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주엘라. 무엇으로 봐야하는가!


1.서론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 형태로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개량으로 봐야 하는가. 세계적인 좌파세력들은 계속적인 질문 속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언제나 대립되는 시각은 노동자자주관리로서 나타나는 사회주의적인 공동생산 및 관리, 분배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가와 제한적인 차베스의 경제조치 및 지배계급에 대한 그의 의존도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필자는 후자의 생각과는 다르지 않다라고 본다. 자본주의적 물적개량으로 보는 것이 올바르다. 


현재 베네주엘라는 자본주의국가이다. 차베스는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것이고 이는 민주주의를 향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베네주엘라의 발전은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하고픈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물적개량의 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것하고 전혀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실지로 많은 개혁은 부르조아의 일시적인 경제적 타격을 가져오고, 많은 실업자들에게 경제적인 혜택을 부여하여 내수를 높여 더낳은 삶의 질을 올릴수는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일단은 사회주의의 기본인 국가권력의 형태를 봐야하지만 아직은 사회주의로 가는 과도기이지만 일단 빼고 (국가권력은 아직도 부르조아 권력기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이상의 발전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경제적인 조치에서 많은 이견들이 존재하기에 그 부분에서 찾아서 이들의 길이 올바르게 가는 것인지 알아 보는것이 좋겠다. 


2. 노동자자주관리의 실현에 대해서


먼저 노동자자주관리가 무엇인가?  기업 등의 경영권이 자본이나 국가에 있지 않고 근로자집단에 귀속되어 있는 사회상태이다. 현재 진주에 2군데, 대구달구벌, 청주우진 4군데의 버스노동자자주관리기업이 있는데 실험적이기는 하지만 실패를 주로하면서 꾸준히 해오고 있는 상태이다.  노동자 자주관리는 자본주의체제를 벗어나 노동자 스스로 기업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여 생산력을 높여나가는 것으로 볼수있지만 이는 자본주의 내에서 가능한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협동농장으로 표현되는 이스라엘의 키부츠가 농산물의 생산분배를 이루고자 했으나 신자유주의 물결에 밀려 지금은 서서히 퇴색되어 가고 있다. 노동자자주관리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실험적이나마 또는 공개적으로 권력의 비호를 받아 ( 물론 베네주엘라의 경우에 한하지만) 만들어지고 합법적으로 이어져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주의법칙에 위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경제에 위배되지 않고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 발전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한국엔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다. 친한 사람과는 동업을 하지마라. 친한 사람과는 돈 관계를 맺지 말라하는 등등의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사업을 같이 하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는 서로간의 정이 끈끈해져 살인까지 불사하는 경우가 종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분배과정에서의 문제때문이고, 오해 때문일 수도 있다. 노동자자주관리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이윤의 분배과정의 투명성이고, 재생산과정에서 투자의 평등성인 것이다. 분배과정의 투명성은 서로 같은 임금으로 나누어 가져가고 서로의 토론 속에서 평등성을 찾아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체제 내에서의 문제점과 사회주의에서의 문제점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에서의 노동자자주관리는  어떠한 모습을 할 것인가? 권력을 쟁취한 노동자국가는 경제적인 조치를 대규모사업장을 중심으로 국유화를 실시하고 노동자위원회나 또는 비슷한 권력의 형태의 기구에 공장이나 기업에 통제권을 행사한다. 반혁명에 대한 분쇄를 목적으로 이루어지기기고 하지만, 상품의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사용가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힘을 사용 한다.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은 상품경제이기 때문에 교환을 위한 생산을 목적으로 생산에 목숨을 걸지만, 사용가치로의 전환 속에서는 일정수량이상의 과잉생산에 대한 통제는 생산물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를 하며 서로 간의 경쟁이 확대재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관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상품경제 즉 교환경제의 홍수 속에서 노동자자주관리를 하고 있는 회사는 언제나 다른 자본가계급과의 경쟁이 필수이며, 경쟁에서 그들과 동등하거나 높은 생산성으로 자본가 계급을 이기기위해서는 확대재생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자본의 축적에 따르는 모습 속에서 노동자자주관리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자본주의 형식적인 평등은 언제나 누구나 잘먹고 잘사는 사회로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부의 집중으로 인하여 소수의 지배자나 거기에 빌붙어 살아가는 계급에게 특혜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노동자자주관리에 앞선 형태로 제시되었던 형식은 노동자지주제도가 있었고, 협동조합과 협동농장의 키부츠가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서 무늬만 절반의 성공으로 (물론 협동조합이나, 노동자지주제도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견해가 차이가 많이 난다. 경영자가 1%의 지분을 가지고 있고 노동자들이 99%의 지분을 가졌다고 상상을 해봐라. 처음에는 노동계급에 의해서 회사가 유지되고 발전을 하겠지만 이후 노동자계급의 경영에 대한 통제를 강요하는 관료체계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서서히 지분의 집중이 이루어질 것이다. 요즘엔 경영자가 4%의 지분만 있다고 한다해도 우호지분덕분에 하나의 회사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나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그 모습도 자본주의체제에 저항하는것이 아니라 순응을 하기 때문에  자본의 색깔에 맞혀질 뿐인 것이다.


