소외된 존재들이라는 사실. 그런 소외된 현실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 소외되지 않는 만남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광화문에서 갈 곳 없는 사람들

 

비정규 투쟁은 2중 3중으로 소외된 투쟁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이들의 연대와 힘이 필요했다. 그 필요를 향한 간절함이 촛불 네티즌들을 만날 수 있게 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디로도 갈 곳이 없고, 가고 싶은 곳이 없는 뿌리뽑힌 마음으로 새벽을 맞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간절함은 기륭여성비정규직들이 고공에서, 공장 앞에서 1100일씩 노숙하며 가져온 외로움과 간절함과 같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같다. 둘 다 일부 자본들의 초과 착취를 위해 기획된 일이다. 그래서 촛불이 막 시작되던 5월 11일, 서울 시청 광장 조명탑에 올랐을 때 허공에 내걸은 플래카드에도 그렇게 썼다.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라”

 

그때부터 우린 광우병 촛불과 비정규직 촛불의 만남을 염원했다. 2차 고공농성 당시 구로역 광장에서 자연스런 지역 촛불을 켜들었다. 7월 초 아예 1040인 동조단식단을 조직해 시청 광장으로 나아가 청와대로 진격하는 희한한 선도투를 결행했다.

 

우리가 광화문으로 나선 수많은 연약한 촛불 소녀들, 촛불 시민들을 함께 동지로 삼고 도울 수 있는 길은 촛불들의 배후에는 비정규직 투쟁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이었다. 6월 촛불의 배후에서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물론 주체적 준비는 충분치 않았지만 기륭 동지들과 기륭 공대위는 끊임없이 그런 입장과 의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광화문 투쟁만큼이나 절박하고 끈질기며, 완강하게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언젠가 광화문 촛불들이 정신 머리 없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운동권들 탓에 동력을 잃고 실망하며 갈 곳을 잃을 때 작은 곳이지만 올 곳이 있다는 것을 만드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광화문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물론 그런 씁쓸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한켠에 남는 것은 이 시대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여하튼 광화문 촛불도 시들해지고, 기륭 투쟁도 어려워지던 때, 우리는 이제 활력과 분노를 잃지 않고 있는 광범위한 촛불들과 수평적으로 만나가자는 기조를 택했다. 그리고 시도했다. 이미 네티즌들도 기륭을 알고 있었다. 미안해 했다고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광화문을 중심으로 거대한 촛불이 연일 타오를 때는 듣는 시늉도 않던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에서도 요청을 받아 주었다.

 

 

96차 촛불과 103차 촛불, 105차 촛불이 구로동의 조그마한 공단 골목 안에서 지펴졌다. 더 이상 많은 수도 아니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촛불들이 조금씩 모여 들었다. “기륭이 아니었으면 오늘 평일 촛불이 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마음 서늘했다.

 

마지막 촛불을 지키는 이들은 두 부류였다. 마음이 강건한 숨은 일꾼들이거나, 정말 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기쁘게 기륭에서는 이 두 부류의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껏 여러 도움들과 나눔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광화문 촛불의 마지막 지킴이들이었다.

 

가슴 아픈 건 후자의 분들이었다. 우린 수많은 운동 과정에서 얼굴은 다르지만 성정은 말할 수 없이 착한 그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의식과 생활의 간극 사이에서 안주하는 삶을 잃어버린 수많은 이들. 말하자면 허세욱 열사와 같은 분들이었다. 그보다도 어렵고 외로운 삶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KBS 앞에서의 노숙도 힘들어졌을 때 이 분들이 기륭 농성 천막에서 며칠을 기거하기도 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는 분들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농성장 앞 밥집 아주머니에게 얘기해 두었다. 누구든 식사를 달라고 하면 묻지 마시고 밥을 내주시고 수량만 적어놔 달라고. 그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네티즌 사이버 행동이 언론보다 더 큰 힘 돼

 

이런 네티즌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기륭 투쟁의 전기를 맞기도 했다. 그들이 조금씩 기륭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사이버 상에서 움직여주는 힘이, 그간 여러 언론들에서 조금씩 기륭 문제를 다루어주었던 것보다 훨씬 큰 힘을 주었다.

