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노동계급에겐 부르조아 정치일정에 하나인 선거에 대한 원칙은 무엇일까?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되어 여러갈래로 뿌리가 내려가듯이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명제속에서   의회주의환상을 제거하는데 주안점을 주어야 하는것이 원칙이다. 무엇을 가지고 의회주의환상을 제거 하는가하는 부분것을 가지고 언제나 개량주의와 혁명적진영과의 논쟁이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참여를 하는가, 보이콧을 하는가, 참여를 할때는 무엇을 가지고 참여를 하는가, 노동계급의 후보가 없는 곳에서의 타협과 조직간의 일시적 제휴를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등등의 모습을 가지고 많은 토론과 방침이 정해져 왔다. 언제나 정해져있을 수 밖에 없는 계급사회속에서의 원칙을 무엇을 가져야만 하는지를 알아 보는 것이 순서다. 개량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은 늘 해왔던일이고, 혁명진영에서의 원칙은 언제나 개량이라는 환상에 빠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원칙과 현실의 벽사이에 주저앉어 기회주의를 위한 든든한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과감한 결단의 순간에 주저하지 않고 올바른 전진을 위해서 투쟁이 불꽃을 태우기 위해서 현실에서 원칙을 구현해 내라.

 

1. 의회주의환상을 제거하라!

 

 

선거라는 것은 부르조아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피지배계급에게 자신들을 따라 오라고 하면서 제시하는 간접적인 방식의 통치체제이다. 이전까지의 계급사회에서의 지배계급이 직접 지배방식과는 다른 형식적인 평등에 기초하여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보이면서 선거라는 독특한 방식의 형식적인 절차를 가지며 가진자의 여유를 못가진자의 환멸을 공개적을 첨명하면서 대중의 전진을 가로 막는다. 노력하면 당신도 가진자의 여유를 가질수 있다고.

 

부르조아사회의 모습에선 피지배계급의 투쟁으로 의회에서 피지배계급의 후보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 낼수 있다. 제도권으로의 편입을 환영만 해서는 안된다. 제도권에서의 안착은 조직의 경직화와 더불어서 조직의 안정을 위한 부즈로아사회의 편입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부르조아 사회의 편입은 노동관료의 우경화와 더불어서 함께 기회주의로의 편입을 쉽게이루지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의 모습에서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 가깝게는 룰라가 존재하는 브라질, 차베스의 베네주엘라 등등의 모습에서 언제나 가진자들광의 함께 향유하는 조직은 언제나 부르조아색깔을 뒤집어 쓰게 마련이다. 똥간에 가서 똥냄새가 안나면 정상이 아닌것이다.

 

지배계급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필요한것은 선전선동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경험을 하여 그 것을 바탕으로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깨달아 가는데 있는 것이다. 대중은 경험을 통해서 배우기 때문이다. 경험을 가지고만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계급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깨달고 극복해 나갈수있다는 희망과 전망이 존재 할때만이 그들은 현실의 사회에서 다음사회로의 이전을 위한 준비를 한다. 희망과 전망은 혁명정당이 가지고있는 실천적인 강령에 존재한다. 강령은 현실세계에 대한 비교우위에 있으며, 그런 사회를 바라는 마음은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서 대중을 이끌어 나간다. 투쟁속에서 경험과 함께 어울려지고 혁명에 대한 발판으로 삼아 부르조아사회에 대한 기대 심리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사회에선 수령만 제거하면 왕이 도와 줄것이라는 환상속에서 투쟁이후 그들은 사라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의회에 청원을하고 법의 판결에 모든것을 걸면 이루어 질 수 밖에 없단 이데올로기 속에서 변혁을 하기 보다는 개혁을 위해서 마음 가짐을 준비 시키고 대중을 선전, 선동한다. 기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사람이 선거에서 당선이 되면 그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시켜 대중의 원하는 투쟁의 고리를 가지고 요구를 한다면 대중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주겠는가? 물론 때에 따라서 지배계급에 대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스스로는 그렇게 나타나긴 하지만 자칭 선진 노동자들의 글과 실천 속에서 나타난다는것은 언제나 환상에 빠져 한방이면 벗어 날 수있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자살이라는 최악의 수를 쓸수 밖에 없는 자멸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안돼면 됄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개량을 위한것이 아니라 혁명을 위한것이어야 한다. 지배계급에게 행정부의 일부나 의석의 일부를 가진 진보적인 지식인을 통해서 청원을 하고나서 결과를 기달리면, 합법적인 결과를 원할 것이고, 결과는 실망과 환희라는 이중의 모습으로 나타나 언제나 그 틀안에 묶어 둘수 밖에 없는 개혁 아닌 개혁으로 계속적인 챗바퀴를 돌 것이다. 일시적인 부르조아의 이익의 감소는 부르조아를 위해서 환원이 되고, 그 희생은 프롤레타리아트나 여타 피지배계급에게 전가가 되는 것이다.  한 지역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전체의 희생을 강요하기 위한 밑거름이며, 이를 통해서 민족과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의 자본주의(?)의 모습을 강요하면서 나찌즘(TV를 통해서 연개소문, 대조영, 광개토왕 등등의 고구려라는 이름을 통해서 강력했던 선조들의 나라사랑을 배워라는 강요되는 의식과 하나의 민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의식을 강요하는 모습은 한국판의 나찌즘이다)이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불안해질수 밖에 없는 일부 부르조아 들을 위한 안전판으로서 보여주는 신보수연합을 통한 파쇼화의 물결은 더 많은 희생이라는 대의속에 체제의 안정이라는 못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 안에서 청원을 하고, 청원이 안되면 투쟁을 하고, 투쟁을 하다보면 자본주의 체제가 누구를 위한것인지를 대중 스스로가 깨달아 갈것이고 그 안에서 대중은 계급의식으로 무장을 할것이다. 역사상의 기회주의 사상의 핵심은 언제나 대중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 대중의 정치는 언제나 부르조아들의 사상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겐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자신들의 강령을 썩게 만들지 않고 대중의 경험과 선진노동자들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 시켜서  현실세계에 다가선다. 일시적인 개량은 거부하지 않는다. 혁명적인 사상을 혁명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의회주의 환상은 청원을 통한 투쟁을 하는것이 아니라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속에서 지배계급이 주는 것과 빼앗는것을 알아내어 현재의 삶속에선 미래가 없다라는 사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있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 무엇을 하라라고는 강요하지 않는다. 대중의 심리적인 상태, 그들의 사회적인 조건들에  따라서 하는 모습은 천차만별이고, 하나로 강요한다는것은 투쟁의 물결을 잔잔하게 만들기 위한 또 다른 기회주의 사상의 편재이기 때문이다.           