예전에 어느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조직을 운영할때는 물갈이 운영하라고 했다. 물갈이 흐름을 주어 어느 한곳에 막혀 고인물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조직 이 그 상황에 맞추어 변하지 않고, 그 조직의 조직원들의 사적인 이익에만 봉무하는 경우엔 조직은 썩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조직이 썩어가기 좋은 토양이다. 넘치는 상품으로 인하여 무엇이든지 상품화 시킬 수 있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능력과 더불어 형식적인 부의 평등은 자기의 본능조차도 팔아버리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마르고 예쁘게 보여야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일수 잇다는 강박관념은 사회에 성형미인과 다이어트라는 형식으로 다가와 풍요속의 빈곤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주의에서의 노동자자주관리는 생산과 유통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를 노동계급이 가진다라는 기본적인 개념과 더불어 가치의 이전이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 중심으로 생산물의 가치가 이전되어 생산에 자신의 부를 집중하지 않고 여가 시간을 늘려 스스로의 부를 높여 가는 것이다. 다른 자본가와의 전쟁이 아니라 비슷한 기업(?)간의 경쟁을 통한 발전을 이루고자하기 때문에 살아남는 자가 강한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을 해서 생산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내에서의 상품경제와의 경쟁은 생존을 위한 전쟁이다. 다른 기업을 부수고 자신들의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 더 많은 자본으로 상대 자본을 이겨나가야 하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이다. 이는 중소기업에서 출발 했다고 해서 항상 그대로 유지하는것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윤을 확대재생산 과정에 투입을 하여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고 더욱더 높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생산의 몫을 투여하게 되는 것이다. 상품경제에서의 노동자자주관리의 문제점은 여기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자본과의 경쟁, 확대재생산, 노동수단의 개선과 투여 등 기업의 발전은 관료체계와 더불어서 자본의 집중이 결국엔 소수에게 이루어져 자본주의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자주관리는 상품경제와의 경쟁관계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 자신의 해체과정을 겪는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현실에선 진보적인 모습으로 투영되지만 의식과는 별개로 존재는 역사의 한면에 장식되었다는 안도감으로 그림으로 남을 것이다. 자본은 집중을 원한다. 공동의 소유형식을 빌려올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로서의 가치는 발전 속에서 퇴색되어 간다.   