 

그들은 기륭 문제를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투쟁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륭의 주 거래사인 미국의 시리우스사에 대한 항의 메일 조직, 자발적 릴레이 동조단식 조직 등은 그간 기륭 투쟁이 사측과 사회를 향해 해왔던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타격을 넘어 자본 타격의 실마리를 풀어 주었다.

 

그 분들은 광화문의 상징들을 기륭으로 불러 주기도 했다. <아프리카 TV>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나흘간에 걸쳐 기륭 농성장에 상주하며 일상을 네티즌들에게 송출해 주었다. 네티즌들을 따라 <칼라TV>가 들어오고, '촛불다방'이 들어오고, '다인이 아빠' 차가 들어왔다. 며칠 전에는 80그릇의 삼계탕을 끊여 주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분들이 기륭 농성장의 주인이 되었다. 명색이 집행위원장이라지만 사실 그 분들 중 몇 분 빼놓고는 인사도 나눠보지 못했다. 광화문 촛불 대열에서 그랬듯이, 나도 그냥 기륭 농성장을 찾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통제하려 하거나, 지도하려 하거나, 질서지우려 하거나 지휘하려 하거나 통계내려 하지 않았다. 작은 대추리처럼, 작은 광화문처럼 늘 농성장은 편했고, 모두가 주체였다.

 

물론 기륭에서의 경험은 작은 실험일 뿐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시도일 뿐일 수도 있다. 이런 시도들과 실험, 새로운 만남들이 곳곳에서 진행 중임도 알고, 그렇게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정형화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고, 만남이고, 투쟁일 뿐이다. 투쟁이 이어져 나간다면, 이런 만남은 지속될 것이다. 투쟁이 사그라지면 만남도 사그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그라져도 좋을 것이다.

 

기억, 만남 그리고 투쟁

 

필요한 것은 믿음이며, 삶일 뿐이다. 삶이 있다면 만나질 것이고, 삶이 없다면 쓸쓸해질 것이다. 그냥 이렇게 무턱대고 시적으로 말해 버리고 말고 싶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투쟁이라고. 맨날 박터지며 소리지르며 싸우기만 하는 투쟁만이 아니라, 이 부정한 구조와 체재와 제도를 넘어서는 꿈을 꾸는 운동이라고.

 

며칠 전 회의에서 기륭공대위는 기륭 단사 문제를 넘어 비정규직을 만들고 은폐하며 양산하는 이 사회 구조 자체를 문제삼는 투쟁으로 나아가자는 결정을 내리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만인 선언, 만인 행동’에 모두가 힘모아 나서자고 결의했다.

 

제2의 촛불을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통해 만들어 보자고 얘길하고 있다. 촛불 시민들에게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다시 노래하자고, 그 선봉에 890만 비정규직들과 이 시대의 양심들이 함께 떨쳐 일어서자고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게 꿈일 수 있다. 하지만 꿈은 꾸는 순간, 그만큼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꾸지 않으면 실현 가능성 0%이지만, 꾸는 순간만큼은 100%의 고밀도다. 그 밀도가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도 있다.

 

2008년 촛불로 나섰던 수많은 이들을 유령으로 만들고, 신화화, 우상화 시킬 필요없다. 그들도 890만 비정규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일상이 죽음으로 점철되는 신자유주의 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나왔던 것이다.

 

견결한 이들을 만나고 싶어 나왔던 것이다. 반성하며 나왔던 것이다. 정말 헌신적이고 살아 있는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에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목청껏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쳤던 것이다.

