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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b, 100일 추카 기념대작 "왜 태어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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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그까짓 국가를 빌려 버릴까하는 충동

 

차라리 그까짓 국가를 빌려 버릴까하는 충동


완군 / 문화연대 활동가 ssamwan@jinbo.net


그래요, 곧잘 난 사랑이란 거대한 무력 앞에서 꾸역꾸역 ‘맹세’란걸 했었어요. 그땐 달리 무얼 더할 방도도 없었으니까요.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그런데 잉여 감정이 사라지고, 술기운에 들썩이던 세포도 숨을 죽이고, 도저히 철들 것 같지 않은 나이에도 봄날은 가고 나니 찬란하게도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이런 제기랄. 잉여 이성 부족 상태인 감정에 자꾸 들이붓던 모든 행위들이. 또다시 사랑을 하겠지만 이젠 ‘맹세’라는 걸 하진 않을 거에요.


그런데, ‘국기에 대한 맹세’라니요. 한때 아무도 그걸 거절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지요. 맹세를 대행 수령하는 선배가, 담임이, 학생주임이, 교장이, 상사가 일수쟁이 도장 찍듯 그걸 거둬들였으니까. 나도 거절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누구라도 그걸 거절 할 수는 없었을거에요. 난 아직도 멍하니 앉아  있을때면 그 우스꽝스런 광경이 떠올라 온 몸에 소름이 끼쳐요. 2002년이었던가, 개미 새끼들 까지도 경적을 울리며 국기를 흔드는 풍경이 가관이라 싶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가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높다고 말한다면 정신 감정이라도 의뢰해야 할까봐. 그건 차라리 거대한 “국가 이미지 사기“에 가까워 보여,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어느새 내 정신과 나의 의지와 나의 행동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가끔 나의 공상들은 너무 막막하고 기가 막혀서 나조차 질려버려. 이런 일들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굳게 맹세하며 잠이 들고 또다시 일어나 신문을 펼쳐들면 이런 일들이 틀림없이 어제의 스포츠문화정치경제사회면의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으니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일이야. 내게 ‘국기에 대한 맹세’가 그런 일이라고 할까. 여기가 자구 또 자도 해가 솟지 않고 늘 밤인 나라가 아니라고 한다면 말이지. 정말이지 그 누군가에 묻고 싶어


“나에게 그 국가를 하루만 빌려줄 수 없나요? 이놈도 그따위 맹세를 통해 국가에 대한 뭔가 뭉클함이 한번더 생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될 텐데... 그럼, 쉬이 편할텐데. 이래 뵈도 나도 한때는 잘 나가는 애국주의자였답니다. 지금은 당연히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런데 감히 어찌 맹세 따위를 할 수 있겠어요. 경찰을 동원해 날 때리지만 않는다며, 앞 다퉈 고리사채와 매매혼을 장려하지만 않는다면, 꼬질꼬질한 손에 동전 몇 푼 쥐어주며 생색만 내지 않아도, 애국조회가 내 꿈에 악몽으로 재현되지만 않아도 어떻게 해 볼텐데... 뭐 그래도, 아직 거짓 연기 하나만은 자신있으니까. 그러니 나에게 차라리 국가를 빌려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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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1.

까마득하게 먼 어느날의 얘기같지만, 월드컵 반대 캠페인을 할때 연 블로그다.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일부터치는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이 블로그를 열었을텐데 새 블로그를 열려니 또한 까마득하다.

 

그래서, 그냥 아쉬운대로 여기로 이주했다.

 

2.

네이버와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올린 글을 네이버에서 명예훼손의 이유로 무단 삭제했다.

순간에 비분강개해서 덧없는 열의를 부태웠지만 금새 사그러들었다.

 

때때로 '편리함'과 '치욕'은 동일어이다.  

 

3.

전도연이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

아무 이유없이 '여우'란 말이 매우 낯설게 읽혀졌다.

