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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글에 대한 문제제기에 답한다 [사회주의자 통신 2호]

비평글에 대한 문제제기에 답한다

- 정치적 통일과 조직 문제

 

사노위 서울지역위원회 조직국장 임천용

 


 

사노위 정치원칙

 

사노위는 지난해 5월 11개 정치원칙에 대한 동의지반으로 출범하였다. 이러한 동의지반은 쉽지 않은 산고를 겪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매우 다양한 세력들의 연합이었고, 공동의 활동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동안 따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강령상의 통일은 토론회 몇 번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1년여의 시한을 두고 공동의 활동 속에서 당추진위 건설을 위한 강령적 통일을 목표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1개 정치원칙을 제출하였다. 이 정치원칙은 사노위가 출범하기 이전 제조직들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다. 물론 이마저도 극적인 정치적 타협, 특히 구 사노련 동지들의 최후통첩식 정치협상에 의한 결과물인 것이다.

사노위 정치원칙이 타협의 산물이라는 것은 사노위 결성과정과 구 사노준 강령의 형성과정이 연속되는 시간 속에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 구 사노준 동지들이 자신의 강령이 아닌 별도의 사노위 11개 정치원칙을 공동으로 마련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11개 정치원칙이 정치협상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 사노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장>이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의 안에 합의한 것이다. 그 외 동지들은 별도의 강령을 제출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11개 정치원칙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결합하였다.

 

그렇다면 사노위 정치원칙이 왜 정치적 타협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한가? 만약 사노위가 당추진위 강령을 마련하기 위한 공동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의 공세에 맞선 공동투쟁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정도를 상정했다면 당면한 투쟁목표를 통한 협정만이 있었을 것이고, 정치적 입장의 후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타협은 불가피하게 혁명적 진영의 정치적 입장의 후퇴를 동반하게 된다. 이를 알면서도 사회주의 당건설이라는 계급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선택이 곧바로 강령상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노위 기간으로 상정된 1년(+3개월)의 기간 동안의 일시적 정치적 후퇴를 명확히 하고, 타협이 완성된 순간부터 혁명적 사회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추진위가 혁명강령으로 조직될 것인가 아니면 유로꼬뮤니즘식 강령으로 조직될 것인가의 문제로 드러날 것이다. 바로 이 측면에서 사노위에 참가하고 있는 동지들은 이러한 투쟁에 얼마나 충실했는 다시 한 번 되물어 한다.

 

만약 사노위가 혁명적 강령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역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것이다. 사노위는 목적 달성을 실패한 채 진보정당이 아닌 혁명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노동계급 운동에 적극적으로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겐 무덤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현실을 외면하고 현재 사노위의 분열적 모습이 마치 운동을 후퇴시키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정치적으로 줏대 없는 사람들을 겁줌으로써 대동단결을 외치는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 서문에서 “현실운동의 한걸음 한걸음이 한 다스의 강령보다 중요하다”는 유명한 문구를 즐겨 인용하는데, 이 얼마나 분별없는 짓인가. 맑스는 강령을 공식화하는데 있어서 절충주의를 호되게 나무라 하면서 혁명적 강령의 필요성을 옹호했다. 여기서 “한 다스의 강령”이란 아흐제나흐 파, 라쌀레 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뒤섞어 놓은 절충주의 강령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충주의 강령은 현실운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슨 맥락인지 궁금하다면 서문의 나머지 부분도 마저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므로 만일 아이제나흐 강령을 넘어서서 나아갈 수 없었다면 - 그런데 세태는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 그저 공동의 적에 반대하는 행동에 관한 합의를 체결하고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원칙 강령을 (더 장기간의 공동 활동을 거쳐 준비될 때까지 유예하지 않고) 작성한다면, 그것은 당 운동의 높이를 가늠하는 이정표를 전세계 앞에 세워 놓는 것입니다.