 

실망한 촛불에게 말걸기

 

자, 이제 공안탄압과 후퇴해버린 사회운동들에 실망해 실의에 빠진 ‘위대한 촛불’들에게 누군가 말들을 걸어 갈 때다. 우리 서로에게 말들을 걸어 갈 때다. 운동이 폭발할 때 그 파도 위에서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정세를 타고 올라 앉아 묘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새로운 정세,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운동의 계기, 지점을 만들어가는 운동을 안 보이는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한다. 87년 6월 21주년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그렇게 많은데, 왜 87년 7~9월을 만들자는 목소리들은 소수인가? 왜 6월의 이데올로기에 7~9월이 밀리는가. 왜 소수 정규 세상에 다수 비정규 아픔들이 밀리는가?

 

명백한 객관 사실보다 꿈을 더 이야기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엄혹하고 폭력적이며 부조리한 세상이라면 있는 객관에 대한 쓸데없는 재단과 평가, 인정보다는 그 시간에 신기루 같을지라도 더 많은 새로운 꿈이나 꾸며 살고 싶다.

 

차라리 실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조금은 더 양심적인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실패는 아니라는 것 쯤이야 모두가 알겠지. 타협하지 않고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과 대지가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다.

 

이제 모두가 떨쳐 일어서고 있다. 제2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렇다면 지난 시기 노무현당과는 안 싸우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누구와 어떤 정신으로 싸워나갈 것인가? 우리는 우리와 싸운다. 나는 나와 싸운다. 소심한 나와.

 

 

제발 우리를 쥐잡듯 잡아가다오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탁한다. 제발 9월 9일 서울역 앞에서 890만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나서는 우리를 쥐잡듯 잡아다오. 제발 한번만 더 우리의 동지, 우리의 배후가 되어다오.

 

참, 기륭 김소연 분회장 단식이 오늘로 87일째다. 응급처치로 링겔을 가끔씩 맞으니 단식이 아니란다. 시시때때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 바보야. 정말 죽어라는 소리인지. 참 무감하다. 이 사회가. 그리곤 이제 며칠 후면 한가위란다. 한가위란다.

 

* * *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 일정

 

9월 5일, 금,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 (시흥집중)

9월 5일, 금, 저녁 7시, 기륭 네티즌 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기륭 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이랜드 상암 촛불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철도 노조 촛불 문화제(촛불 집중)

 

9월 7일, 금,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시흥 집중)

9월 7일, 일, 저녁 7시 KBS

 

9월 8일, 월, 저녁 7시, 기륭문화제

9월 8일, 월,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홈에버 면목 집중)

 

9월 9일, 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 1차 행동, 서울역

 

9월 10일, 수, 오후 4시~, 기륭 일일 주점(용산 철도 웨딩홀)

9월 11일, 목, 기륭 네티즌 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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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뜨거운 가슴으로 돌아보고, 차가운 이성으로 봐야 할 뉴코아 합의서

뜨거운 가슴으로 돌아보고, 차가운 이성으로 봐야 할 뉴코아 합의서

[기고] 지못미, 뉴코아 노조

오도엽(작가) / <참세상>2008년09월08일 0시47분

 

8월은 끔찍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싸움이 천일하고도 백일이 넘어가고, 김소연 분회장은 차마 기록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의 시간을 단식으로 항거하고 있다. 새마을과 KTX 승무 노동자가 서울역 40미터 철탑에 고공농성에 들어가고 부산에서도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강원도 문막의 도루코 비정규 노동자도 정문 앞에 철탑을 세우고 목이 빠져라 공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충청도 오창의 하이텍씨알티코리아 노동자도 공장에 천막을 쳤다. 길게는 삼천일 이상을 거리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이다.

 

생계를 잃은 노동자에게 하루란 목숨이 달린 시간이다. 이들 노동자를 거리로 내몬 사업주들은 법원에서 부당해고와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법은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사업주들은 아직도 공장을 돌리고 주식과 부동산 투기를 통해 이익을 취득하고 있다. 하지만 법으로 복직 판결을 받은 노동자는 공장 앞에서 한뎃잠을 자야하는 비극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8월의 무더위보다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 앞에서 분노마저 타버려 가슴 속이 하얀 잿가루가 되었다.