 

'밀양'에는 '초록물고기'의 정밀함이 없고, '오아시스'의 대담함 또한 없었다.

이창동의 영화는 언제나 문어체처럼 경직되어있다.

 

쿼터가 폐지되기 전의 이창동과 폐지 이후의 이창동이 내게 다른 사람이란 것도 알았다.

 

4.

만취의 질주가 계속될 뻔 했고, 어제 맥주 1병으로 급제동을 걸었다.

몸은 부시시해지고, 맑지 못한 변이 지난주 내내 심경을 복잡하게 했다. 

긴장감이었는지 기능을 못하는 버티칼때문인지 아침 7시에 눈을 떴다.

수면 안대를 사야겠다는 생각과 2시간을 빨리 더 자야겠다는 생각이 거의 동시에 스쳤다.

 

5.

할 일은 많고 잡념도 많다.

부유하는 허송세월이 매초마다 반복된다.

어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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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월드컵 보려고 하이마트 다녀왔습니다~”

[월드컵 너머 연속기고](5) - 월드컵문화, 광고, 문화교육

 

꽃분홍 볼터치에 늘씬한 다리, 손에는 북실거리는 응원숄을 들고 현영은, “월드컵 보려고 하이마트 다녀왔습니다~” 발랄하게 재잘거린다. 지난달만 해도 비음 섞인 투정어린 어투로 “월드컵만 봐~”를 얘기했던 그녀는 이젠 집에서도 월드컵 패션이다. 놀라운 진전이다.

그런데 그녀의 마론인형틱한 인상과 몸매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일상적이다. 머리두건, 티셔츠에 짧은 청치마, 무릎까지 오는 스타킹... 타 광고모델과 비교하면 참 촌스럽다. 그러나 월드컵 시즌엔 촌스러운 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대부분의 소비자가 취하는 패션이며, 월드컵 문화의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이마트는 두 번 소비자에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월드컵을 활용한 광고들은 대부분 보편적인 사람들의 이미지를 취한다. 다른 때라면 빨간티셔츠에 금딱지라도 붙였을 광고들일 테지만 유독 월드컵 시즌에는 보통사람들이 즐기는 월드컵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미지전략으로 선택된다. 오히려 월드컵의 붉은 전사보다 수많은 붉은악마 혹은 응원하는 소시민 한사람의 이미지가 중요해 보인다.

 

보통 때면 X세대, N세대, ‘나는 소중하니까요’를 주입하여 자사 상품의 소비자로 호명하는 광고지만 이제는 다를 것을 주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다 더 똑같으라고 한다. 아주 열광적으로, 혹은 진지하게 응원하는 소시민으로... 이렇게 광고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자발적 문화를 취해 오히려 명령하는 등 응원하는 사람들을 쥐락펴락한다. 

 

["월드컵 보려고 하이마트 다녀왔습니다~"] 기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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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월드컵 보러 방송국 떠난 공공성을 찾습니다

평택 미군기지확장을 위한 군부대 투입, 코오롱노조 강제진압, 한미FTA 제1차 협상 진행 등 내로라 하는 사회적 의제들을 진공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월.드.컵.

 

‘월드컵 보러 방송국을 떠난 이성 및 공공성을 찾습니다’

 

‘월드컵 보러 집 나간 정치적 이성을 찾습니다’, ‘열정의 중심에서 반대를 외치다’ 등 지난 6일 게릴라 문화행동을 벌였던 문화연대는 토고전(월드컵에 관심 없는 독자들을 위한 특별 써~비스 : 토고는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 연안에 위치한 국가로 이번 독일 월드컵에 첫 진출, 13일 한국과 첫 예선전을 벌이게 되면서 한국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됨)을 앞두고 방송사의 월드컵 중계 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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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호혜적, 선순환적 관계의 광장문화는 가능한가

[월드컵 너머 연속기고](4) - 월드컵과 광장문화

 

