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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자유는 옹호될 수 없는가? [사회주의자 통신 1호]

혁명의 자유는 옹호될 수 없는가?

- 사회주의자 재판

 

사노위 서울지역위원회

 


 

“사상의 자유 침해 논란 사노련 오세철 교수 집유”

- 2월 24일, 한겨레 신문 사회면

“법원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폭넓게 허용해야”

- 2월 24일, 경향신문 사설

“우리가 오늘 오세철 선생님을 방어해드릴 수

있다면 내일은 우리들의 표현 자유부터 강화될 것”

- 박노자 교수

2011년 2월 24일. 사노련 국가보안법 선고 판결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번 법원의 유죄 판결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있다. 근거로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옹호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에 대한 옹호만으로는 이번 판결을 일관되게 반대할 수 없다.

법원의 유죄 판결 기준을 살펴보자.

사노련이 ‘국가변란 선전 선동 목적 단체’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사노련의 목적이나 실제 활동이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제도와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 질서 등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면서 무장봉기 등 폭력적 수단을 통한 현 정부의 전복 및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선전 선동하는 것이어야 하며 ...

- 판결문 243쪽 중에서, 강조는 필자

강조한 “하면서”에 유의하라. 법원의 유죄 판단 기준은 ‘결합’에 달려있다. 어떤 결합?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무장봉기의 결합, 이것이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의 핵심 기준이다. 체제에 대한 비판도 좋다. 사상의 자유? 인정한다.

한편 이러한 판단기준에 의하면 무장봉기 내지 폭력혁명 등을 통한 정부의 전복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단순히 ‘자본주의 철폐’, ‘노동자정부 수립’, ‘사회주의 혁명정당’, ‘생산수단의 몰수 국유화’, ‘정치총파업’ 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하는 것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 판결문 244쪽 13

심지어, 폭력도 괜찮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 제시된 ‘노동자 정당방위대, 파업사수대, 선봉대’의 구성은 그 목적이 현 정부의 전복 및 새로운 정부 수립에 있지 아니하며, 경찰이 폭력적으로 합법적 집회를 해산하려고 할 경우에 이에 대한 방어수단으로 제시된 수동적인 것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 박준선 명의의 위 글이 국가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물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아니한다.

- 판결문 289쪽

그러나 비판하면서 폭력을 선전선동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비판과 폭력의 결합이 유죄다. 따라서 이번 유죄 판결에 대한 가장 일관된 반대는, 이 결합을 옹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사상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혁명을 할 자유는 옹호될 수 없는가? 도대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어떻게 작동하기에, 투쟁하는 노동자는 스스로의 조직된 무장을 준비해야 하는가?

법원에서 밝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다음과 같다. :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제도와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 질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기본적 인권을 존중해왔다는 매우 의심스러운 선언을 제외하면, 법원의 주장에 속이고 감추고 할 무언가는 없다. 핵심이 이미 다 나왔다. 권력분립,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의회제도와 사유재산제도. 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작동하면, 만족스런 결과를 내기에 충분하다. 누구에게, 어떤 만족스런 결과인가?

가장 최근의 계급투쟁,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을 제공한다. 대법원도 인정했다.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 그런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 이행을 위해서조차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투쟁에 대한 정몽구의 답변은 무엇이었나?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아.”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어린 학생들로 인력을 충원한다. 여기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첫 번째 핵심 요소가 등장한다. 사유재산제도. 공장은 자본가의 것이다! 자본가의 허락이 없다면, 공장에서 일할 수 없다. 그리고 일거리가 없는 노동자는 먹고 살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의 권력이다.

점거파업은 이와 같은 자본가 권력에 균열을 내는 가장 직접적인 투쟁이었다. 공장은 노동자들에 의해 굴러가며, 자본가야말로 전체 생산과정에서 필요 없는 잉여 인간이다. 공장에 대한 자본가의 통제가 일시적으로 무너진다. 그러니, 점거파업을 박살내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용역깡패와 관리자들을 동원한 폭력으로 찍어 눌러라! 막대한 사설 무장조직은 자본가가 공장에 대한 자신의 사적 소유를 유지하기 위해 집어들 수 있는 손쉬운 무기 중 하나다. 공장에 대한 통제를 되찾고, 법의 집행을 유예시켜라! 유예의 궁극적 목표는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 지배를 동의된 지배로 탈바꿈시키는 것에 있다. 불법파견이 문제라면, 파견을 합법으로 만들자!

이제,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의 나머지 ‘아름다운’ 요소들이 등장할 차례다. 권력분립,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의회제도 기타 등등. 이른바, 민주주의. 기회는 저기 국회에 존재한다. 먼저, ‘협박’을 한다. 파견 금지는 자본 축적의 악화로 이어져, 고용을 축소시킬 것이다! 그 다음, 소위 말하는 민주적 절차, 표결을 거친다. 법이 자본 쪽으로 기우는가?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지지할 만한 것이다. 요컨대 의회제도는, 입법에 있어서 자본의 협박을 반영하기 위한 절차로 활용된다. 여당과 야당, 서로 견제하기 위해 분립된 모든 권력들이 이러한 자본의 권력과 협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르고 달래면서 약간의 양보를 구걸하던가, 아예 자본의 편에 서던가.

이로부터, 핵심적 과제가 도출된다. 자본의 권력을 해체하라! 즉, 막대한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인 통제를 보장하는 사유재산제를 철폐하고, 이를 노동계급 전체의 민주적 통제로 전환하라! 비정규직을 끝장내는 투쟁은 자본의 권력에 맞서서, 궁극적으로는 이 권력을 해체할 노동계급 자신의 권력을 세워내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는, 용역깡패와 경찰의 물리력에 대항한 일상적 투쟁이 날마다 재확인시켜주는 바와 같이, 노동계급 스스로의 물리적 강제력을 확보하는 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결국, 이번 사회주의자 유죄 판결의 의미는 무엇인가? 핵심은 자본에 맞설 노동자 계급권력의 싹을 자르는 데 있다. 이런 저런 자유는 실질적인 알맹이가 없는 한에서 인정된다. 공장에 대한 통제? 괜찮다. 다만 그것이 공장점거파업 같은 현실화된 투쟁의 형태로 제기되지 않는 한. 사상의 자유는 그 사상의 현실화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포기하는 한에서 보장된다. 용역깡패를 동원한 자본가의 폭력? 괜찮다. 그것은 사적소유라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폭력이었다. 대항 폭력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표현인 한에서 옹호될 수 있다. 반면, 노동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자유, 자본과의 지리한 모든 투쟁들을 끝장낼 궁극적인 투쟁을 할 자유는 박탈된다. 혁명을 할 자유를 금지하라. 자본의 권력만은 온전히 보존하라. 투쟁이 이런 저런 양보를 끌어낼 수는 있게 되더라도, 자본의 권력만은 해체할 수 없게 하라. 사회주의자들이 유죄 선고를 받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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