 

쉽게 뉴코아 합의를 이야기하는 언론과 사람에 가슴이 아팠다

 

끔찍한 팔월의 마지막 날을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뉴코아 노동자들의 협상타결 소식이다. 사백일이 넘는 뉴코아 노동자의 투쟁이 끝났다는 말에 기뻐 만 할 수 없는 협상안을 들여다보고 어금니를 으스러지게 꽉 깨물어야 했다. 이것은 사업주가 사백일 넘게 싸워온 뉴코아 노동자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내용이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협상의 대상은커녕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와 사업주의 관계가 아니라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주가 노예에게 가하는 채찍만큼 가혹하였다.

 

뉴코아 노동자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보내고 싶었다. 당신들이 이런 사업주와 400일 넘게 싸운 게 얼마나 힘들었으며 위대한 몸짓이었는지 뜨거운 가슴으로 보듬어 주고 싶었다. 당신들의 가슴에 노예주의 채찍에 맞아 깊게 생긴 생채기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신문과 인터넷 언론을 뒤적이며 분노를 하였다. 보수언론은 싸우는 노동자의 어리석음을 욕하고 있고, 진보언론은 그런 협상안에 도장을 찍은 안타까움과 함께 ‘백기투항’이니 ‘굴복’을 들이대며 또 한 번 뉴코아 노동자에게 채찍을 내리치고 있지 않는가. 한 진보 인터넷 언론에서는 인터뷰이를 밝히지 않은 채 따옴표를 쳐서 “뉴코아노조 간부들이 자기 개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팔아넘겼다”는 말을 서슴없이 기사로 내보냈다. 같은 기사에 뉴코아노조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 위원장의 목소리로 “이랜드일반노조의 파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그것도 ‘막대한 영향’이라는 기사를 썼다.

 

지난해 여름 뉴코아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싸움을 위해, 외주화 저지를 위해 정규직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싸운, 그것도 처절하게 434일을 싸운 그 소중한 흔적은 다 지우고 가려한다. 상급단체는 다른 사업장에 ‘막대한 영향’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 싸움을 지켜주지 못한 반성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팔아넘겼다’는 코멘트를 딸 것이 아니라 뉴코아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데 상급단체가 슬슬 꼬리를 뺀 정황을 먼저 다루고 지적해야 옳지 않는가. 노사 합의문의 도덕적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손해배상과 가압류만을 해결하고 노조와 연대조직의 손해배상은 모른 체했다’는 지적이 있다. 노동자들의 피해를 막으려고 서비스연맹도 민주노총도 만든 것이다. 당연히 상급단체에서 그 문제는 싸워야 하고 풀어야 할 문제이지 뉴코아 노동자를 평가하는 도덕의 잣대는 아니다.

 

말하고 싶다. 뉴코아노조의 정규직 노동자만큼만 다른 정규직 노동자들과 상급단체들이 싸웠더라면, 아니 그 절반이라도 싸웠더라면 최소한 기륭전자의 김소연 분회장이 80일이 넘는 단식을 하는 일은 이 땅에서 없었을 거다.

 

지난 금요일 기륭전자 단식장에 갔더니 지금 단식을 중단하면 도루코 노동자의 싸움도 영향을 미치는데 어찌 멈출 수 있겠냐는 말을 들었다. 어떤 기사에서는 “뉴코아 노사의 합의가 이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당장 뉴코아노조와 함께 파업을 시작한 같은 이랜드그룹의 유통업체 홈에버의 비정규직 문제도 직격탄을 맞게 됐다.”라고 썼다.