‘대한민국’의 두 번째 월드컵이다. 2002년의 첫 번째 월드컵을 약간의 광기를 동반한 ‘흥분의 월드컵’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2006년의 두 번째 월드컵은 아마도 ‘비장한 월드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가미가제 출정식을 연상시키는” 붉은 응원리본과 락버전으로 되살아난 ‘애국가’, 그리고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광장을 찾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 응원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 이런 광경을 보며 월드컵과 거리응원에 대한 흥분과 기쁨보다도 오히려 “대한민국 대표팀이 16강 아니 결승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범국민적 국가주의․애국주의에 기반한 ‘비장함’을 더 느낀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월드컵 반(反)광장문화?

한편, 2006년 월드컵 응원문화는 2002년과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장문화의 부재’다. 2002년의 거리응원을 ‘광장문화의 실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에 대해서는 이따가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당장에 평가전이 열리는 시청 앞 광장으로 가보자...

 

[호혜적, 선순환적 관계의 광장문화는 가능한가]기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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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미디어의 축제, 월드컵을 거부하자!

월드컵 개막에 대한 문화연대 논평
4년전 우리에게 자부심을 주고 신명나는 축제를 선사했던 월드컵이 지금 ‘사회적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 언론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고 자본은 온갖 낯 뜨거운 상술을 선보이며 우리를 현혹하려 들고 있다. 이들이 합세해 이 사회를 월드컵으로 덮어버리는 상황에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4년전 시민축제의 진앙지였던 서울시청 앞 광장을 보라. 그 때의 자발적 참여는 간 곳 없고 자본의 기획 하에 가수가 동원되고 시민은 응원객으로 전락했다. 검은 양복의 용역 인력이 시민의 앉을 곳을 일일이 지정하고 화장실 출입마저 통제하는 서울광장의 모습은 소통과 통합의 해방구가 아닌 지시와 통제의 공간, 자본의 점령구로 바뀌었다. 4년 전 열린 공간, 축제의 공간이었다던 이곳은 닫힌 공간, 쇼프로의 공간이 되었고 ‘입장객’이 되어버린 시민은 펜스 안에서 ‘각’ 잡고 앉아 정해진 식순에 따라 박수치고 환호하며 월드컵을 ‘방청’하게 된 것이다.
자본은 가증스럽게도 ‘대한민국’과 ‘국민’을 들먹이며 태극기를 치켜들고는 우리에게 ‘애국’을, 그리고 응원을 강요한다. 이것을 시민의 응원이라 하겠는가! 우리들의 애국이라 하겠는가! 아니다. 바로 자본의 응원이고 자본의 애국이다. 특히 4년마다 찾아오는 ‘주기적’ 애국은 경계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이윤창출을 위한 ‘소비자’가 되길 원하면서도 ‘국민’과 ‘민족’을 외쳐대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염치없어 보인다.
자본과 함께 우리는 본분을 저버리고 돈벌이에 매진하는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4년 전 3개 방송사 4개 채널은 시청률과 광고에 눈이 어두워 한국팀의 경기를 동시에 중계하는 만행을 저지른 바 있다. 올해 이들은 삼일절은 ‘축구절’로, 현충일은 ‘축구일’로 만들어 버리면서 사회의 온갖 주요 현안들에 대한 보도를 외면하고 있다. 열드컵 광기의 주역은 바로 이들이다.
