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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25
    [펌] 성노동자 해방
    키메라

[펌] 성노동자 해방

성노동자 해방

깨철이


1.


매춘여성들의 '노동자' 주장은 욕망의 미시정치적 수준에서 확실히 횡단적이고 작동합니다.

매춘여성들의 성 노동자 선언으로부터 자극 받은 일군의 소집단들이 있습니다. 우선, 계급운동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사람들과 집단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젠더 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 섹슈얼리티와 성 욕망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세계화된 규모에서 진행되는 전쟁과 기아와 빈곤에 저항하는 힘을 바탕으로 재편성되는 인권의 지향을 가지고 접근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나는 이 각각의 소집단들의 주장과 특정 관점에 대해 약간씩 경계하면서, 차이를 무화 시키지도 않으면서 이 소집단들이 서로 섞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매춘여성들의 운동, 그들의 '노동자'선언은 분명 이 모든 각각의 경계들을 횡단하고 있으니까요. 이 운동은 횡단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횡단의 필요성은 성 노동자들에게 매우 직접적입니다. 그들의 주체성은 하나가 아니며, 자기 환경에 근거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유용한 무기를 재빨리 선택해서 싸우고, 필요에 따라 다른 주체성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의 선언에 자극 받은 소집단들 또한 자신들의 경계를 허물고, 의식적으로 함께 횡단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여성과 여성주의 운동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카스트화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노동운동은 완전히 카스트화되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노동현실문제의 개입과 대응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처럼 여성주의도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스트화는 점점 더 현실의 살아있는 주체성들을 고립적으로 만들고, 점점 더 권력적으로 변모하고, 점점 카테고리 안에 들지 않는 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주변화하거나 식민지화합니다. 모든 운동은 카스트화됨으로써 끔찍하게 변모했습니다.

이것을 현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횡단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은 아마도 카스트화된 곳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횡단화는 주변으로부터 소수자들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성'으로부터 출발하는 페미니즘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매춘여성으로부터 출발하는 페미니즘은 없습니다! 가족구도를 중심으로 엄마와 자매들의 역할 분석으로부터 사회분석으로 확장하는 이론은 많지만, 일찍이 가족구도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부의 매춘여성들로부터 페미니즘을 정초하는 이론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맑스주의 정통적 담론 안에서 실업자와 가사노동자인 여성, 그리고 이주노동으로부터 출발하는 이론이 드문 것과 같습니다. 산업노동자 중심의 노동이론에서 그들 실업자, 이주노동자, 빈곤층들은(매춘여성까지 포괄하여)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산업예비군'(때로는 노동자계급에 적대적이기까지 한)으로 위치 지워집니다.

자, 이런 식의 주변화와 식민화는 여성운동에서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횡단성은 주변화와 식민화를 피하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소수자 운동의 특징이 됩니다.

성 노동자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에게는 노동의 현실이 있으며 젠더적 현실이 있으며 섹슈얼리티적 현실이 다 있습니다. 운동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현실적 설득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굳이 한 방향이어야 한다면 성 노동자 해방일 것입니다.

성 노동자 해방이란 그 일이 모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자유로운 일이 되고, 자신을 위한 일이자 동시에 사회 공통선을 위한 일이 되고, 어떤 억압도 착취도 없는 인간적인 노동이 되거나 즐거운 활동이 되는 그런 상태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화되자면 주체성의 측면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강제된 성별화, 강제된 섹슈얼리티에서 벗어나는 주체성, 그리고 사회의 물질적 생산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주체성, 사회권력체와 단절하려는 주체성 등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성 노동자 '선언'은 시작이며, 첫 발걸음을 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노동자 해방운동은 많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보자면 당장의 현실에서 세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 성노동자는 누구이고, 어떤 권리를 인정받아야 하는가?
- 구매자는 누구이고, 그들은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
- 소위 '포주'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러한 기초적인 쟁점에서조차 우리 사회의 성을 교환하는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욕망과 마주칩니다.


2.


우리 사회에서 성을 교환하는 방식은 결혼과 결혼관계를 연습하고 모방하는 자유연애적 커플 딱 두 가지 형태입니다. 결혼이든 커플이든 성의 교환 방식은 그 사회의 지배적 경제적 교환과 분배방식의 필요에 따라 종속되어 왔습니다. 매춘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성의 교환 방식이 성 욕망의 필요에 따라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의 형식에, 그 사회 경제시스템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형식에 종속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욕망은 시스템 바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부족경제의 부족간 여성 교환, 봉건적 씨족경제의 씨족간 여성 교환, 자본제적 핵가족 경제에서의 자유연애적 교환 등등은 모두 가족조직을 구성하는 핵심이었고, 이들 가족조직은 사회의 물질적 경제 시스템을 지탱하는 노동조직이자, 노동력 재생산 조직, 그리고 분배를 할당 받고 소비하는 조직의 기초였습니다.

