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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가는 글~


“우리는 패밀리 아이가?”

     
운동단체들은 무엇을 ‘노동’으로 보고 있나

조주은 기자
2005-05-23 22:50:45


3년 전에 남녘 끝자락에 위치한 노동운동단체로부터 여성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강의요청을 받았다. 당시 나는 그 분야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남성노조간부는 다시 내게 간절하고 급박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 왔고, 그들의 집요한 요구에 더 이상 거절하기가 힘들어 덜컥 “하겠노라”고 대답해 버렸다.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단 2시간의 강의’라는 내 노동은 무려 20시간 이상의 비가시적인 노동을 필요로 하였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먹는데 20분도 걸리지 않지만 식탁에 음식을 차리기까지 메뉴작성서부터 장보기, 음식 만들기까지 가려지는 노동시간이 200분이 넘는 것처럼. 원래 계획되었던 일정 변경하기,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본부에 찾아가 자료를 구입 해서 공부하는 일, 아이들 돌보는 문제 등 신경 쓰고 미리 준비해야 할 노동들이 한 두가 지가 아니었다.



‘강의제공’이라는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그 노조간부는 내게 장문의 메일을 통해 그 지역의 노동운동 현황과 더불어 원하는 강의내용을 보내왔다. 나는 궁금한 게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중요한 강의를 내게 부탁하면서 강사료로 얼마를 주겠다는 거지? 공항도 없는 오지인 그 지역에 내려가게 되면 하룻밤 자고 와야 할 터인데 숙박은 해결해 주는 건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질문을 뒤로 한 채, 강의 당일 곤하게 자고 있는 아이 둘을 깨워 새벽기차를 타고 남녘 땅으로 출발했다.

두 시간의 강의는 금방 끝이 났다.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강사료가 든 봉투를 열어보며, 나는 민망함을 맛봐야 했다. 상대적 고임금을 받는 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남도의 노조가 강사노동자인 내게 지불한 강사료는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들은 단지 ‘2시간의 강의노동에 대한 대가’만을 주었던 것이다.

그 속에는 왕복 교통비, 온전히 내 하루 24시간을 소비하고 다음날까지 회복되지 않는 여독으로 인한 영향, 강의를 준비하기까지의 비가시적인 노동과 감정노동들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들만의 노조발전을 위해 잠시 소모품으로 사용되었을 뿐 강의라는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내가 한 행위는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동지애(love)’를 발휘한 것이지 노동으로 취급 받지 못했다.



‘동지애’, ‘자매애’ 속에 가려지는 다양한 노동

여성들은 자신의 계획을 일정 정도 포기하거나 미루고서 가정에서 일을 하고 자녀들을 돌보지만, 사회는 그것을 ‘모성본능’에 입각한 ‘자녀사랑’이지, 보살핌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가사노동의 현주소처럼, 역설적이게도 노동운동단체들이 더 ‘노동’에 둔감한 면이 있다. 그들에게 노동이란 오로지 작업장, 교실, 사무실에서 공식적인 임금을 받고서 수행하는 행위로 국한된다. 나머지는 오로지 자신들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하부에 귀속될 따름이다.

장기파업으로 인해 지친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특정 강사를 불러 강의시키고 문화운동단체를 불러들여 풍물공연, 노래공연도 요구하고 영상단체에 문의해 영상을 틀어달라고 급박하게 요청하는 단체들. 이 때 강사노동자, 문화일꾼들은 자신들의 더 큰 노동운동에 복무해야 할 하부단위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행여 그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의 대가에 걸 맞는 공연료나 강사료를 요구했다가는 ‘돈에 맛이 간’ 사람,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낙인 찍힐 따름이다.

그러나 각종 문화공연과 강연 역시 공식적인 일터에서의 노동만큼이나 소중한 노동들이다. 다양한 운동조직에 가서 그들의 코드에 맞는 강연노동, 문화공연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들을 불러대는 노조나 운동단체들은 몇 안 되는 강연노동자, 문화일꾼들을 먹여 살려줄 일정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비 등 일정수준 이상의 수입이 있는 운동단체들은 조합원과 회원들을 위한 교육용 강연, 영상과 문화공연을 집요하게 불러들이지만 노동의 대가인 공(상)연료, 강사료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 노동을 빼먹는 데는 엄청나게 집요하고 재빠르다.

문화일꾼들이 그 놈의 동지애 때문에 얼마를 주는지도 모르고 가고, 주는 대로 받고, 그나마 그것도 약속된 날짜에 입금이 안돼서 어렵게 연락했을 때 “우리가 드려봐야 차비밖에 안될 텐데 뭘 받으려고 하냐”고 반문하는 노동운동단체들. 그들이 생각하는 ‘노동’은 과연 무엇일까? 또한 여전히 운동단체에서조차 남성토론자에게 여성토론자의 몇 배에 해당하는 예우를 하는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을 수행하지만 여전히 ‘사랑’, ‘동지애’, ‘자매애’ 속에 가려져, 오히려 (조직을 운영하는 일정수준 이상 재정규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조직들에 의해 차마 말 못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돌보는 노동자, 여성 강사노동자, 문화일꾼들이 하는 다양한 노동의 의미를 되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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