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관계의 전복을 꿈꾸는 왜곡된 언어유희를 넘어

category 감놔라 배놔라 | Posted by 오씨 부부 | 2013/10/02 21:00


 

지난 봄에 청담동 결혼 관련 업체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이 이상한 말투를 처음 들었습니다. 바로 "~하실게요"라는 말투인데, 그 이후로 이곳저곳에서 참으로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계단으로 내려가셔야 합니다", 또는 "내려가(주)십시오"가 아니라 "내려가실게요" 하는 식인 거죠. 처음에는 요새 하도 '진상'들이 많아서 자칫 명령조로 듣고 '진상짓'을 할까봐 미리 극존칭 비스무리한 청유형 표현을 쓰기 시작했나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그쪽 지역의 해당 업계에서 쓰는 특수한 접대용 멘트인 줄로 알고 잊고 있었는데, 점점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어제도 상점 점원에게 또 그런 투의 말을 들었는데 하마터면 "예, 고마우실게요, 안녕히 계실게요"라고 하면서 가게를 나올 뻔 했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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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듣게 되니 자연히 직업적(?) 호기심이 일더군요. 그래서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이런 투의 말이 혹시 요즘 연예인 말투를 따라 유행하는 것이 아닐까 알아보려고 한 포털에 가보았습니다. 그 검색창 바로 밑에 위와 같은 배너가 있더군요. 아무튼 검색을 해보니 예상대로 한 개그 프로그램의 말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군요. 뭐, 언어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며 문법나 어법, 혹은 표준어, 어휘의 사전적 정의 등등이 문화적 구성물(cultural construction)에 불과하다는 입장이고, 또 바르고 고운 국어를 사용하자고 힘주어 말하고 다니는 편도 아니며 유행에 시시비비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들어 포스팅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2년 전 한 신문에 <’~실게요’라는 말 듣기 싫다>라는 제하의 칼럼이 실린 적이 있더군요. 또 한 달 전에는 해당 개그 프로그램에 대한 한글연대의 문제 제기가 신문에도 실린 적이 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해당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주의를 당부하는 자막을 넣었다거나 국립국어원에서도 경어법 개선을 위한 동영상을 제작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미 물이 엎질러진 상황인 듯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포털에서 ‘실게요’라는 키워드로 검색 가능합니다.

 

’강남스타일’ MV의 인기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과장과 과잉’에 대한 풍자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해당 개그 프로그램의 담당 PD 역시 과도한 경어법의 사용을 통해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뭐, 있을 수 있는 기획의도라고 생각합니다. 또, 해당 프로그램을 보고 웃으려면 그것이 잘못된 경어법임을 알고 있어야 웃음이 나온다는 한글연대의 지적도 역시 타당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따라하거나, 아니면 잘못된 경어법인 줄 알고도 유행이니까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모르고 쓰는지, 알고 쓰는지 입증할 수는 없지만 어느쪽이든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남을 존중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영국 여왕이라고 하면서 그 아들은 황태자라고 한다거나, 형이라고 부르면서 해라체를 쓰면서 그 아내는 형수님이라 부르면서 합쇼체를 쓰는 걸 보면 격에 맞게 존칭과 경어체를 사용한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친소 관계나 맥락과 관행까지 고려해야 격에 맞는 말을 쓸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나는 가치중립적이며 문화상대적으로 사안을 보는 사람이므로 격에 맞는 올바른 말을 쓰자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일이라도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므로 저마다 다른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거죠.