가족조직은 어느 시대나 성 욕망과 쾌락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고 부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 측면에서 여성들의 성욕은 수동적으로 남성들에 의해 공짜로 갈취 당하는 것(부수적인 서비스)이었습니다. 성 욕망은 부차적으로 취급 당하고 억제되거나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사회체 바깥에서 활로를 찾게 됩니다.

매춘은 각 체제의 한계점이자 각 체제가 포괄할 수 없는 구멍, 여백, 잔여 등으로 늘 주변화되어 존재했습니다. 반복하자면 리비도 경제학(성 욕망의 생산과 교환)과 성별경제학(성별의 생산과 교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경제학은 늘 체제를 지탱하는 물질적 부의 경제학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으로 부과, 강제되어 왔으며 결코 강제될 수 없는 한계지점은 사회체 바깥에서 불륜이나 매춘현상과 같은 '금기/범죄화'된 현상들로 가시화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진행되는 매춘의 일반화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매춘의 일반화는 역설적으로 리비도 경제학이 더 이상 여성 교환으로 가능하지 않게 된 상황, 리비도 경제학이 마비된 상황을 말해줍니다. 가족해체적 경향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 매춘의 일반화는 성별 경제학이 물질적 부의 경제학의 종속과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된 형태로 전개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물질적 부의 생산, 교환, 분배를 위해서 남성은 바깥 일을, 여성은 가족유지를 위해 필요한 가사노동을 하는 성별분업시스템이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리비도 경제학의 마비와 분리화, 성별 경제학의 분리화는 사회의 물질적 부의 경제학 시스템의 무능을 말해주는 것이며, 체제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는 리비도 경제학과 성별 경제학이 자본주의 시스템과의 재조정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 사회가 관용을 보여주든 보여주지 않든 간에 매춘의 일반화 현상은 확대될 것이며, 한편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현상과 모든 부분에서 점차적으로 성별화가 사라지는 현상 또한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물질적 부의 경제학이 지닌 무능을 사회권력 체제의 강화를 통해 리비도 경제학과 성별 경제학을 원격 조정함으로써 만회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여기서 모든 중심적 운동의 권력체 속으로의 편입과 카스트화가 진행되는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거부하거나 혹은 포섭되지 않는 사회집단은 완전히 격리됩니다. '테러리스트화'나 '비정상화'나 '쓰레기나 버러지'로 취급되며 '사회 악'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숨어서 이러저러한 은밀한 방식으로 일하는 온순한 매춘여성은 아마도 '눈 감아주는' 방식으로 허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매춘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려고 나서려고 한다면 격리될 것입니다. '성특법'이 갖는 효과는 이 둘을 갈라내는 것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불순한 것을 걸러내고 순화시키고 사회권력체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성특법'이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고, 선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체류자는 그가 불체자로 숨어서 이러저러한 은밀한 상태에서 노동을 하는 것은 역시 '눈 감아주는' 방식으로 허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격리되고 추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체자들을 압박하고 순화시키기 위한 기습적 단속이 횡행합니다.

저는 운동집단들이 대부분 카스트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권력체에 의한 이 분리를 조심스럽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온갖 분리와 차별화와 카테고리화에 갇혀 무능을 조장하기까지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운동의 다양성과 무관합니다. 그것은 각자가 대면하고 있는 장벽 속에 갇히는 지옥화, 폐쇄적인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운동집단에는 희망이 없으며, 결국 대중들의 주체성과 긴박한 요구로 되돌아가 운동집단, 운동방식, 운동형식 모든 것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장벽을 넘어서 실험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주체성의 변화를 요구 받는 당면 이유입니다.


3.


물질적 부의 생산 시스템으로부터의 리비도 경제학의 이탈현상, 성별 경제학의 이탈현상 앞에서 사회권력의 재조정은 신체이미지와 감성과 지성과 같은 인격적 이미지를 포함한 기호적 노동을 통해 포섭합니다.

여성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는 이 기호적 노동(확장된 매춘도 분명 이 노동에 속하며, 이 노동에 의한 영향을 받습니다)을 통해 착취하고 있습니다. 가족조직이 아니라, 사회체 위에서 전통적인 육체적 노동과 기호적 노동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그것의 효과는 전통적 육체노동의 가치 하락과 기호적 노동의 가치 하락입니다.

