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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0.17 “성희롱 진정했다고 해고” 138일 천막농성

“성희롱 진정했다고 해고” 138일 천막농성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입력 : 2011-10-17 21:59:15수정 : 2011-10-17 21:59:16

 

ㆍ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복직시키고 가해자 처벌”

“날씨가 추워져서 그냥 자기엔 이불을 두 개 덮어도 춥게 느껴진다. 저녁에 나영이가 제일 비싼 핫팩을 두 봉지나 사들고 왔다. 수정이랑 내가 핫팩 때문에 싸울까봐서 한 봉지씩 서로 사이좋게 나눠 쓰라고.”(김순옥씨의 블로그 ‘농성장 일기’)

김순옥씨(46·가명)는 17일로 138일째 ‘거리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 한복판인 청계광장 인근 여성가족부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지만, 청계천 한 번 제대로 돌아볼 틈이 없다. 김씨는 “여기를 비우면 안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여기’는 천막이다.

천막에도 규칙이 있다. 자고 일어나서 공동화장실로 가 세수하고, 머리를 감는다.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오전엔 주로 잠을 잔다. 김씨는 “밤낮이 바뀌어서 낮에는 병든 닭마냥 해롱해롱한다”고 했다. 지난 주말엔 조금 바빴다. 충남 아산 시골 집에 ‘겨울 옷’을 챙기러 다녀왔고, 자신을 응원하겠다며 명동에서 열린 후원주점에도 참석했다.


 

김순옥씨(가명·오른쪽)가 17일 여성가족부 앞에서 함께 농성 중인 여성단체 회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손님은 꾸준히 찾아온다. 신문을 넣어주거나 음식 담은 비닐봉지를 놓고 가는 이도 있다. 어느 날 밤에는 김씨의 이야기를 들은 행인이 그 자리에서 휴대전화를 열더니 10만원을 계좌에 넣어줬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철거용역 직원들이 몰려와 천막을 철거하기도 했다.

김씨는 1997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사내하청업체에 입사했다. 결혼한 그는 ‘아이들 키우면서 일하기 괜찮을 것’이란 소문을 믿고 공장에 들어갔다. 14년간 품질검사 및 차량출고 부서에서 일했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그렇게 키워냈다. 자랑스러운 직장이었다.

2009년 4월 끔찍한 일을 겪기 시작했다. 회사 간부 2명이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해왔다. 간부들은 “나 ○○ 좋아 사랑해”와 같은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나야 자기 생각하고 있지. 거기 가서 잘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등의 전화를 걸었다. 작업 중 음담패설을 들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참다 못한 김씨는 지난해 9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그는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참을 수 없어 폭발한 것”이라고 했다.

며칠 뒤 회사 징계위원회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해고했다. “인권위에 진정해 물의를 일으켰다”는 게 이유였다. 그해 겨울 인권위는 김씨의 성희롱 피해를 인정하고 해당 간부 2명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해당 하청업체 사장에게도 부당해고를 한 만큼 9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김씨는 “원하는 건 원직복직과 가해자 처벌, 딱 두 가지다. 그게 대한민국 땅에서 1년이 넘도록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인권위의 권고장도 힘이 되지 못했다. 회사와 가해자는 사과하지 않았고 권고도 이행하지 않았다.

원청업체인 현대차는 “하청업체의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고용노동부가 구제신청을 내라고 했지만 그 사이 하청업체가 폐업해 버렸다. 폐업한 사업장에서는 같은 사람들이 이전과 같은 업무를 하고 있다. 가해자도 그곳에서 당당하게 일하고 있다.

지난 6월 김씨는 여가부 앞에 천막을 쳤다. “마지막 호소”를 하고 싶었다. 여가부는 그러나 “우리에겐 성희롱 예방·교육 권한만 있다. 도울 힘이 없다”고 했다.

김씨는 “날이 추워지는데 아직도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힘들고 마음이 조급해진다”면서도 “기운이 떨어졌다가도 사람들이 와주면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그는 “기회가 되면 남대문 시장에 패딩 바지나 사러가야지”하며 웃기도 했다. 김씨가 아산에 살 때 취미는 재래시장 구경이었다. 음악 들으며 시장 한 바퀴 돌고 오는 것이 힘든 공장생활에 활력을 주곤 했다.

혼자 있을 땐 책을 읽거나 ‘농성장 일기’를 쓴다. “그날 있었던 일 그대로를 썼을 뿐”인데 블로그에 올려놓으니 호응이 좋다. 몇 군데서 원고 청탁도 들어왔다. 김씨는 ‘성희롱에 따른 정신질환 피해를 산업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한 첫 당사자다. 김씨는 지난 7월 산업재해 요양신청을 낸 뒤, 지난주엔 정해진 절차에 따라 병원에 800문항이 넘는 설문지를 내고 왔다. 이달 말이면 결과가 나온다.

그는 “(제 투쟁이) 널리 알려져서 다른 사람들도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본도 권력도 쓰러진 그를 일으켜주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일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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