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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 일기] 8월 31일, 수술을 받아야 하는 딸과 농성장의 엄마 그리고 근로복지공단 산재인정 조사관의 2차 가해

농성장 일지

  * 이 글은 여성가족부 앞에서 피해 노동자와 함께 농성을 하고 있는 권수정 대리인 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8월 31일 수요일 농성 91일

 

1.

수요일, 변함없이 혁명기도원의 기도회. 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막걸리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 편의점에서 팔지 않는 ‘고급’ 막걸리 준비해서 오는 혁명기도원 원장 여정훈 동지도 좋다.

 

오늘 읽은 마르코 복음은 드디어 예수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빌라도가 재판장이 되어 추궁을 하는데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초라할 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메시아가 아닌가. 신의 아들인데, 온갖 잡범들 속에 섞여 무기력하게 재판을 받는다.

나는 그 심정을 알것 같다. 내가 재판받을 때의 심정, 어쩌면 그렇게 검사들과 판사들은 말이 통하지 않던지. 특히 공안검사라는 자들은 어쩌면 그렇게 오만하고 사람말을 못알아들으려고 작정을 했던지, 그러면서 어쩌면 그렇게 잘난척을 하시던지. 판사들은 왜 그렇게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 보던지. 나는 우리나라 재판의 그 좌석 배치도 참 재수가 없다. 판사면 다야? 왜 니가 높은 자리에서 나를 내려다 보냐고!

 

그런데, 뭐여. 하나님의 아들도 별거 아니쟎아. 지들끼리 다 해쳐먹으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만 호랑이처럼 덤비는 세상의 난폭한 질서앞에 이렇게도 힘없이 초라하챦아!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인데, 요런꼴로 재판을 당하고 있으면 하늘이 쩍 열리고 번개라도 떨어져 빌라도 뒤통수를 후려치며 “야, 임마. 예수 걔가 내 아들이다.” 이런 소리라도 하늘에서 쩌렁쩌렁 울려야 하는것 아녀?

 

예수가 나랑 별로 다를것도 없네 뭐, 의기양양, 요렇게 생각하다 문득 대승불교의 그 유명한 유마경 한구절이 생각났다. ‘중생이 앓으면 나도 앓는다.’

인민들의 삶과 고통의 현장에서 함께 고통을 알아야 인민들을 구원도 할 것 아닌가. 예수도 부처도 모두 살아있다면 우리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새삼 혁명기도원 동지들이 대견해 보였다. 동지들 고마워요.

 

 

2.

오늘은 언니가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언니의 큰딸이 무릎에 연골을 이식하는수술을 해야하는데 사전에 검사를 하고 수술날짜를 잡으러 가셨다가 기도회가 끝난후 지쳐서 발을 끌며 오셨다. 하루종일 몸이 불편한 딸과 함께 아홉가지 검사를 했고, 수술날짜는 내년 1월로 잡혔다고 한다.

 

오는길에 따님은 엄마의 일하는 농성장에 와보겠다 하고, 언니는 혹시라도 농성장의 초라한 텐트를보고 딸이 마음 아플까봐 못오게 하면서 실랑이 하다가 그냥 저녁만 함께 먹여 보내고 오시는 길이라고, 말하는 언니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9월 1일 목요일 농성 92일

 

뭐가 잘 안되려면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엇박자가 난다. 안그래도 지난 며칠 유난히 언니가 심란하고 기운이 없는데, 7월말 신청했던 산재인정 조사 때문에 근로복지공단에 다녀 와서는 녹초가 되서 오셨다.

 

얘길 들어보니 가해자들의 편집본으로 언니에게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해 피해사실을 말하면 언니의 진술은 제대로 적지도 않으면서 무려 4시간 30분을 언니를 앉혀놓고 진을 다 빼 놓았다는 것이다. 4시간 30분. 가해자의 의도대로 질문하고 피해자의 대답은 듣지도 않는 4시간 30분.

근로복지공단 조사관이 조사한답시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했다. 기가 막힌다.

 

이번 사건의 경우 국가인권위에서 이미 성희롱이 맞고 성희롱으로 인한 고용상의 불이익을 당한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공단에서 조사를 한다해도 인권위 조사 결과에 근거해 현장에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권력관계에 의해 벌어진 일인지만 확인하면 된다. 아니 인권위에서 이미 다 결정한 것을 재조사 해야 한다는것도 짜증이 나는데, 도대체 피해자가 몇 번이나 자신이 당한 피해사실을 국가기관에 말해야 한단 말인가. 지루하게 남아있는 재판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인권위, 노동부에서 다 조사를 했고 모두 성희롱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인권위에서 석달넘게 조사해서 판단을 했으면 근로복지공단이든, 노동부든, 여성가족부든 국가기관은 그 판단에 근거해 지네가 할 일을 좀 해야 할것 아닌가. 굳이 피해자가 다시 진정내고 고소하고 그러지 않아도 국가기관이 알아서 해야지, 그러진 못할망정 반복해서 피해사실을 말하게 만드는 그놈의 조사 자체가 화가난다. 그런데 그나마 그 조사라는 것도 가해자 편집본으로 질문하고 피해자의 대답은 문답서에 적지도 않으며 지가 쓰고싶은 말만 써놧다. 정말 가관이다. 어쩌면 이렇게 국가기관이라는 것들이 피해자를 골탕먹이려고 작정을 한듯이 지랄을 하냐는 말이다.

 

안그래도 낼 모레면 농성시작한지 100일이 되고 추석은 다가오는데, 얼마안있으면 해고된지도 일년이고, 날은 추워지고, 현대자동차는 쌩까고, 여가부는 성희롱 예방교육하는데라고 하더니 19금 쓸데없는 지랄이나하고, 길바닥에 나앉아 있는 언니 맘이 심란한데, 어쩌면 이렇게 국가기관의 공무원이라는 것들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피해자를 한번더 후려치냐는 말이다.

 

내일 당장 노안실과 논의해서 조사를 중단시키고 조사관의 교체를 요구해야지. 전면 재조사 하도록 해야겠다. 다음에는 내가 같이 가야지. 지금까지 모든 조사를 언니와 함께 했는데, 나는 화장실도 따로 안가고, 언니 피곤하면 커피마시면서 쉬면서 하자하며 함께 했는데, 산재문제는 노안실이 전문이니 잘하겠거니 했더니, 내 실수다. 다음에는 내가 직접 가야지.

 

화가나서 잠도 안온다. 어디 가서 악이라도 써야 속이 좀 풀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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