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라

 

철도노조의 파업은 한 걸음 전진을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고 믿고 싶다. 물론 노동조합의 한계가 있기에 대정부 투쟁의 전진은 자신들의 원하는 목적이 아닌 관계로 스스로의 한계를 미리 그어 전진을 포기하고 대중들이 함께하는 공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도 사실이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한 더 멀리 날기 위한 위대한 움츠림의 시작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날개를 펴고 근육에 박차를 가할 때였지만. 

 

본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비록 완성된 글이 아니고 추상적이고 현실과의 예를 피한 내용 이다보니 더욱 글이 난해하게 다가 올 수밖에 없는 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핵심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구별은 구별과 투쟁의 형식의 내용 및 발전을 위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에 공감을 형성하고자 일부 발췌하면서 이글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경제투쟁은 생존적인 문제로 단사적인 차원, 한명의 자본가와의 투쟁을 중점으로 이루어진다. 조금 더 크게 생각한다면 개별 노동자들이 개별자본가와 개별적인 정부 관리들에 대항하여 투쟁을 전개하는 것, 그것의 의미는 개별노동자들의 투쟁의 형태가 자신의 생존에 직접적인 내용으로 지엽적인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동자간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개벌적인 사안으로 개별자본가와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정치투쟁은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정치투쟁은 일반적인 정치적인 요구에 의한 투쟁이라고 하기보단 개별적인 노동자에 의한 투쟁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와 전체 부르주아들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정부기관 및 관료들과의 투쟁이다. 그 형태가 정치적인 내용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핵심은 전체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인식을 하고 전체자본가와의 투쟁을 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의 발전의 최고의 모습은 전국적인 총파업이다. 전국적인 총파업을 우리는 경험을 했다. 당시의 총파업은 87년 6월 항쟁으로 열려진 틈을 노동자들의 경제적인 열망을 표출하여 전체 자본가와의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개별적인 사업장에서 개별적인 움직임이고 단위 사업장에서의 투쟁이지만, 전체 자본가계급간의 투쟁으로 전국적인 노동자의 봉기의 수준으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노동자대투쟁의 시기였던 7 8월의 상황은 정치적인 내용으로 점철되어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노동자 자신이 대우받지 못하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몸부림이며, 그것의 보답을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다. 생존의 욕구 우렁찬 함성으로 그리고 그 대오가 한 공장이 아닌 전국적인 모습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제 각각의 사안으로 시작되어, 제 각각의 사안으로 투쟁의 한 물결이 지나갔다. 이 모습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고리는 분명하게 보여 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공화국이다. 부르주아들의 전체와의 투쟁은 언제나 정치투쟁이다. 노동운동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전복시킨다. 자본주의 사회가 뒤 엎어진다는 의미는 국가권력이 새로운 계급으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단계적으로 보거나, 이원화시켜서는 안 된다. 경제적인 제 요구는 상황에 따라서 정치투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정치투쟁으로 바뀐다. “ (빨간머리앤은 왜 정치적 요구투쟁만 정치투쟁인가?)

 

경제적인 제 요구 투쟁도 정치투쟁이며, 정치적 제 요구 투쟁도 경제투쟁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사노련과 해방연대의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의 모습은 대중들과의 연대도 아닌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자신들과 법관이라는 국가기관의 일부와의 투쟁은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고 하지만 정치투쟁이 아니고 경제투쟁인 것이다. 경제적 제 요구 투쟁은 개별적 자본가와의 투쟁이 아닌 전체 자본가와의 투쟁으로 변화가 되었을 때 비로서 정치투쟁으로 변화가 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외치고 사회주의를 공부를 한 사람들이면 이러한 내용은 학습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살짝 지나가는 글로 읽는 경우가 더 많으니 문제이긴 하다.

 

경제적 제 요구 투쟁은 자본주의 내에서 또는 이 후의 세계인 사회주의 사회에서조차도 인간들이면 누구나 누려야하는 물질적인 제공을 그 내용으로 한다. 임금인상부터 시작하여 복지, 세금, 교육, 의료 등등의 제요구들이 거기에 해당된다. 현재 진행 중인 의료, 철도의 민영화의 반대 투쟁도 경제적 제 요구 투쟁의 하나이다. 그러나 철도 민영화반대 투쟁은 단사적인 차원의 흐름을 뛰어 넘어 대중적인 호응을 전제로 대중과 함께하면서 사장과의 면담으로 해결할 수준은 넘어 선 것이다. 박근혜정권의 불통과 강압적인 대중운동의 흐름을 막고자하는 모습에서 더욱더 강한 대중들의 동참을 촉진 시켰다. 경제적인 제 요구 투쟁은 정치투쟁으로 변화가 되어, 현 정권과 부르주아 전체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투쟁의 한계는 물적인 개량요구 투쟁이기에 한계가 존재하여, 더 높은 발전을 하기위한 매개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 매개는 정치적 요구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를 외치고 그것을 학습하고자하는 모든 동지들은 경제투쟁과 경제적 요구투쟁을 같이 바라보는 경향이 많으며, 실제로 운동의 형태를 그러한 부분에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강하게 어필을 한다. 그리고 다음엔 아니면 말구라는 내용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한다. 현재까지 제 정파들의 철도노조의 민영화반대투쟁을 박근혜정권의 퇴진운동으로 발전을 희망하고 그러한 내용으로 투쟁의 방향을 전개시키고자 갖은 애를 서 왔다. 이런 운동의 시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넣기 시작한 것이다. 박근혜정권의 퇴진운동은 이미 부정선거, 국정원, 국방부 등의 댓글로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이미 상실 했으며, 그 명분으로 퇴진운동의 형태는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적 제 요구 투쟁은 그 매개물은 언제나 강령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경제적인 내용이 담긴 내용이다. 강령투쟁은 사회주의로 대중운동을 발전시키는 핵심이다. 사회주의운동의 핵심은 일개 정권 퇴진운동으로 모여지는 그러한 형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물론 현 상황에선 정권퇴진이 대중운동의 진폭을 높여 침체가 되었던 대중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것엔 동의를 하고 그러한 내용으로 대중들과의 유대를 활성화 한다는 것엔 찬성을 한다. 그러나 정권퇴진운동도 그 이후의 대안이 나와야 하지 그러한 대안도 없이 무조건적인 퇴진운동은 운동을 활성화시키기는커녕 차후에 대중을 운동을 부르주아의회와 더불어서 그 권력기구에 대중을 종속시킨다.