사회체 위에는 여전히 성별화가 존재하며, 또한 더 이상 금기가 되지 못하는 비공식경제(그러므로 비공식 착취)가 증식합니다. 성 욕망은 공식적으로는 신체이미지를 담은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를 통해 간접적으로 충족(그러므로 또한 억제이기도 한)되며, 비공식적으로는 비공식경제의 영역에서 탈출구를 찾습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그들의 지닌 노동이 수동성이 아니라, 사회체에 의해 능동적일 것을 요구받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의 능동적 주체가 됩니다. 따라서 여성들 또한 자신의 성욕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상품을 소비하고, 비공식경제의 영역에서 탈출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성 노동은 이제 단순히 개개의 사적인 이익을 만족시켜주는 그런 노동이 아니라, 완벽하게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노동이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서 성 노동을 범죄시하고, 불법화시키는 것은 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착취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임과 동시에 사회체 위에 새로운 차별화, 구획화를 시도함으로써 사람들을 더욱 쪼개고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허용과 관용의('눈 감는 방식'의) 분위기가 있고, 철저하게 격리하고 추방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격리되고 추방당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노동자 운동에서 무엇보다 긴급한 것은 '성노동자들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자기 삶을 이야기하고 자기 삶을 가지고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노동자들의 말하기와 글쓰기는 매우 중요한 투쟁무기입니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소수자들의 요구와 욕망을 전달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었습니다.

공식석상에서, 지면에서, 인터넷에서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투쟁, 요구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론적 담론들이 대변할 수 있는 것보다 운동에 더 큰 영향과 대중적 지지를 모을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의식적으로 성노동자들과 대중들이 만나는 장을 넓혀 나가는데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사회와 만나느냐, 아니면 철저하게 격리되느냐의 싸움입니다.

저는 성 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다음의 행동들을 활성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1.성노동자들의 직접적 말하기와 쓰기.
2. 인터뷰를 대대적으로 조직하기, 인터뷰어가 되기
3.잡지 만들기, 홈페이지 만들기, 블로그 만들기
4.성교육 캠페인, 성 치료사 되기, 상담가 되기
5.성노동자와 다른 대중들이 함께 섞여서 할 수 있는 실험적 조직과 행동을 만들기
6.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배포하고 유통시키기

이를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가들이 결합해야 하며, 자원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위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적'을 판별하고 '적'과의 전투에서 조급증을 갖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성특법'은 물론 분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회체가 변화하지 않으면 성노동자 해방은 없습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은 성노동자들이 격리화되고 게토화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저는 적 따위는 잊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을 파괴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특법'이 없다고, '여성가족부'가 사라진다고 해서 성노동자들의 자유가 보장되고 해방될까요? 아마도 다른 규제가 만들어지고 다른 권력이 개입할 것입니다.

나는 적과의 투쟁에 대한 지향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정립적 규합운동보다, 자기 정당성에 근거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사회와의 접촉 면을 끊임없이 만들고 재창조하는 생산적 운동을 원합니다. '이 일과 나는 정당하다, 그러므로 사회가 틀린 것이다'여야 합니다. 적을 파괴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특정한 적을 비판하는 말 보다, 사회에 호소해야 합니다!

성노동을 둘러싼 여타의 상황을 고려해보자면, '적'은 성노동자 자신들의 가족일 수도 있으며 외부 사람들 그 전부를 의미하기도 하고, 사회 관념과 제도형식들 기타 등등 그 모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은 항상 여기저기서 불쑥 새롭게 등장합니다.

물론 전선을 긋고, 이러저러한 현실투쟁적 필요에 의해 적을 명확히 하는 것은 필요하며 그것에 대해 우리는 지지를 보내고 필요하다면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 그것이 권력화된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해방이나 혁명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필요합니다. 단지 그러한 운동의 한계, 그러한 권력이 가질 수 있는 한계를 냉정하게 인식해야 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운동은 대중과 무관하며,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정부나 여성가족부가 하는 행위와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좋게 말해 기존의 것과 조금 다른 여성주의의 세력화, 무슨 무슨 주의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로 끝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운동에서 가장 큰 도전과 모험은 성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성노동자가 되어보고, 업주(포주/성산업인)가 되어보고, 손님이 되어보는 주체성의 실험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전이에서 오는 각각의 기쁨과 슬픔을,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하고, 그 경험을 전달하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관계성들을 구축하려 할 때 이 운동은 패배할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위 기고문은 지난 21일 한국양성평등연대 간담회에서 발표한 깨철이님의 발제문 전문입니다. 성노동자 운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필자의 폭넓은 고민에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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