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적 존재로서의 인간

category 감놔라 배놔라 | Posted by 오씨 부부 | 2013/11/05 15:31


 

일부 경제학자들이 현실과 무관하게 가정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한 무한경쟁이라는 발상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괴물이 되어 우리 삶을 오늘날처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수리경제학의 가장 큰 문제점이랄 수 있는 숫자와 논리만으로 세상을 본다면 아닌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이윤을 목적으로 움직이면 더 빠른 부의 증가가 가능하겠지요. 논리만 따지는 학자들의 세계에서는 제곱해서 -1이 되는 허수 i 라는 개념까지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그런 논리적 정합성만 따지는 수학에 기초한 수리경제학적 모델로 세계를 움직이려 하다보니 이론에 사회를 두들겨 맞추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수학이나 경제학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의 차이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현실을 관념에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정 시간이나 일정 공간, 또는 우리 삶의 일정 분야에서 어슷비슷하게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온갖 변화를 통제해 가며 애초의 생각대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혁명이 한 세대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고 깨달은 이치를 다시 세상에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道)를 도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道可道 非常道)는 노자 철학의 핵심 구절이 바로 그런 것을 말한 것이겠죠. 쉬운 말로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말이 바로 그겁니다. 모든 사람들을 더 심한 경쟁에 노출시키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보다 더 효율적이고 더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은 여러 가지 조건과 변수가 통제된 경우에나 일부 가능한, 즉 '가정'에 불과하며 현실에서는 제대로 된 검증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합리적인 것이 현실에서는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경우가 많은데, 특히나 국가 단위의 일을 처리할 때 기획과 실행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으므로 이론과 달리 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론을 위한 이론을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경제적 이윤을 추구한다"는 가정에 동의를 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사람은) 따라서 경제적 이윤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것을 얻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라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중대한 오류는 '사람'이라는 말이 지극히 추상적이며 보편적으로 쓰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앞에 어떤 형용 수식이 없는 말들은 절대적인 말들입니다. 조건이나 예외 등이 없는 언어인 것이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확인할 수도 없는 온갖 변수들에 의해 조건들이 변하는 예외적 상황의 연속이 현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입니다. 현실은 수학과 관련이 있지만 수학 그 자체는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보여주면 모두 침을 흘린다고 가정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학자들이 학문 자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등장시킨 개념들과 논리를 현실에 대입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입니다.

 

이 생각에 동의한다면,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유를 원하고 저마다의 권리를 주장하며, 경제적 평등을 추구한다"라는 명제도 사실은 명제가 아니라 그냥 가정일 뿐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오늘날의 민주주의도 실은 사상가들의 가정 속에서 등장한 논리의 문제일 뿐입니다. 추상적 관념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현실 속의 구체적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떤 때는 정치적 판단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신의 자유나 권리에 무관심하기도 하고, 남을 짓밟을 때도 있는가 하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는 아주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존재입니다. 학자들의 이념형으로서의 천부인권이나 시민계약 등등의 관념에 기초한 오늘날의 사회는 인간이 꾸며온 수많은 사회의 한 형태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으니까 옳은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봉건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봉건적인 질서가 자연의 질서라고 믿었으니까요.

 

신자유주의의 부당함과 학자들의 관념과 이상을 현실에 온전히 실천할 수 없음에 동의한다면, 인간이란 정치적 자유나 권리에 뜻밖에 무심하기도 한 존재라는 것에도 역시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파괴되어도 그냥저냥 살아가는 거죠. 이것은 독재를 받아들이자는 따위의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은 거대한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도 맺고 있지만, 반대로 그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움직이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삶의 모든 국면에서 정치적 권리와 자유, 평등을 추구한다고 믿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합리성을 추구할 때도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경제적 인간'이라는 말로 규정해서 언제 어디서나 합리성을 요구하는 제도를 만들어온 경제학적 사고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인류의 최고 가치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도외시하고 관념만 발전시키는 것은 쉽게 폭력으로 변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정권 획득, 혹은 법제나 정부 형태와 같은 권력의 형식, 또는 정견과 지지층에 따라 이편과 저편을 갈라서 싸우는 정당제도,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정치에 대한 피로와 혐오가 짙어지는 현상 속에서 삶의 고통과 행복에서 멀어지는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이 된 무언가를 추상화해서 이해하고 표현하는 그 능력으로 인해 대상을, 특히나 '인간'과 '사회'를 극히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절대적 인간관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변화와 다양성을 '예외'라는 것에 구속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모든 사회적 제도는 그러한 인간관에서 나온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근대적 관념으로서의 '인간'의 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근대적 사고에서의 '예외'가 실은 따로 범주화할 성격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자 우리 인간의 항시적인 모습이며 그러므로 인간을, 사회를 규정하고 어떤 특정 관념에 따라 체제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예외'를 만들어내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말 지구상에 예외적인 존재인 셈이죠. '인간'을 다루는 몇몇 학문들이 '인간'이 예외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새로운 인간관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 중인지, 아니면 기존의 인간관을 더욱 강화하는 중인지 큰 흐름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새로운 인간관에 대해 고민을 하거나, 적어도 모든 상황은 예외 상황이라는 인식 - 보편과 특수의 구분이 없는 - 사회를 규정하고 제도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이해를 해야겠습니다. 이론화해서 모델로 정립을 하고 그에 따라 현상을 맞추는 것은 더 이상 학문도 정치도 아니고, 단지 폭력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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