 

결국 각자의 강령을 가지고 쪼개지든, 아니면 통일된 강령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든 스스로의 정치를 후퇴시키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면 모두 다 운동에서의 발전이다. 왜냐하면 은폐되지 않은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발전시킨 결과물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퇴행적인 것은 강령 없이 그리고 무원칙한 대동단결을 외치면서 모였다가 바람처럼 흩어지는 것이다. 현재 사노위가 과거 사회주의 써클들의 위치를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추진위로 나아갈 것인가는 11개 정치원칙에 입각해 회원을 얼마나 늘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혁명적 강령을 쟁취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조직문제에서 두 걸음 후퇴

 

사노위가 정치적 경향의 상이함을 뒤로한 타협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조직문제에 있어서도 차이를 동반하게 된다. 정치적 통일 없이 조직적 통일은 빈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노위의 조직활동은 사노위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동지들에게 사실상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정치적 차이와 조직활동의 경험의 차이는 사소한 것도 중요한 조직적 사안으로 만들 수 있는 휘발성 물질이기에 충분했다. 휘발성 물질은 그때그때 제거되지 않으면 쌓이게 되고 보다 큰 위험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활동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조직문제에 대한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의 대답은 사회주의 운동의 조직 기본원리로 통용되는 민주집중제에 의해서, 오직 혁명적 방식으로 휘발성 물질을 상시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사노위의 조직문제는 지난해 가입원서 처리 문제와 올해 사노위 서울 <사회주의자 통신> 창간호의 비평글을 통해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들이 처리되는 과정은 조직문제에 있어서 후진적 경향의 승리를 동반하였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라 칭해지는 다수결에 결과였다.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에 의한 정치적 통일을 동반하지 않은 일반 민주주의 원칙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 결과 조직문제에서만 두 걸음 후퇴한 것이다.

 

먼저 지난해 가입원서 처리 문제를 보자. 중앙위원회에서 사노위 성원들이 가입원서를 작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거부하는 동지들이 있었다. 총회에서 이미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또 쓸 필요가 있느냐 등의 얼핏 수긍이 가는 문제제기부터 회원을 관료적으로 통제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맞선 동지들도 있었다. 두 경우 모두 중앙위 결정을 따르지 않은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서울지역위에서는 입장에 대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을 파괴한 행위에 대해 징계안을 제출하였다.

이 문제는 서울지역위원회 운영위를 거쳐 중앙위원회에 제출되었으며, 중앙위원회는 사노위가 공동실천위 단계이기 때문에 징계할 수 없다고 결정함으로써 기존 가입원서 작성 결정을 뒤집었다. 공동실천위 단계에서는 조직결정에 따르지 않아도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다고 공표함으로써 중앙위원회는 실질적으로 파산하게 되었고 동시에 사노위 1기도 마무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토론의 결과 결정된 사항에 대해 행동의 통일을 부정하고 그것을 오히려 응원하는 동지들을 한 편으로 하고, 행동의 통일을 옹호하려는 동지들을 다른 한 편으로 하여 정치적 입장이 갈라졌던 것이다.

 

다음은 서울지역위 <사회주의자 통신> 창간호에 실린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에 대한 비평글 문제로 인한 조직문제다. 비평글에 대한 사노위 중앙의 입장 표명 요구에 의해 서울지역 운영위원회는 "조직의 주요한 사상을 담아 조직의 이름으로 발간된 소책자에 대해 ‘비평’ 글처럼 규정한 것은 조직의 사업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정은 조직내의 정치적 토론과 비판에 대해 조직에서 발간된 소책자라는 이유로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지극히 관료적인 처분이다. 이러한 결정은 조직의 상층에서 발행된 사노위 신문에 대해 하급단위에서는 비판할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사노위 8호에 게재된 리비아의 내전중에, 제국주의에 맞서 카다피와 제휴하자는 반동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입장을 중앙보다는 하급단위인 서울지역위원회의 <사회주의자 통신>에서는 비판할 수 없게 한다. 사회주의 조직에서 비판의 자유를 상급과 하급으로, 그리고 조직 내부와 외부로 나누는 것은 지극히 편의주의적 발상에 다름 아니며, 사회주의 조직에서 용납될 수 없는 태도다.

서울지역위원회는 조직의 결정사항인 소책자 판매를 보이콧하자고 선동하지 않았다. 이것은 행동의 통일을 방해하지 않았다. 단지 소책자에 대해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 비평한 글을 실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비판의 자유를 서울지역위 다수의 운영위원들처럼 부정하려는 경향과 비판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경향으로 정치적 입장이 대립했다.

 

이처럼 조직문제에서 두 번에 걸쳐 후진적 경향이 승리함으로써, 조직상의 휘발성 물질이 혁명적 방식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존치됨으로써 내적 모순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조직문제에 있어 적극적인 토론과 비판 없이 항상 다수 동지들의 승리로 귀결된다면, 그러한 승리는 기존 조직의 내부가 정치적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낡은 조직을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로 봉합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 혁명적 경향을 옹호하는 동지들을 조직문제에서 더 이상 다수의 틀로 가둬둘 수 없다. 이들은 혁명적 강령을 건설하는 것에 부단히 투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것을 완성함으로써 조직문제에서 사회주의 조직의 기본 운영원리를 지켜나갈 것이다.

