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의 번역 문제

category 관주와 비점 | Posted by 오씨 부부 | 2013/11/27 19:54


 

개인적으로 영문학 전공자들의 한국어 실력에 황당해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또다시 실망을 하게 된 일을 겪었습니다. 대략 10년 전쯤 영미문학연구회가 번역평가사업단을 꾸려서 영미 문학작품의 국내 번역본에 대한 검토 작업을 진행했고 결과를 책으로 묶어낸 적이 있습니다. 평가의 주요 조건으로 원문 충실성과 가독성을 중심에 둔 모양인데, 이 평가 결과를 보고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을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요즘은 지역 도서관들이 잘 되어 있어 주민들이 책 빌리기도 참 좋습니다. 예를 들어 경기도는 인구 5만 명당 도서관 하나씩을 짓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유네스코 같은 곳에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평가하는 양적 자료로 쓰입니다. 이런 정책의 배경에는 점점 '소프트 파워'가 중요해지는 세계적 흐름과도 관련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재정지출, 특히 건설을 통해 육체노동으로 살아가는 경제적 약자들의 민심을 달랠 수 있는 데다 과거와 달리 문화 향수에 대한 시민의 욕구를 채워야 한다는 정치권의 계산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위 연구회가 추천한다고 해서 국내 영문학계의 원로 중 한 분인 유종호 교수의 번역본을 빌려왔습니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글을 올립니다. 나 자신이 학술서 1종을 번역하는 중인데, 이런 작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참 쉽지가 않죠. 하물며 문화가 완전히 달라 낯선 상징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문학작품을 번역하기란 더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회적으로 불거져 나오는 번역 논쟁을 비교적 너그럽게 보는 편입니다만, 역자 스스로가 저간의 사정을 밝히기까지 했음에도 단순히 역자의 문제가 아닌지라 여기서 다시 지적을 하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1967년 유 교수에 의해 국내 초역이 됐고, 1980년대 초반에 작가 윌리엄 골딩 William Golding이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유 교수 번역본은 1999년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하나가 되어 2006년에는 26쇄를 돌파합니다. 작품 자체가 워낙 유명하여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스테디 셀러임이 분명한 거죠. 민음사 본의 뒷표지에는 영미의 학생들에게 많이 읽혀 작가 윌리엄 골딩이 '캠퍼스 대왕'으로 불린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원작의 영어가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원서를 확인하니 고등학생이라면 일단 단어에서 막힐 일이 없는 수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의 고전은 다 그렇습니다. 쉬워서 널리 읽혔고 그렇기에 독자들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는 것이죠.

 

그런데,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유종호 파리대왕"으로 검색해 보면 쉽게 나옵니다만, 이 번역본에 온갖 비판이 많습니다. 특히 오타와 비문은 제쳐두더라도 일상에서 쓰지도 않는 온갖 일본식 한자어 범벅이라는 지적에서  쉽고 간결한 원문을 지루하고 상황에도 맞지 않는 문어체로 바꾼 것에 대한 질타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책 속의 사례는 아니지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사계절, 사철 등등의 말을 쓰긴 해도 '사계'라는 말은 안 쓰는데, 일본에서 비발디의 곡을 그렇게 부르니까 그냥 우리도 따라하는 겁니다. 이 책 첫 문장에 나오는 the lagoon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전의 뜻풀이 중 가장 활용 빈도가 낮은 초호(礁湖)도 아니고 초호(憔湖)라는 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자가 다릅니다. 보통 초호는 돌 석 변이 있는 礁을 쓰는데, 이는 암초를 말합니다. 그런데 번역본에서 쓰인 憔는 파리하고 야위어 수척하다는 뜻입니다. '초췌하다'고 할 때 쓰는 글자지요. 역자가 작품 도입부의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너무 오버한 겁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봤습니다.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고 평가되는, 그 유명한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를 만든 피터 브룩 Peter Brook이 감독한 같은 이름의 1963년도 영화를 보면 첫 장면의 해안은 그냥 활처럼 휘어진 갯벌일 뿐입니다. 1967년의 지식인들이 그런 말을 생활 속에서 사용했을지라도 오늘날 청소년을 위한 고전으로 추천되는 상황이라면 그에 맞게 바꿔줘야 하지 않을까요? 더 웃기는 것은 활처럼 휘어진 해변가를 번역본에서는 '궁형(弓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11쪽 하단인데요, '활 모양'을 뜻하는 것이니 형벌을 뜻하는 刑이 아니라 형태를 뜻하는 形을 써야 맞죠. 이런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딱 여기까지 읽고 책을 덮고 검색을 해봤는데, 한 네티즌이 상세하게 예를 들어가며 비판한 글이 있더군요. 그를 비롯해 많은 네티즌들의 솔직한 평가가 동종 분야의 원로 교수를 후하게 평가한 영미문학연구회 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물론 현실성 없는 어색한 문어체야 오래된 초역본이니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까지 우리는 그저 이해해 주는 입장에 머물러야 할까요?

