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선이, 내년에는 총선이이라는 정치일정이 잡혀져 있다. 언제나 몇년에 한번씩이 이루어지고 노동계급을 현혹하여 의회주의라는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정치 일정이다. 여기서 당선을 성공한다면 무엇이든지 해결이 가능하고 피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해주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 한다고 해도 언제나 그렇듯이 혁명적인 세상을 말로 떠들기만 하는 기회주의 세력은 선거를 맞이 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노동자의 힘으로 무장하고 픈 노동자의 힘은 연합공천 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와 민주노동당과의 연합도 가능하다라는 연대전술을 제시하고, 민주노동당내의 좌파라고 하는 조직은 연이어서 대선강령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호소를 하고 있다. 민중, 미주 통일이라는 대선의 강령을 가지고 계급은 없어진 민족적인 환상을 심어주는 데 일조를 하고 대선을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공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서구 유럽, 베네주엘라, 브라질에서의 룰라 등등의 일종의 좌파라고 했다는 조직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현실도 무시하고 자신은 자본주의체제내에서의 개혁이라면 사회주의 실현이 가능하다라고 주장을 한다.

 

"고용불안과 빈곤이 철폐된 인간다운 삶을 사회가 책임지는 사회는 소수 독점재벌에게 집중되어 있는 산업시설을 사회적 소유로 바꾸어야 하며 소수 특권층에 독점되어 있는 정치권력을 노동자 민중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정부를 노동자 정부라 한다."(해방23호2007년 사회주의자의 대선강령 - “인간적인 삶을 사회가 책임지는 세상을 향해”.)

 

피지배계급의 무한한 상상력의 동원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회가 환상속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서 나타내어야 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삶이다. 혁명을 생각하고 혁명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혁명가들에겐 현실의 한 모습에 좌절과 슬픔이, 희망과 인내가 존재한다. 노동자정부, 또는 자본주의 사회가 철폐된 사회인 노동자국가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피지배계급의 승리의 희망으로 나타나며, 앞으로 나가야하는 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개량주의 양반들에겐 혁명에 대한 상상보단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지배계급이 다른 맘을 먹기전에 자신의 이익을 내기 위해 민중이라는 통일이라는 환상으로 대중을 비계급적인 일로 매진 시켜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조직에 한표를 행사하기를 원한다. 대중의 한표는 자신들의 힘인것이다. 대중투쟁의 힘보다는 자본주의체제내에서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민주주의 행사의 하나인 선거를 통해서 대중의 표를 획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대중은 선거에 무관심하고, 스스로 개량주의 정신에 빠져 있는 모습이 싫어 개인적인 보이콧을 하고 있어 선거 불참이 많아지고 있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개량주의 양반들은 지지율이라는 모습인 한표한표에 더 신경을 쓰고 , 대중의 지지율로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판단한다. 기호지세라, 이미 선거에 빠져 있는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면죄를 받기 때문에 선거속에서 이행기 강령, 과도기 강령이라는 멋있는 말로 대중을 속아 넘긴다. 민주노동당이 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좌익의 선두에 서 있는 것처럼.

 

대선강령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선거강령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을 호도하고 있는 모습을 가진 해방지를 비판을 했다. 전진(솔직히 비판할 가치도 없지만)과 해방지는 선거강령을 발표를 하고 선거에 임하는 자세를 밝히고 있다. 이들이 진정한 혁명을 위한 조직이라면 선거강령이라는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겠는지 한숨이 나온다. 조직의 강령이 부족하다라고 한다면 새롭게 더 보강을 해서 만들어 갈 수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한느 것 자체가 이미 부르조아의회에 대한 부정이 아닌것이다. 부정이 아니기에 의회주의 환상을 깨기 위한다면 자본주의 체제내의 개혁을 제시하는 강령이 되어서는 안되며, 현 체제를 부정하는 모습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혁명가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은 혁명을 위한 것이다.

 

선거에서 연합전술을 하기 위한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좌파들의 모습은 부르조아 정치일정에 스스로 매어 노동대중의 투쟁보다는 현재의 삶이 더 주요하게 판단하기 때문인 것이다. 선거를 통해서 대중에게 한표를 더 많이 받아 지지율을 높인다면 자신의 조직의위상이 높아질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좌파계열에 선둘르 설수있다는 예전의 사회당의 모습을 보는 것과 다를 봐가 없다. 2004년도의 사회당의 선전은 멋있어 보일련지는 모르지만 표를 통한 부르조아세상의 참여는 어제는 혁명적인 모습을 보였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재산을 늘리려는 쁘띠부르조아의 한 변종으로 퇴조하는 것이다.

 

혁명의 길이 멀고 험해도 우리는 가야한다. 개량주의 세력이 공공연히 대중과 접촉을 해도 혁명가들은 묵묵히 바라볼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혁명조직은 없고 개량의 물결은 높아 대중과 가까워질려고 한다면 같은 배를 타야 하는 수 밖에 없음에도 차비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5월이 아름다워도, 해방의 물결이 잔잔하게 느껴지고 바람이 잔다고해도 가야만하는것이 혁명가의 고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량주의 조직이 아니며, 혁명가 조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량주의사상이 아니라 혁명적인 사상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다면 개량이 위선을 벗어내야 한다.

 

혁명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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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9 20:56 2007/05/19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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