 

 

소책자 문제와 정치적 토론

 

글 서두에서 사노위 건설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이유는 사노위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책자들은 특정한 경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불가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동의하는 일반적인 내용을 담은 것만 발행될 수 있거나 아니면 소책자 자체가 발행될 수 없을 것이다. 사노위에서는 소책자를 몇 번 발행하기로 했고, 발행책임은 중앙에 위임되었다. 그것의 결과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소책자 발행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완성본의 내용에 대해 비판할 자유를 봉쇄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사노위처럼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을 위한 강령을 만들어나가는데 있어서 보다 활기차게 진행되어야 할 정치토론를 심각히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후퇴적인 것이다.

조직내외를 막론하고 활발한 정치적 투쟁만이 조직내의 후진적 경향을 끌어올리고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러한 투쟁이 조직을 깨고 분란만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사노위의 동지들이 하나로 통일되기 위해서는 여러 경향간의 투쟁 속에서 정치적 입장을 발전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것만이 인적 관계에 의한 형식적 통일이 아니고 실질적인 정치적 통일을 가능케 한다.

 

소책자 비평이 내용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동지들은 <사회주의자 통신> 혹은 중앙 신문, 그것도 아니면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서 반박하는 손쉬운 길이 있었다. 그 반박이 정당하다면 현재의 논란은 손쉽게 정리되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논쟁의 과정에서 최소한 내용적 상승을 이뤄냈을 것이다. 그런데 비평글에 문제제기하는 동지들은 이 쉬운 방법을 두고 오히려 관료적이고 행정적인 처리로 비판을 봉쇄하려는 경향에 의해 내용 문제를 조직문제로 뒤바꿔버렸다.

결국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떤 내용상의 반박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주의자 통신> 창간호의 소책자 비평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유토피아적 묘사와 그것과 연동되는 계급투쟁의 실종,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공상적 사회주의로 여전히 빠져들었다는 주장에서 정정할 것은 없다. 오히려 소책자가 사용하는 주요한 개념들에서 과거 민중주의의 잔재를 떨쳐내 버리지 못한 입장들을 본다. 공상적 사회주의, 국가권력 장악의 상 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고 싶은 희망의 끝은 건전한 인간 이성에 호소한다.

일부 동지들은 소책자 구성의 후반부에 사노위 정치원칙이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조직의 주요한 사상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이것은 형식논리에 불과하다. 소책자의 전반부는 후반부 사노위 정치원칙과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만약 이것을 유기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동지이 있다면 스스로 독해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독해능력이 뛰어난 동지들만이 사노위에서 발간한 소책자가 사노위 정치원칙을 올곧게 담고 있기 때문에 사노위의 지역조직인 사노위 서울 발간물에서는 소책자에 대한 비판이 허용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조직의 소책자에 대해 어떻게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냐며 의아해하는 동지들도 있다. 하지만 이미 강령 초초안 토론에서는 블랑키주의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토론은 공상적인 것을 공상적이라고 말할 자유가 있을 때에 가능하다. 차이를 봉합하기 위한 신사적이고 외교적 용어가 아니라, 보다 높은 통일을 원한다면 먼저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다소 거칠더라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공동실천의 최종적 결과물로 어떠한 강령이 사회주의 당추진위 건설의 강령으로 남을 것인지 한 달(+3개월)이 남아있다. 이 기간은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국제적 경험이 가르쳐주고 있고, 사회주의 혁명정당을 만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노동자계급 대 자본가계급 투쟁의 필연적 발전경로인 내전을 승인하느냐 마느냐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한편으로 남한 사회주의 운동 진영에게 해결된 지 10년도 훨씬 지난 낡은 사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제야 대중적으로 제기된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사안이기도 하다. 이 기간은 사노위가 혁명적 사회주의로 전진할지 유로꼬뮤니즘으로 미끄러질 것인지를 가늠하게 된다. 아랍민중들의 계급투쟁이 보여주고 있는 바, 지배계급에 대항한 투쟁은 대체로 내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랍을 포함한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은 필연적으로 내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과거의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운동에서 확증시켜주고 있다. 이러한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무엇보다 긴급히 요구하고 있다. 아랍에서뿐만 아니라 여기 남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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