2. 선거를 참여할것인가 보이콧을 할것인가?

 

 

선거에 참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의회주의 환상을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의 한가지 방법이다. 제도권안에 수영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제도권 바깥으로 대중을 유도하기 위한 방식중 부르조아의 합법적인 틀안에서 폭 넓은 공간을 가지는 선거 및 의회라는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선거에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참여를 해야 하는것인가라는 점은 언제나 논의가 되어 왔으며, 선거라는 제도가 틀안에서 정착이 되면서는 논외로 거의 다 토론이 없이 참여를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왔다. 습관화 또는 관례화가 되버린 현재의 선거라는 모습에서 대중에 대한 한줄기 연민은 공약이 공약으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언제나 습관적인 자기반성으로 모습을 드러 냈다.

 

선거에는 언제나 참여를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점에서 혁명적인 상황에서를 제외하고는 참여를 해야한다라고 판단들을 주로 해 왔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혁명적인 상황에서도 선거에 참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선거에 참여하는것은 선거가 계급투쟁의 한축으로서 자리를 잡고 선거라는 모습에서 계급투쟁의 모습이 재현될 때만이 가능 한 것이다. 선거는 투쟁이 계급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있다면 이미 부르조아 정치일정에 대한 대중들의 권력에 대한 반바로 보아야 하며, 혁명으로 나가는 하나의 기로에서 진군의 북소리가 울려퍼질때 불 꽃은 타오른다. 그 상태에서는 선거는 보이콧이 유지가 되고 부르조아 정치일정은 피지배계급의 투쟁에서 바리게이트에서 횡단보도로 전락하게 되어 장애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혁명은 부르조아 정치일정을 부수어 대중에게 자신들만이 새로운 정치일정을 만드는 주체라는것을 경험하게 만든다.  

 

참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존재한다면 참여 해야 하지만 현재 처럼 관례화가 되어있는 선거에서 대중들의 무관심은 언제나 투표율의 저조하게 나타나게 되는 60% 안밖이 모습에서  40%의 대중은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알려고하지 않는 모습은 선거에 왜 나갔는지 알수 가 없는 심리적인 공황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은 노동대중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상태에선 언제나 저조한 투표율을 자랑한다. 노동대중의 투쟁이 활발하게 움직일땐 투표율도 올라가고 반대의 상황에선 투표율이 떨어진다. 정치적인 무관심이 아니라 계급적인 이해와 요구에 따르는 필연이다. 정치적인 요구를 위한것이 아닐지라도 노동계급의 행동은 정치적으로 발전 할 수밖에 없으며 집단화 되어있는 하나의 단체가 조직적인 행동자체가 이미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40%를 뛰어 넘어가고 있는 자기 스스로의 보이콧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의 이러한 행동은 부르조아 질서의 편입을 거절하는 쁘띠부르조아사상의 모습이다. 대중은 이미 부르조아질서에서 염증을 느끼고 있어 혁명을 향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현실에서 선거라는 공간의 참여가 가지는 모습은 협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급의 역관계속에서 선거라는 공간의 협소함을 스스로 위안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정당은 선거에서 어떠한 모습을 취하는가? 선거의 후보자가 노동계급의 투쟁의 현장에 나타나고, 투쟁의 현장에서 강령을 통한 선거활동의 모습은 대중이 혁명정당을 부르조아정당과의 차별을 두고 볼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당선이 목적이 아니고 혁명이 목적이다. 목적을 이루어내기 위한 모습을 투쟁의 현장에서 찾아 내어야 하고 계급과의  연대의 모습은 희망으로 떠오른다. 투쟁의 현장이 선거공간이고, 선거공간은 따로존재 하지 않는다. 합법화되거나, 조직의 안정화에 모습을 가지고 있는 관료화속에서 헤메는 부르조아화된 조직의 선거방식은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난다. 선거의 공간은 대중에 대한 연설이며, 대중에 대한 헤게모니 장악이고 그 표현형태로 투표율에 대한  상황에서 울고 웃는다. 이는 혁명이 목적에서 선거가, 당선이 목적으로 전도되어 부르조아 사횡에서 탄탄대로 신작로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말은 혁명을 행동은 개량을.