지금 베네주엘라의 기업에서 노동자자주관리를 하는 기업은 결코 많지 않다. 그 기업들이 노동자자주관리로 바뀌게 된 이유는 기업의 폐쇄와 부도에 따르는 파산으로 회생불능의 기업을 정부가 일정정도 자본을 빌려주어서 공동운영을 하게 만들었다. 실험적으로 하게 만든것도 있고,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놓아 기업을 운영하여 빛을 서서히 갚아 나가도록 하며 실업자들의 구제를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상태에서 실험적으로 과도기 형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상품경제에서 일시적인 물적개량을 통한 피지배계급의 달래기에 한 형태이다.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하여 높은 수익을 내부경제에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측면으로 기업의 경영형태를 보여주며 대중의 의식화 하는 측면도 있지만,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관계로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으면서 “ 차베스는 에콰도르에서 파업으로 석유생산이 급감했을 때, 석유를 제공하면서 [파업파괴자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에콰도르 정부를 지원했다. 대기업 자본가들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차베스가 그들에게 “우리는 여러분들의 사유재산에 손댈 생각이 없다”고 선언했을 때, 대기업 자본가들은 “베네수엘라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위협은 없다”고 화답했다.“(차베스, 가난한 민중의 대변자인가 아니면 부자들의 보루인가?   노동해방연대의 글중에서) 고 한다 또한 ”차베스는 전임자들이 IMF에 진 빚을 꼬박꼬박 갚았다. 또한 그는 미국 석유기업들에게 성실하게 석유를 공급했다. 차베스는 결코 이러한 경제관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석유기업들과의 계약을 끊임없이 갱신했다. 차베스가 가져온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이들 기업들에게 전보다 조금 더 많은 세금을 요구했다. 차베스는 또한 미국의 3개 주에서 보다 저렴한 값으로 휘발유와 등유를 팔려고 하면서, 베네수엘라 천연가스 시추를 위한 미국석유기업 셰브론텍사코사의 새로운 설비도입에 대해 축전을 보냈다. 그는 심지어 미국을 ‘전략적 동맹국’이라고 불렀다.“(차베스, 가난한 민중의 대변자인가 아니면 부자들의 보루인가?   노동해방연대의 글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국가 기간산업의 국유화 및 은행에 대한 정부의 통제 강화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광업에 대한 국유화조치도 상품경제 속에서 껍질을 벗어난다고 뱀은 그대로 뱀이듯이 환골탈퇴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에선 그 의미를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국유화가 사회화는 아니다. 나라의 소유는 국민의 소유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국가권력의 형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주의적인 복지모델이던지, 기업경영 형태에서든지 일시적인 진보를 인정하는 선에서 그쳐야만 하는 것이다.



2. 볼리바리안써클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민주노동당에서 국회의원이던 지역의원이던 어쨌든 간에 소환을 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었고 통과 했다고 한다.(본인의 기억으로만 의존한 관계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역의 주민의 몇%의 동의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어느 누가 무료봉사를 하면서 지역주민의 의사를 물어보고 소환하자라고 할 것인가! 자신의 이익이 존재한다면 모를까 아무런 이득이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생업을 일시적으로 중지해가면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이 얼마나 존재할 것인가! 참여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묻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특히나 노동유연화 정책 덕분에 자신의 명줄이 조이고 있는 현실에서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존재 하는가! 참여민주주의의 바탕은 지역주민, 피지배계급의 자신들의 이익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부의 가치가 여가시간의 할애에 주어지는 상황에서 빛을 볼 것이다. 볼리바리안써클이 비록 “  운동의 목적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의로운 사회, 그리고 민중들의 실질적인 정치적 참여가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혁명적 과정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정부의 지원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정부의 재정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법인도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권력으로 가는 길에 이 그룹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에 대한 비판 및 견제의 목적으로 나타난다.“볼리바리안 서클을 통해서, 그리고 주민조직들이나 협동조합 등을 통해서 민중들은 관료들 앞에서 자기자신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회는 헌법이 부여한 권리입니다. 헌법의 166조와 192조는 지역공동체가 지방정부의 예산을 짜거나 집행하는데 참여하는 것을 시장이나 도지사가 허용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권력으로서의 형태가 아니고 자기만족적인 의미를 가지고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보조의 역할로 전락시킨다. 참여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토론과 함께 투표의 방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그런 형식 속에서 내용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며, 힘을 강제해 나가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강제력도 주어지지 못하고 자발적인 모임이라는 것으로 마치 노동자평의회의 격으로 해석을 하는 상황도 존재하지만 권력의 대변이 아닌 친목 모임의 수준으로 격하 시키는 모습에 공동체의식의 함양은 의식화를 뛰어넘는 결코 새롭지 않는 모습이기에, 현재 이 끝을 보고자 하는 모습에선 행복하지 않는 결말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계급사회에서는 피지배계급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순간 지배계급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사상이며, 문화도 지배계급을 위한 문화이다.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상의 핵심은 껍데기며 알맹이를 채우려면  피지배계급의 무한한 노력이 필수며, 지배계급을 바꿀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컵의 크기를 늘리지 않고 양동이 물을 모두 받을 수는 없다. 형식이 받혀주지 못하는 내용물은 언제나 넘쳐흘러 댐을 붕괴시킬 수밖에 없다. 형식이 강력한 힘을 유지 한다면 넘쳐난 내용물은 제거가 되고 형식의 틀 속에 남아 있는 것으로 형태는 유지가 된다. 자본주의라고 해서 노동자자주관리가 없는 것이 아니며,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간의 부의 격차가 일부지역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차가 적다고 해서 평등하고 사회주의의 척도로 삼아서는 안된다. 북구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은 신자유주의시대에 역풍을 맞아 위태로워 흔들려 무너져가고 있고, 서구에서의 복지 예산은 나날이 깎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석유에서 나오는 막대한 부는 피지배계급에게 어느 정도의 물적인 풍요를 제시하여 주지만, 자본주의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의 물적인 개량은 용납하지 않는다.