이들 방송사는 지난번 WBC대회, 하인즈 워드, 미셸 위 관련 보도에 앞장서서 ‘오버’하는 솔선수범을 보이며 스포츠방송사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팀이 WBC 4강에 진출한 날 이들 방송사의 저녁뉴스가 보여준 행태는 차라리 절망적이다. 이번 독일월드컵을 앞두고도 스포츠부 기자들을 모두 독일로 보내고 타 부서 기자들을 동원해 국내 월드컵 보도를 담당케 하며 월드컵에 ‘올인’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그들의 책무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다. 아울러 이는 다른 스포츠를 무시하는, 그래서 스포츠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매우 무책임한 처사이다. 신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문 역시 한미FTA협상의 시작 등 주요 사회현안보다는 축구에 압도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최근 이들이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는 방식은 참으로 저열하다. 언론이 사회의 주요 현안들을 오히려 덮어버리고 있다는 비난이 불거지자 이들은 재빨리 면피용 ‘장치’를 마련한다. 신문은 1면부터 축구기사를 싣고는 저 끝 사설 어디쯤에서 ‘너무 지나치다’며 훈계조의 한 마디를 배치한다. 방송사는 매일 저녁뉴스를 월드컵으로 도배해 버리고 끝날 때쯤 ‘너무 심하다’는 코너 하나를 끼워 넣는다. 마치 “우린 비판도 했다. 봤지?”하는 식이다. 아침부터 ‘죄’를 짓고는 자기 전 ‘죄 사함’를 구하는 간교함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치졸한 자기합리화이면서도 간편한 면죄부다.
미디어란 전달을 위한 수단이다. 언론은 사회 구석구석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월드컵 수익사업에만 몰두하면서 이 넓은 세상을 외면하고 있는 언론은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응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과거 지금과 같은 거대한 스펙터클의 응원이 없었어도 정열적이면서도 간절하게 우리 선수들의 승리를 기원했다. 전파상 진열대의 작은 텔레비전을 보며 환호하며 손뼉을 쳐댔고 호프집과 다방에서 펄쩍펄쩍 뛰며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집에서 혼자 TV를 보면서도 우리는 함성을 질러댔고 그 함성소리로 온 동네가 하나가 되었다. 그때의 ‘응원빨’은 지금의 그것보다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지금 별의별 이유 때문에 응원할 곳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찾아 헤매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응원에 왜 이리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삿대질이 난무하는지 말이다.
응원은 함께 하는 것이다. 같이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이기고 지는 것을 초월한다. 승리하면 기분이 조금 더 좋을 뿐이다. 그리고 애국도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애국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얼마 전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논란이 되었던 꽹과리 응원도 그런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를 상대로 상대방을 무찌르러 나간 것이 아니다. 축제에 동참하고 우리의 기량을 뽐내러 나간 것이다. 나만 잘되고 나만 부각되고자 하는 욕심이 지나치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월드컵은 더 이상 열린 시민축제도, 우리가 하나 되는 공간도 아니다. 호객꾼들만 넘쳐나는 ‘대목시장’으로 변해 버렸다. 순박한 사람들의 열정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기업과 언론은 깊이 반성하고 자숙해야 한다. 그들에게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길 간절히 기원한다. 그들에게 그 정도의 용기가 있길 바란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보다 결코 더 중요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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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그때 그 광장에 초대형 월드컵 백화점이