 

매년 몇 건씩 꼭 있는 반말 시비로 인한 살인 사건들, 반말과 존대말에 담긴 문화적ㆍ언어적 차별의 정치학, 평등을 가르치겠다며 어느 대안교육 현장에서 존대말을 없앤 우스운 사례, 반말을 없애고 존대말로 통일하자며 나에게 반말로 얘기했던 어느 교수 등등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오히려 나는 좀 다른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른 언어들에 비해 경어법이 정교하게 발달했다는 식의 자화자찬을 넘어 언어 자체가 좀 단순해지고 쉬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 다른 언어 사용자들이 쉽게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의 힘이 커질수록 영어를 배우느라, 비싼 돈 들여 외국에 유학 가느라 수고를 덜 하게 됩니다. 한국에 와 있는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100만 명을 헤아리는 시대에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이 될 것을 요구하며 한국어를 조금만 이상하게 구사하면 차별을 합니다. 찬드라 쿠마리 구룽 Chandra Kumari Gurung의 비극이 바로 그런 차별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상한 말들을 쉴새없이 만들어서 마구 쓰고 있습니다. 외국에 퍼져나간 한류와 한국어의 위상에만 기뻐할 게 아니라 이 사회에 와 있는 100만 명의 외국인들이 쉽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어의 파급력이 커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경제력이 커지면 된다거나 하는 식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가치를 높이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배우도록 하려면 말입니다. 결국 세계사에 공동의 책임을 갖고 인류와 생명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욕투성이에 온갖 줄임말과 은어들로 채워진 한국어를 외국인들이 배워서 우리에게 한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한국어를 새로 배운 사람들이 우리에게 “안녕하실게요”라고 한다면 우리의 유행어도 아는 쿨한 외국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유행처럼 번지는 틀린 영어를 미국의 대학생들이 구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 생생한 영어라며 무작정 따라 배워야 하는 건가요? 정의로운 의식을 품위있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야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부가 세종어학당을 만든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 여행갔을 때 일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여서 노점상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야, 이거 천 원이야”. “오빠 이거 싸, 천 원인데 안 사?”라며 우리 일행에게 호객을 하더군요. 아니, 이사람들이 왜 반말을 하나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가 그들에게 하던 반말을 한국어랍시고 듣고 그대로 배워서 쓰는 것이었습니다. “”네게서 나온 것은 네게로 돌아간다(出乎爾者 反乎爾者也)”는 증자(曾子)의 말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이제 한국어는 더 이상 한국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한국어가 각종 국제회의의 공식 언어 중 하나로 발돋움하고 있는 이때, 한국인들이 스스로 맥락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며 아파트값에 정신 팔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니라 외국글을 배웠느냐가 사람 평가의 근본이 되는 세상이 싫다면 우리가 쓰는 말의 힘을 길러야 하고, 그러려면 부강한 나라 만들기가 아니라 상궤를 벗어나지 않은 언어와 바른 마음으로 세계에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도, 아이들의 외국어 발음을 위해 혀수술을 하는 세상이 너무나 한심할 따름입니다.

 

 

* 참고로 이런 일종의 왜곡된 언어유희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척하지만 실은 명령하고 통제하는 위선적 권력을 대중이 간파하여 프로그램과는 상관없이 탈맥락화해서 당연시되는 권력관계에 도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상', 혹은 블랙 컨슈머에 의해 갖은 시달림을 받는 서비스 업종, 그 중에서도 감정노동(emotional labor)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할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비행기 안에서 행패를 부린 대기업 임원이나 호텔 주차 문제로 도어맨 폭행한 기업체 사장 등의 사건에 대중이 매우 빠르게, 그리고 크게 공감했던 것, 그리고 사회적으로 '갑을관계'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현실과도 연결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 현상이 권력관계에 대한 전복을 반영한다면 이런 언어를 구사해서 '갑'의 기분을 언짢게 만드는 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제임스 스콧 James C. Scott이 <약자의 무기 Weapons of the Weak>에서 보여준 것처럼, 약자들의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런 분석 위에서 배우기 쉬운 한국어를 다듬자는 말을 하는 것이므로 혹시나 코리안 랭귀지 쇼비니스트라고 생각하시지는 말기 바랍니다. 영어로 버리는 돈이 얼마입니까, 그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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