권력에 대한 형태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가 발전의 열쇠이다. 차베스와 그의 핵심이 이끌어가는 권력은 피지배계급의 권력으로 승계가 이루어져야하며, 조치들을 계속해서 취해져야한다. 대중들은 자신의 위치에 매우 고무되어 자발적으로 행동을 하고 70%가 넘는 지지율로 차베스정권을 유지 시켜주고 있는데, 말로는 사회주의로 가야한다라고 주장을 하는 차베스정권의 모습에서 권력의 핵심은 아직도 맹아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미약하고 정부의 주도에서 만들어져 급조된 볼리바리안써클의 모습은 관변단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더 높은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시작은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국가권력을 소유할 수 있을지 아니면 관변단체로 전락할 지는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은것은 필자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물적개량에 물들어가는 모습은 언제나 노동계급의 고양되어 가는 상태에서 흐름을 한순간 역전시키는 홈런 한방으로 작용할 것이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로 결집하고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본가에게 물적인 개량을 요구하고 현실에서 자신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한사람식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이 자본주의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갔는지는 이미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민주노총의 모습에서, 그들이 비호하는 민주노동당의 모습에서 대기업의 노동조합에서 이미 상처를 가지고 곪아가는 것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단체가 발전하면 정형화되고 고정되어 갈 땐 언제나 썩어가는 시발점으로 작동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지도자나 조직의 상층부를 녹여만 놓으면 언제나 자신의 몫으로 이윤이 더 많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지배계급은 알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권력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로부터 시작 한다. 권력의 핵심에서 배재된 계급은 퇴보하거나 재도전을 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권력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부터시작 되기 때문이며, 계급의 성향으로부터 국가의 형태는 나타난다.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과 노동자자주관리 형태를 빌어서 협동조합을 통해 실업률을 줄이고자하는 모습, 상대편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강력한 대중의 힘을 빌려 쓰면서 다독이고 언제나 지갑속의 돈을 끄집어내어 사용하는 모습을 가지고 “빈민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을 권력을 가질 때뿐이다”말속에서 그의 모습을 찬양하고자 하는 진보적 사상가들은 다시한번 숙고해야 한다. 진전 그 말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권력을 볼리바리안써클로 이동시켜야 한다. “볼리바리안 서클 멤버들의 상당수가 노동조합 간부 혹은 조합원들입니다. 볼리바리안 서클 안에서 노동조합 조합원들과 지역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통합이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을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볼리바리안 써클 : 베네수엘라 혁명을 수호하는 민중조직 해방 13호) 하나의 권력기구로 만들어 놓을때 노동계급은 더 많은 정치적인 경험을 통하여  스스로를 의식화 시켜나갈 것이다. 주체적인 역량의 미미라는 허울로 대중의 의식을 낮은 차원으로 추락시키고자한다는 것은 그들이 부르조아계급의 대변자이기 때문인 것이다. 대중의 낮은 의식과 주체적역량의 미비라는 명분으로 무장한분들은 대중을 따라가지 못하고 언제나 역사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왜골수라는 의미보다는 기회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미 대중은 변화를 원하고있다는 것은 중도 보수를 밀어 줄때부터 나타났고 민주노동당의 10%이상의 지지율과 더불어서 대중의 투쟁의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노동계급 또한 마찬가지이다. 피지배계급의 진전을 가로 막고 있는것은 지배계급과 그의 똘마니인 그들의 사상이지 피지배계급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물적인 개량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는것은 더 높게 날지 못하기 때문이며 사회주의 세력의 사상의 영양결핍으로 인한 인식부족으로 진보를 보수의 날개로 전락 시키는 것이다. 