[월드컵 너머 연속기고](3) - 월드컵 광장, 월드컵 백화점

 

우리에게 월드컵이란 2002년으로만 기억된다. 1954년 월드컵 첫 출전 이후 단 1승만을 염원하던 패배의 월드컵은 잊혀졌다. 오직 2002년 4강의 신화만이 남아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일본과 공동개최국이기도 했다. 하지만 개최국 국민으로써의 사명감, 자부심을 강요하거나 강하게 느꼈던 이들은 없었다.

 

이런 모습은 1988년 서울올림픽과는 사뭇 다르다. 1988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은 금메달 12개로 종합성적 4위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경기에서의 승리보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더 집중했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우리는 국가로부터 동원되고, 강요되었다. 그리고 은폐 당하기도 했다.

 

매스게임에 동원된 학생들에게 학교수업은 생략되었다. 전 국민이 생활영어쯤은 해야 한다며 영어가 강요됐다. 허름한 주택 앞에는 호돌이가 새겨진 콘크리트 담벼락이 급조되어 가난한 이웃들은 은폐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머슴처럼 묵묵히 손님접대에만 열중했다. 어리숙하게 소외당할지언정 내 조국이 자랑스러워지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권위주의 국가시대에 애국은 가슴을 뛰게 했었다.


[그때 그 광장에 초대형 월드컵 백화점이] 기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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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걷어 차지마라. 노점상이 축구공이냐

[월드컵 너머 연속기고](2) - '대한민국' 구호에 묻혀버린 노점상

 

그러고 보니 시간 참 빠르다.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으니 개인적으로 빈민운동 단체에 일하면서 가장 바빴던 해가 2002년 요맘때인 한일 월드컵경기가 열리던 해와 곧바로 2005년 청계천 복원 공사를 강행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한쪽에서는 전 국민의 열광과 환호 속에서 경기가 펼쳐졌고 또 한쪽에서는 한 달씩 노점 장사를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현상은 그해 곧바로 청계천 복원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으로 이어졌고 이에 항의를 하며 청계천 낙원상가 앞에서 장사를 하던 한 늙은 노점상이 분신 사망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월드컵 경기가 벌어지던 이 시기 우리 단체에서는 대규모 집회를 통하여 에드벌룬을 이용하여 거대한 축구공을 제작해 ‘노점상은 축구공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써 붙이고 시민들을 상대로 퍼포먼스를 보여주거나 스티커와 유인물을 제작하여 뿌리는 등 노점상과 손수레를 축구공 마냥 발로 차지 말라는 뜻의 항의 표시를 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사실상 냉담했고 언론에서는 일제히 노점상들을 향하여 전 국민의 축제에 재를 뿌리는 천덕꾸러기로 보도를 했었다. 외국인들 보기에 노점상은 선진한국의 모습에 먹칠을 한다는 것이고 비위생적이며 불결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한국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들이 찾았던 곳은 유명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아니었다. 이들은 오히려 월드컵 기간에 청계천 황학동의 벼룩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 가이드를 대동하여 찾아들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노점상들을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단속을 강행했지만 외국관광객들은 한국 서민들의 삶의 모습에 더 관심이 많았고 이들의 눈에는 길거리 노점상들이 이색적인 볼거리 이었던 것이다. 근면한 한국인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는 곳, 그것은 삶의 땀 냄새가 살아있는 청계천 벼룩시장과 재래시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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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월드컵 앞두고 우려 높아지는 극우파의 외국인 폭력

월드컵 앞두고 우려 높아지는 극우파의 외국인 폭력

[정대성의 독일통신](5) - 월드컵 ‘축제’와 독일의 ‘숙제’

 

 

 

6월이다. 며칠 뒤면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로 꼽히는 월드컵이 개막한다.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지금 독일은’ 온통 축구 이야기로 넘쳐나고 있다. 신문은 신문대로 쉴새없이 월드컵 관련 소식을 전하고, 방송은 방송대로 독일 팀의 상황과 월드컵에 참가하는 각국의 평가전을 신물나게 틀어댄다. 6월은 ‘축구 세상’이라는 ‘계시’라도 내려진 듯하다.

 

독일은 안방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다. 연방 정부는 “세계가 친구를 찾은 손님처럼”이라는 공식 슬로건을 내걸고, 무엇보다 지난 9.11 테러 이후 21세기 지구촌의 지표가 된 ‘테러의 시대’에 대비한 안전한 월드컵을 위해 만반을 태세를 갖추어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에 총리에 따르면 “모두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축구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독일에서는 ‘친구를 찾는 독일 손님들’이 걱정할 만한 일이 잇달아 일어났다. 신나치 극우파 청년들의 외국계 독일인 공격 사건이었다.

4월 부활절,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포츠담에서 이디오피아 출신의 독일인이 극우파 청년 2명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며칠 뒤에는 토고 출신의 한 흑인이 집단 폭행을 당했고, 5월 들어서는 베를린에서 이탈리아인과 터키 출신의 독일 정치인이 욕설과 집단 구타로 병원 신세를 졌다....

 

[월드컵 앞두고 우려 높아지는 극우파의 외국인 폭력] 기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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