 

원작의 맛을 훼손한 "발번역" 문제가 2006년까지 바로잡히지 않은 채 한국의 수많은 도서관에 꽂혀있고, 개인들이 원작의 유명세에 혹해 책을 구입하였을 것입니다. 이쯤되면 출판사가 아니라 산채(山寨)입니다. 그것도 국내에서 문학 방면의 큰 출판사가 말입니다. 독자는 또 어떻습니까. 수십 년 동안 수백 만 명이 적어도 11쪽까지는 읽었을 텐데, 어느 누구도 출판사에 이의 제기를 안 한 것입니다. 피드백 할 줄도 모르고, 그저 유명하다니까 번역이 엉망이어도 읽은 척하거나, 혹은 원서를 실제로 펼쳐 보지도 않고 영어에 좌절하며 수십 년간 지내온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작, 평론가들의 현학적인 찬사, 서울대 출신으로 뉴욕주립대에서 유학한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번역 당시에는 아니었지만)라는 직함이 주는 권위, 유명 출판사의 '선집', 워낙 유명해서 읽은 티를 내야 할 것 같은 지적 허영 등이 똘똘 뭉쳐서 어느 누구도 감히 비판을 못하다가 인터넷의 익명성과 상호연결성 덕분에 너도나도 솔직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다놓고 아무도 제대로 안 읽고 항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역자들은 원문도 제대로 안 읽고 일본어 번역본을 기웃거리며 초역을 베끼고, 출판사들은 표지만 바꿔 수십 년을 거저 돈 버는  관행이 지속되는 한, 그리고 동종 학계의 원로 교수라 매운 소리 못하는 지적 똘마니 기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대학과 지식산업계의 풍토가 계속되는 한, 잘한 번역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차분히 책 읽을 시간을 안 주는 채로 수십 년을 살아왔으니 사회가 이 모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서관만 지으면 뭘합니까. 그냥 아파트 짓다가 잠깐 바람 피우는 것밖에 안 되지요. 동네 도서관에서 보니, 자주 책 빌리는 주민에게 대출 권수를 상향 조정해 주는 서비스를 하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많은 책을 빌려준들 대출 기간을 늘여주지 않는 이상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책 읽을 시간이 없고, 그러니 번역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꿈도 못꿀 일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제대로 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사회입니다.

 

아무리 좋은 번역이라 할지라도 수십 년이 흘렀으면 언어도 바뀌게 마련이라 역자가 다시 손을 대든가, 그동안 번 돈으로 출판사가 새 역자를 구해서 새 번역을 내놓아야죠. 이러니 번역본을 안 읽거나 아니면 아예 원서를 읽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 가서는 한국어는 소용 없다고 하며 영어 교육에 온 사회가 미친 것 아니겠습니까. 기번역된 학술도서들에 대해서도 상당 수가 전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이 번역했거나 일역을 다시 번역했고, 심지어는 대학원생들이 수업시간에 나눠서 번역한 것을 적당히 고쳐냈다는 소문이 돕니다. 말해야 입만 아픈 세상이지요. 그걸 자기 업적으로 넣어서 교수로서의 유명세와 권위를 누립니다. 외국 대학들의 DB가 갖춰지기 전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지 국내에서 검증조차 제대로 못하고 그저 졸업장만으로 교수가 되어 행세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특히나 프랑스, 독일 등에서 유학한 사람들의 박사 논문은 정말 유통이 안되어 대학사회 안에서도 평가가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는 책을 읽어도 훨씬 더 읽었을 국내 박사들을 대학에서 내모는 상황입니다.

 

다른 사회보다도 더 심한, 우리 사회의 권위라는 것이(결국엔 권력으로 이어지는) 얼마나 허상인지, 그리고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를 허물고 정보와 권위를 나누는 것이 결국 어떤 것인지 생각을 좀 해야겠습니다. 일반인들이 굽실거리지 않으면 지식인이니 뭐니 하면서 앞에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행세 못합니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많은 문제가 있지만, 내부고발을 포함하여 건강한 비판을 쉽게 하는 역할도 때로는 하고 있으며, 특정 영역에서 역량있는 개인들이 상호연결되는 것이야말로 허울 좋은 권위들을 깰 무기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소프트 파워든 한류든, 국수주의자들의 역사인식처럼 뒷방에서 용두질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제목부터가 오역을 바로잡지 않고 지금까지 <파리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책의 문제는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많은 부조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포함해서 다른 모든 작품들까지 정말로 좋은 번역들이 어서 나와주길 바랍니다. 다른 나라 장인정신 예찬할 필요 뭐 있습니까, 스스로 기본에 충실한 장인이 되면 그뿐이죠.

 

 

덧붙이는 내용

 

번역은 아동 및 청소년 문학에서 특히 더 문제가 됩니다. 이에 대한 사례는 2012년 <독어교육> 제55집에 실린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관련 문제를 다룬 논문들이 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번역 작업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사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의 언어습관이란 생각보다 빨리 변합니다. 그래서 당시 번역된 많은 문학작품들이 지금 관점에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1960년대의 초역 작업 자체를 탓하려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어느 누구라도 처음 하는 일은 서툴게 마련임도 감안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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