 

현재 운동정파들이 하는 모습은 대안조차도 제시하지 못하고 대중들의 행동에 끌려 다니고 있는 것이다. 왜 대안을 못 찾는 것일까? 아니다.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안 찾는 것이다. 자신들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떠한 내용으로 대중들과 결합해야 하는 줄도 모르기 그 동안 해왔던 관행으로 오늘도 이정도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과 조직이기주의 그리고 핵심적으로 그 조금만한 조직에서 조차도 권력을 향유하고자하는 욕심을 채우기 바빠 대안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안은 사회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사고방식이다. 대안을 제시 못하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방기다.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는 대중을 그 목표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 두 번째는 대안을 매개로 하여 대중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인 사회주의사회로의 전진을 돕기 위함이며, 세 번째로는 사회주의에 대한, 적색공포심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막연히 현재의 투쟁의 의미와 맥이 맞지 않는 구호와 정치적인 목표로 대중을 선전 선동한다면 대중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거리를 두면서 외면할 것이다. 대안은 사회주의적 대안강령에서 나와야하며 동시에 당시 시대적인 요구사항에 맞게 내용이 전개 되어야한다.

 

민(사)영화의 반대는 무엇인가? 이윤의 논리를 깨 부시는 것이다. 이윤의 논리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자본은 이윤이 존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윤의 합리화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과는 맞지 않는다. 이윤의 확대 및 확보는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철저히 이윤을 따라서 움직인다. 의료민영화의 내용도 의료자본의 이윤을 확대하고 하는 논리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대중운동의 핵심은 대중에게 이윤의 논리로 재무장하게 해서는 안 되며, 이윤의 논리로 대중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사회적분위기를 철저히 무너뜨려야하는 강령으로 부르주아정권과 맞서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대중을 기계로 만들지 말자. 자신들의 협소하고 기계적인 사고방식을 대중에게 주입시키지 말자. 철도노조의 민(사)영화반대 투쟁의 모습에서 무조건적으로 정치투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거나, 그러한 투쟁으로 변화되어야한다고 주장을 하면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은 언제나 무너질 것이다. 겉으론 유식하고 멋있게 대중에게 보인다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대중은 그러한 모습은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공허하게 남을 뿐이다.

 

2013년 12월 31일 오후 5시 20분경에 박근혜정권의 퇴진과 특검제 실시를 주장하면서 분신을 시도하였고 지금 위독한 상태라고 전한다. 철도노조는 22일간의 파업을 풀고 희생을 최소화 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사회적 대화와 합의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분신하신 분은 자신의 열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감정과 현시대의 아픔에서, 전진을 멈추지 말자는 의미로 나가야함을 스스로의 몸을 태워야 했으며, 살아남고자 했던 철도노조는 정부의 강격한 탄압을 대화와 타협의 정신으로 이기고자 한다.

 

작은 불은 물로 끌 수가 있지만, 큰불은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주위에 탈수 있는 물질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큰불을 잡을 수가 있다. 정부는 큰불을 잡기위해 탈수 있는 물질을 제거 하고자 민주노총을 침탈, 수서발 KTX 면허발급이라는 초강수를 두어 불길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불을 키워주었다. 그러나 불길은 자발적으로 수그러들었다. 인화성의 물질이 옆에 있음에도 옮겨가기 못하고 자신이 피운 불에 자신이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스스로 꺼져가고 있다. 이는 방향성을 잘못 잡은 것과 처음부터 큰불로 나가기를 꺼려했던 그들의 존재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투쟁의 대안과 의미를 제대로 만들어가자. 사회주의자들의 목적은 사회주의를 세상을 대중과 함께 만드는 것이다. 정권퇴진운동은 사회주의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즉 사회주의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대안을 대중과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사회주의를 외치는 동지들의 의무는 정치적 요구투쟁과 경제적 요구투쟁을 분리해서 사고를 해야 하며, 경제적 요구투쟁은 강령투쟁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요구투쟁은 권력투쟁이 아닌 이상 강령을 중심으로 권력지향으로 가야한다. 경제적 제 요구투쟁은 삶의 지표를 보여주어야 하며 이것은 사회주의사회에서조차도 실현을 전제로 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실현은 주객관적인 여건에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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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1 10:57 2014/01/0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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