부르조아지가 자본주의의 세계를 열 때 자신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왕좌에 등극했듯이 프롤레타리아트도 자신의 권력을 가질 때 강력한 토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소수에 의한 지배에서 소수에 의한 지배로 바뀐 것은 생산의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본다면 다수의지배로 바뀐다는 것은 사회전반적인 인식의 변화기 필연적이다. 또한 소수의 지배에서 다수의 지배로 바뀌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관계의 변화가 선행 되어서는 시작이 될 수가 없으며 국가권력의 힘이 없는 경제적인 관계는 언제나 권위를 잃어버리고 공허한 실험정신만이 남을 뿐이다. 부르조아지의 이익은 언제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 할때만이 가능하다면 피지배계급의 이익은 그들이 권력을 가질때 만이 가능 한 것이다. 여Xo까지의 사회는 계급사회이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기존에 존재했던 지배계급과 융합이 쉽게 이루어질수 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의 사회에서는 기존의 융합의 의미가 아니라 흡수가 되어지는 관계로 나타나 하나 하나가 아닌 또 다른 질적인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에 권력으로서 피지배계급의 의미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혁명이라고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의 의미가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차베스의 그림자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지만, 그 안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안으로 볼수 잇는 선거혁명의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고 빈수레 소리와 다를 봐가 없다. 권력의 이양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사회주의로 가는 과도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사회주의로 가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베네주엘라의 현재 모습은 부르조아의 권력기구를 그대로 두고 상품경제를 바탕으로 하면서 피지배계급의 입성을 본다는것은 아직도 사회주의자들의 가는 길이 요원하다는 것이다.



4.사회주의자가 가야하는 길


현재까지 자본주의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다른 존재를 인정 했다. 역사는 인류가 해결하지 못할 과제를 제시하지 않는다. 베네주엘라의 모습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에게 희망의 글을 보내주기는 하지만, 절망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절망이 희망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피지배계급의 전진이 필요하다. 한걸음을 내 딛는 모습에서 희망의 자리는 잡아 가지만 모두 떠난 상자안에 희망만이 존재하듯이 웅크리고 글로써만 제시하고 보여주고 있다라고 떠든다라면 비행기 떠난 항구일 뿐이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을 이기기위해서는 자신들의 조직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조직이 없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언제나 영웅만을 기다리고 있다. 영웅의 심리에 빠져들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보지못하고 남의 일에 관심을 표명하는것은 좋을 수도 잇지만 영웅의 마지막은 관료주의며 자신을 이끌고 지켜주는 인물들의 자리에 연연하게 되며 관료주의로 빠져든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관료주의는 자본주의가 낳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계급사회가 존재하는 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한 언제나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형태이다. 아직까지 관료주의적인 형태가 나타났다라고 보고는 되어져 있지 않았지만 베네주엘라의 지금의 모습은 자본주의에서 개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의심하지 않는다.


조직은 유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어떤식으로 유지 되어야 하는것이 달려 있는 문제이다. 혁명적인 방식은 다수가 소수를 지배 할 수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모습으로 표현 되어야 하는 것이다. 투표방식의 표현문제 즉 직선제냐 간선제냐의 문제, 소환을 할 수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정치 참여의 문제에서의 민주주의적인 형태를 제시 하는 것이라면 그 내용을 담보할 수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한다. 지도자가 잘못된 정책을 가지고 대중을 현혹한다면 그를 소환하여 심판을 하고자 하는 대중들에게 경제적인 여유나 그에 따른 보상이 없다면 언제나 민주주의는 퇴색하게 되며 결국 자본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계급만을 위한 사회로 환원되는 것이다.