 


3. 통일전선은 없다. 일시적인 제휴는 가능하다.

 

계급간의 연대조직은 가능한것인가라는 문제는 언제나 머리 아프게 한다. 많은 선각자들은 언제나 계급간의 연대라는것을 반대 해왔다. 연대라는 것은 계급간이 행동통일을 원칙으로하여 이루어지며 계급간의 민주주의적인 원칙을 공유하고자 하지만 언제든지 부르조아들은 자신들의 동원능력으로 자신감을 갖고 피지배계급을 이용하고자 해왔다. 노동자의 힘이 민주노동당과의 연합공천을 제시하면서 연대의 뜻을 이루고자한다. 되면 좋고 안되도 좋은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연대하자는 것인지 지금도 알수 없지만(당시 연합공천에 대한 글을 읽지 못했고, 지금은 어디서 봤는지 찾을 길이 없는 관계로) 기본적인 생각이 있다면 자기 스스로 비판했던 부르조아정치집단과의 연대는 계급이라는것을 스스로의 위안으로 무시하고픈 몰계급적인 판단이다.

 

선거에서의 연합공천은 둘의 힘이 비슷하거나, 하나의 힘이 약하고 둘의힘을 합칠때 더높은 지지를 얻을수 있다는 판단에서 이루어진다. 연합공천에서 이루어진 후보는 자신의 존재감을 두 조직간중에 가장 큰소리를 낼수 있는 조직의 사상에 편재가 되어 활동을 한다.  과학의 힘으로 무장된 후보가 아니고 개량의 힘으로 무장된 후보를 공천해서 얻을 수잇는 이득은 무엇인가? 후보를 도와주는 것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에겐 어떠한것을 얻을 것이 존재하는가? 얻는것보단 잃을 것이 많다. 혁명은 개량의 물결에 밀려 자리를 잃어버린다. 연합공천은 전술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과학으로 무장된 사상은 연합공천이나 조직간의 연대는 거부한다. 조직간의 연대가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수있는 일시적인 투쟁의 형태에서는 느슨한 모습으로 참여는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피지배계급의 힘이 강한 곳에선 혁명정당은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고 연대나 연합도 아닌 독자적으로 나가야 하며, 나가지 못하는 곳에서는 제휴의 형식을 통한 투쟁의 현장에서  조직의 강령을 가지고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4. 혁명을 위한 전진을 위한 제언     

 

정당투표제는 부르조아에게 유리하지만 혁명정당에게도 유리하다. 대중에 대한 선전선동과 행동의 원칙을 고수 한다면 자신의 입장으로서 대중과 하나가 되는 터전을 마련된다. 사회주의 사상을 유포하고 대중을 이끌어 나갈 수 잇다면 부르조아 정당은 혁명정당의 힘을 두려워 할것이다. 하지만 혁명적인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는 혁명정당은 대부분이 부르조아정당에게 끌려간다.

 

 부르조아 정치일정에 대중보다는 정당이라는 정치집단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대중은 무관심한데 벌써부터 대선강령이란 글문구로 현혹하고, 대선 후보를 검증하고픈 노력으로 자신이 대선후보가 되고자 노력하는 가련한 지배계급은 공약을 위해서 공문구를 남발한다. 이득은 부르조아가 독차지 하는데 마치 피지배계급을 위한 잔치를 벌이자라는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대중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기권이 40%를 육박할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은 그래도 좋다라고 잔치를 벌이고 싶을 것이다.

한국에선 아직까지 혁명정당이 없다. 혁명적인 조직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못해지만 이제부터 존재해야한다.


혁명을 위한다면 혁명적인 조직을 건설해야한다. 혁명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지 못한 개량주의 조직을 백번 비판하면 무엇을 하는가!

 

지금은 혁명적실천을 위한 혁명조직의 건설을 위한 행동을 보일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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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2 13:32 2007/05/2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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