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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에 대한 간략한 비평 [사회주의자 통신 1호]

소책자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에 대한 간략한 비평

 

사노위 서울지역위 임천용

 


 

기고의 배경

 

사노위에서는 사회주의를 대중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라는 소책자를 3월 5일에 발간했고, 홈페이지 등에서 소개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대중적 소개는 보다 엄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만큼 대중의 여론에 부딪혀 싸워야 하고, 그동안 자본가 국가가 사회주의에 대해 행했던 모든 악선동에 정면으로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대중의 여론이란 부르주아적 여론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대중화는 맑스를 비롯한 혁명가들의 이론적 성과와 국제 혁명투쟁의 고유한 경험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때에 가능하다. 사회주의는 과거의 좋은 것들은 취하고 부정적인 것은 버리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개념을 재구성하고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과 같은 “비대중적”인 언어들을 교정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의 희화화를 낳게 된다.

이 소책자는 사회주의를 널리 알리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소책자의 1부와 2부만 간략히 살펴볼 것인데, 소책자의 전체 기조는 사회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판적, 공상적 사회주의로 후퇴하고 있다. 소책자는 이미 하나의 정신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사소한 교정을 위한 목적은 여기에 있을 수 없다. 단지 독자들이 이 소책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가 이 글의 주된 관심사다.

 

 

사회주의 - 유토피아적 공약인가 아니면 계급투쟁의 연속인가

 

사회주의 운동이 공상적 사회주의 또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다른 이유는 노동자, 민중, 그리고 인류전체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 200여년의 역사만 보더라도 노동자계급의 처참한 상태를 이용하여 봉건적,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 세력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에 맞는 “사회주의”를 고안하고 노동자들을 동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는 21세기 자본주의하에서도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사회주의 필연성은 현재적 고통에 대한 묘사로부터가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 그 자체에 의해 불가피하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전 사회체제와는 달리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이라는 주요한 특징이 더해진다.

그런데 소책자 1부 “왜 사회주의인가”에서 고통에 대한 묘사는 있지만 계급투쟁은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주체 세력인가가 빠져있다. 그 결과 결론은 “... 고통을 끝장낼 것인가? ... 자본주의를 넘어설 것인가?”와 같은 인간 이성의 판단의 문제로 치환되고 있다. 다음 2부는 “사회주의, 바로 이런 사회다”로 넘어가는데, 거기에서는 사회주의의 한가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주를 이룬다. “사회주의는 어떤 사회일까”라는 질문은 그것이 현실의 계급투쟁과 구체적 연관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이상세계를 갈구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회주의는 목가적인 평화로움 대신에 치열한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사회주의는 파리코뮨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유럽에서의 수많은 패배한 혁명들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국가권력을 놓고서 벌어진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없이 어떻게 사회주의가 설명될 수 있는가?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자본주의의 유물과 자본주의로 회귀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가차 없는 폭력과 문화적 설득을 통한 또 하나의 계급투쟁의 시대다. 자본주의의 국제적 연관고리가 심화되면 될수록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는 혁명의 방어뿐만 아니라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위한 보다 고도한 투쟁 과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소책44

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목가적인 환상으로는 절대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

이 소책자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고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일시적인 지지를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가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심화는 그러한 조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계급은 착취와 억압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악행을 묘사하는 사회주의자들보다 멀리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소책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계급투쟁을 이해하고 과거 혁명운동의 경험들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보다 주요한 역할이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을 기독교도들로부터 구분해주는 것의 하나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유토피아적 이상사회를 내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사회주의 사회조차도 계급투쟁의 연속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ABC에 대한 문제

 

이제 소책자의 기본적인 사상적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두 가지만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하나는 “노동자민중의 현재 소득과 미래소득에서 ... 자본을 살리기 위해 노동자민중이 수탈당한다”(9쪽)인데, 이는 생산의 영역에서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고찰하지 않으려는 부르조아 경제학의 방식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맑스주의 계급 구분은 개개인의 소득이나 직업으로 판단되지 않고, 생산수단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확증된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통제하에서 일하면서 죽지 않을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현재 소득과 미래 소득”이란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소득”이 오타라 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 “미래 임금”이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아직 생산과정에 투입되지 않은 미래의 노동에 대해 자본가들은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도 미래의 노동에 대해 미리 “수탈”당할 수 없다. 자본가는 생산과정에 투입된 노동에 대해서만 착취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의 임금은 자본가와의 투쟁 속에서만 결정될 수 있다. 그것이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라 불리는 임금이 아닌가?

소책자에서 “소득”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사회주의자가 노동자계급만의 입장을 배타적으로 지지하고 혁명적인 세력으로 인정하기를 꺼리고, 자본주의로 인해 몰락해가고 있고 몰락할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지를 대변하려는 열망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는 소부르주아 진영중의 일부가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노동계급의 입장에 설 때에만 함께 할 수 있다는 혁명적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소책자에서 “노동자민중의 현재소득과 미래소득”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민중이라 불리는 자영업자, 농민에게 존재하지 않는 임금에 대해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과 소부르주아지 둘 다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소부르주아지의 이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노동계급의 입장으로부터 멀어지고 반동적이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환상을 좇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것의 비근한 예가 기본소득제로 표현되는 소부르조아적 고안물이다. 모든 시민이 기본소득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망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착취제제는 그것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본가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지 않고 자본가들이 노동착취로 축적한 자본의 일부를 다시 분배해달라는 요구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기본소득제 구상은 어떤 계급이 생산을 장악하고 통제할 것인가를 둘러싼 전투가 아니라 자본주의는 영원하다는 전제 아래서 항상 패배한 전투의 결과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200년 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이었지만 지금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몽상가들이다. 사노위의 소책자가 몽상가들을 모집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지 않고 사회주의자로서 대중들을 결집시킬 수 있도록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소책자 2부인데, 여기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해 “... 어떤 계급도 착취도 억압도 없다. 이게 바로 사회주의다!!”(20쪽),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 사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다.”(21쪽)라고 하고 있다.

사실 사회주의에 대한 유토피아적 묘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공산주의 기본원리를 사회주의로 둔갑시키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기본적 지식만 있었어도 사회주의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소책자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기본 정신은 “사회주의 재구성”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히 공상적 사회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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