조직은 유지되어야 한다.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조직원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조직을 지배하는 성원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조직은 더 이상의 발전은 없고 와해만이 존재하게 된다. 민주노동당의 모습은 쁘띠부르조아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진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있는 것이고 진보의 내용을 담보하는 계급적인 혁명정당이 존재한다면 서서히 와해하거나 열린우리당과 같은 정치적인 조직과의  결합을 통하여 발전을 하고자 할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국가조직도 마찬가지다. 차베스정권이 아직은 형식적이지만 대중을 위한다는 점(차베스 정권은 대중의 대한 방식은 사회주의자들의 계급적인내용과는 확연히 틀리다. 대중의 가치를 물질적인 부의 향상을 원하면서도 그들이 권력을 잡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쁘띠부르조아정권의 이름을 가진다라고 봐야한다. )에서 더 많은 발전을 할수 있겠지만 대중의 가치는 동정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사회주의의 시작은 대중의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힘은 피지배계급의 조직된 힘이다. 계급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겐 지배계급을 누를 수 있는 힘은 자신들의 조직력밖에 없다. 오염으로 가득찬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화 능력을 가진 자들은 지배적인 사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갈 수잇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 밖에 없다. 소수만을 위한 사회가 아니고 대중을 위한, 대중과 자연의 조화를 이끌어 갈 수있는 존재는 프롤레타리아트 밖에 없다. 차베스의 권력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찾아 볼 수 가없다. 차베스의 권력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또는 도시빈민, 농민이 부르조아지로부터의 권력의 탈취를 막아주는 완충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주기 원할 뿐이다. 그 보답으로 개량의 폭을 조금 더 넓여 주고 있는 것이다. 독일엔 노동자조직중에 조합과 정당을 빼고 또하나의 조직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노동자 평의회다. 독일의 노동자조직이 권력의 조직형태의 하나인 평의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사회주의의 발전은 일찌도 않는다. 평의회의 상부구조는 노조간부들과 차이가 없이 지배계급에게 포섭되어 있다. 그들이 주어지는 떡고물에 만족을 하고 행복해 하면서 노동계급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지배계급에 대한 무한한 충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도기적인 형태에서의 이중권력은 존재하지만 평상시엔 어느 계급이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나타난다. 부르조아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아니 그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 할려고 한다고 해도 경제제도가 그렇지가 않다면 공동소유라는 형식은 상품경제 속에서 자본주의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무서운 점이다. 이러한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고 북한에서 이야기 하는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어느 정신 나간 애들처럼 차베스가 사회주의 이야기하고 빈민의 권력을 떠든다고 해서 또는 공공연히 미제국주의에 반항한다고 주장을 해도 자본가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무시하지 않고 그런한 경제체제의 유지를 하는 모습에서 예전의 주사파사람하고 어떠한 차이가 있겠는가! 누가 어떻게 하겠다라고 해서 사회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라고 해서 객관적인 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물론은 사진의 한 장면을 확대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속에서 전달되어지는 체계를 해석하고 나타나는 모습을 밝혀나가는 것이다. 하나의 모습, 한마디의 말 속에서 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고 의중을 떠보는 것은 심리학자나 할 일이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과학도는 개관적인 모습을 찾아야 한다. 객관적인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희망을 발견하고픈 욕망의 발현이며, 패배주의로 빠져드는 또 다른 길의 여정이다.


사회주의는 아직도 요원하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고, 최후의 자본주의 힘이 아직도 넘쳐흘러 가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꿈을 버릴수는 없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동지들은 낙관적인 삶을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며 날이 밝아지기 바로 전에 가장 어둡다라고 하듯이 우리의 삶은 희망적이다. 지금 기업에 대해서 노동자통제를 외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꿈을 가지고 높이 날고자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고, 높은 꿈을 꾸는 자는 외롭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정치적인 전국적 조직인 혁명정당이 건설된다면 꿈은 더욱더 빨리 다가올 것이다.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계급에게 대항할 수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세력과 사상이 만연한 현실에서 과학적인 사상으로 무장된 조직인 계급정당의 건설에 한축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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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1 19:57 2007/03/0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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