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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26
    2007/10/26-남북경협과 노동자
    슈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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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0/01 추석 성묘가는 길 : 꽃
    슈웅

2007/10/26-남북경협과 노동자

<외부 상황>

- 북 제재와 경협

: 미국의 선택과 6자회담의 향방

: 미국과 남한 정권의 역관계 - 역사적 이용관계

- 이념적, 안보/군사적 평화실현

: 인권 실현의 문제

 

<체제내적 이해>

- 체제와 정권의 분리 시각 필요

: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이중성

: 중앙통제 강화와 시장 유영성의 이중성

: 군과 당의 강화, 그러나 행정 중앙 관리의 지방 관료세력 양성(부중축재)

- 시장 형성과 시장경제 가능성 ==> 자본과 임노동 관계 형성 시작

* 사회주의에서 시장은 어떤 것인가? 현실 사회주의(북한)의 시장은 어떤 의미와 기능을 하고 있나?

- 장마당, 현물교환중심, 화폐-상품 생성

 

<납북 경협>

- 노동권

-사회복지 시스템 복원

: 내- 관료주의, 권력중심 부 축적 제어 필요

: 외 -대북 제재 해제

- 특구 중심의 경협의 문제 - SOC 문제오도 연계

- 개성공단 노동력의 흐름도 살펴야

 

<영역별 교류>

민간 - 노동/경제/문화/보건복지 등, 기본적 설정과 핵심 전략에 따른 분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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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5

o.

햐. 오늘은 생각보다 더운 날이었다.

 

0.

요즘 의문은 블로그 방문자 카운팅이 계속 올라간다는 거다.

겨우 한 달가량 되었는데,

방문자가 있다는건 묘!!한 느낌이랄까.

감정 토로 말고

생각도 토로해얄 텐데.

 

0.

남북정상회담은 언론 잔치로 끝이나고 말았다.

기업 CEO도 아닌 사람에게는

제도적 변화가 가장 먼저 다가올 것 같다.

중심을 잡지 않으면 흔들릴 것이다.

한반도 특수성을 고려한 변혁적, 국제주의적 시각을 확보해야할 것.

 

0.

시덥잖은 이메일로 주고받은 얘기는

서로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만 형성한다.

면 대 면도 이 이상을 하지는 못한다.

진솔한 대화, 소통은 어떤 것인가?

사적 소통의 과정에도 정치란 통하는 건가?

 

0.

정치적 관계가 아니면 사교적 관계라는 현재 인적 관계들.

그 경계는 무엇이고

선택에 따라 무엇이 달라지는가?

사생활의 영역이란 것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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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1

0.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물었다. " 나 기가 팍 죽은 것 같지? 응?"

그 친구 대답한다. "어, 기가 죽은 것 같어"

 

0.

이 친구가 제안한다. "해외로 이주하는게 어때? 충분히 먹고 살수도 있어"

이 말에 흔들리는 나를 자각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나 정말 여기서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건가봐...."

 

0.

느슨해진 일상을 죄여줄 내적 동력도....외적 동력도 없다.

왜 이토록 스스로 버려진 걸까?

 

0.

과장이 아니라 난,

무능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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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1 추석 성묘가는 길 : 꽃

 

 

 

 



엄마 산소 가는 길은 7촌 할아버지 댁을 거쳐야 갈 수 있다.

 

엄마 산소 가는 길이라고 명하기 전의 7촌 할아버지 댁은

번잡스런 명절의 한 코스였다.

 

불과 몇년 전까지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지낸

설, 추석, 기제사때면

제일 먼저 시골 우리 할아버지 댁에서 첫 제사를 지내고

두번째로 가는 집이 이 할아버지 댁이다.

그리고 나서도 두 집을 더 찾아가 제사를 지내야

비로소 성묘길에 나선다.

 

예전만해도

첫 제사를 지내는 우리 집은 항상 해 뜨기 전에 제사를 지냈다.

우리 집 뒤로 세 집을 더 들러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제사인 관계로 모두들 아침을 우리 집에서 먹었다.

제관만 25명......

 

왜 네 집의 사람들이 이렇게 하냐면....

우리 증조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어른 항렬을 맞추어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사형제 중 세째셨고,

이 사형제 내외 중 유일한 생존자가 우리 증조할머니였기 때문에

고조, 고고조 할아버지, 할머니제사까지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존자가 계신 집에서 가장 먼저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

첫 제사도 우리집 몫이었다.

 

정말 이렇게 써놓고 보니 눈물겹다.

이 번거로운 제사와 명절이 매달 한번씩 꼭 있었는데,

이때 마다 반복하는 일을 나는 20년을 봤다.

내가 대학 갈 무렵 증조할머니 초상을 치뤘다. 

 

울 엄마는 꼬박 시골집에서 매달 20년을 이렇게 보냈던 거다.

 

네 집, 각 집의 며느리는 각 집의 제사 준비를 한다.

우리 집은 명절날 늦잠 잘 수 있는 구조가 절대 나오질 않았다.

사랑에 가서 몰래 누워있으면 반드시!! 잡혀나온다.

 

가마솥 2개를 부엌 밖에 걸어두고 국을 끓이고

며느리 4명과 손녀 하나, 그리고 시어머니는 정신없이 제사 음식을 담는다.

그리고 바로 돌아서면 아침 밥을 마당에 차려낸다.

 

항상 시골집에는 식당만큼 많은 그릇들이 있었다.

제관 25명이 다음 집으로 사라지면 설겆이를 마친 뒤에나

여자들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제관이 25명 정도로 그친건

할아버지가 외동이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촌수를 따져보면 10촌이 훌쩍 넘는다.

예전에는 이 정도 세대가 함께 모이는건 다반사였단다.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나이 드셔서 정말 가실 날만 기다리신다.

어릴적 함께 컸던 9촌 아저씨들은 이제 다들 장가가서 10촌 동생들을 데리고 온다.

9촌 아저씨..이 자들 중에는 함께 대학 다니던 자, 동갑내기인 자들이 있다.

(이상하게 아버지 쪽으로는 아들이 많다. 딸은 한 집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이상한 일이지...)

 

이 자들 어릴 적,

나랑 같은 초딩이었던 이 자들이 울 아버지 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꼭 따로 불러내서 면박주고 괴롭혔었다.

할아버지한테 제대로 걸리면 야단은 내가 다 맞았다.

주먹다짐에 짱돌 던져가면서 싸우던 '아저씨'들이

이제는 장가가서 어른행세하고 나타난다.

 

이들과 함께 온 새파란 새댁들은

내가 아주머니라고 불러야 할 여인들이다.

이 중에 고등학교 동창도 있다.

 

예전 심술이 다시 살아나서 살짝 괴롭혀보기도 했다.^^;;;

울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봤으면

조카가 어디 아주머니한테 그러냐고 한소리 하셨겠지만,

다른 어른들은 이런 상황이 재미난지 그냥 보고 웃으신다.

 

엄마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모든 제사를

아버지가 모시고 왔다.

명절도 우리 집에서 지냈다.

거의 30년을 엄마는 그렇게 고생하다가 갑자기 가셨다.

 

편하게 제사 지내보는게 소원이라더니

이제 소원대로 편해졌는데

뭔가 더 불만이 있었던지 더 편한대로 혼자 가셨다.

 

내년 봄에 엄마 산소 근처에는 꽃나무를 많이 심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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