 

과연 홈에버 노동자는 어떨까? 추석맞이 집중투쟁을 하는 홈에버 상암점을 찾아갔다. 이랜드 노동자의 얼굴을 보았다. 겉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욱 여유로운 모습이다. 이남신 이랜드 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직격탄을 맞을 걱정보다는 뉴코아 간부들이 이 힘든 시간을 어찌 이겨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하루빨리 만나 함께 풀고 싶다는 동지의 애정이 담긴 걱정을 하였다. 협상에서 물론 영향이 있겠지만 이랜드 자본이 얼마나 악랄한지를 보여주었기에 싸움의 정당성과 도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어 우려만 하지는 않았다.

 

맞다. 회사와 합의한 내용 때문에 가슴이 아팠던 것은 아니다. 너무도 쉽게 합의내용을 이야기하고 재단하는 언론과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노동조합의 항복문서였다는 표현에서 다른 장기투쟁사업장에 미칠 파급 효과를 들이대며 비판하거나 안타까워했다. 그 마음은 이해하면서도 화가 났다. 뉴코아 노동자의 434일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루를 싸웠는지 백일을 싸웠는지 천일을 싸웠는지 숫자로 계산하는 일만큼 서러울 때가 없다. 이 숱한 날들이 어찌 노동자가 싸운 날짜이겠는가. 사업주가 싸우게 한 날짜이자 버틴 날짜이지. 노동자에게 그것도 비정규 노동자에게는 단 하루만 일을 하지 않아도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가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도 질기게, 끈질기게 싸워야 얻을 수 있다. 그래야 임금의 노예가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 알면서도, 노동자에게 이 시간은 죽기보다 어려운 시간이기에 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인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도장을 찍은 뉴코아 합의서

 

뉴코아 노동자의 사백일이 넘는 항거를 돌아본다. 그 항거의 순간순간을 뉴코아 노동자의 마음이 되어 바라본다. 이 시간을 ‘뜨거운 가슴’으로 본 뒤에 이번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합의서를 ‘차가운 이성’으로 보았으면 한다. 그 합의서에 인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의 핏발 선 눈을 보았으면 한다.

 

뉴코아 노동자의 투쟁은 많은 희망을 주었다. 비정규악법 시행을 앞두고 시작된 뉴코아 노동자의 파업은 보이지 않는 숱한 곳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일터를 지켜주었다는 것도 알았으면 한다. 지난해 6월, 파업을 선택했을 때 달려갔듯이 이번 합의서의 선택에도 사랑으로 찾아가 뉴코아 노동자를 만났으면 한다. 그 다음에 비판도 하고 평가도 하고 비난도 하였으면 한다. (다만 뉴코아 노동자에게 시간을 준 뒤 만나고 이야기 하자.) 어차피 노동자는 목숨을 건 끝없는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니까. 앞으로도 지난 1년보다 더 어려운 선택을 뉴코아 노동자는 끊임없이 해야 하니까.

 

이제는 당분간 뉴코아 노조에서 보내 올 문자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문자를 받을 게 아니라 보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당신의 집과 적금통장이 손해배상에 가압류를 당해야 하던 순간, 가정이 파괴되려던 순간, 생계에 허덕여야 했던 순간, ‘지 못 미’ 였다고.

 

어렵게 뉴코아 조합원과 인터뷰를 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8월 초에 지부 조합원들과 현장에 복귀했는데 무슨 말을 하겠냐며 말을 아꼈다. 18명의 해고자 문제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평생 응어리로 안고 살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물론 외주화 부분도 아쉽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후 어찌되더라도 마지막까지 간부들이 비정규 노동자의 고민을 놓지 않은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뉴코아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얻은 것 하나 없다. 하지만 뉴코아 노동자의 434일의 투쟁은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싸움으로 남을 것이다.

 

싸움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타협도 있고 굴복도 있다. 노동자의 싸움은 그 결과를 떠나 그 과정이 너무도 귀중하다. 그 귀중함을 스스로 지울 필요가 없다. 박양수 위원장과 함께 술 한 잔 할 날을 기다린다.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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