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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적인 세계, 핵폐기는 가능한가? [사회주의자 통신 2호]

비이성적인 세계, 핵폐기는 가능한가?

- 히로시마에서 후쿠시마까지

 

ICT / 번역 : 사노위 서울지역위원회 정책선전국장 김병효

 

** 이 글은 일본 핵발전소 사태와 관련한 3월 17일 ICT의 기사의 번역 글입니다. ICT(국제공산주의 경향)는 1983년 IBRP(혁명당 국제서기국)로 결성되었다가, 2009년 ICT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 6개국(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미국, 캐나다)에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1-03-17/from-hiroshima-to-fukushima

 


 

 

Meltdown(노심용융)

 

 

지난 3월 11일 사상 최악인 8.9리히터 규모의 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을 강타했다. 수만 명이 죽었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은 할 말조차 잃고 말았다. 하지만 채 여진이 닥치기도 전에 다른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지진과 쓰나미는 이후에 닥쳐올 재앙에 비하면 한낱 전조에 불과했다. 지진 발생 사흘 후 후쿠시마 다이치현의 핵발전소와 또 다른 핵발전소에서 발생한 두 차례 폭발로 행융합로 노심용융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일본에서의 핵에너지 자체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계에서 가장 지진 위험이 높은 국가 중 하나인 일본이 도대체 어떻게 53개나 되는 핵발전소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핵에너지 대국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 3월 14일자 파이낸셜 타임즈의 데이빗 필링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자원 부족 국가로서 일본은 위험한 세계에서 병적으로 집착해왔다. 그리고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는 단일 사고만으로도 엄청난 방사능 유출과 함께, 이후 전세계에 걸쳐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의 암발병 증가를 초래했다. 그런데 현재 후쿠시마에서는 6개나 되는 원자로 노심이 녹아내릴 위험에 처해 있으며, 다른 2개의 대형 핵발전소 역시 지진대에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력회사와 정부는 방사능 유출에 대해서 제대로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위험은 이전에도 있었다. 필링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한 차례 예행연습도 겪은 바 있다. 2007년 7월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였던 6.8리히터 지진이 일본 북부 니이가타 근처의 초대형 핵발전소인 카시와자키-카리와 핵발전소를 강타했다. 이 지진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큰 발전소 중 하나인 카시와자키-카리와 발전소조차 애초 설계부터 6.8리히터 가량의 지진에 견딜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반응로 중 하나에 가해진 충격은 설계 당시 내진 강도보다 2.5배나 강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필링은 일본 정부가 자국민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 전혀 ‘비이성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86년에 체르노빌에 관한 기사에 ICT가 “원자력 러시안 룰렛”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정말 위험한 도박이 지금 일본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의 명령

 

일본은 최근까지 석탄에 있어서만큼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하지만 석탄을 제외한 나머지 자연 자원 부족은 항상 일본의 걱정거리였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으로 하여금 1895년 중국과, 1905년 러시아와 전쟁을 불사하게 했고, 1911년 조선 합병과 1931년 만주 침공까지 감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물론 더욱 극적인 예로는 바로 2차 세계대전을 들 수 있다. 일본의 1937년 중국 본토를 침공에 대해, 미국은 즉각 일본으로의 석유 공급 차단으로 대응했다. 일본은 이후 4년 동안 자구책을 마련하려 애썼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궁극의 도박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한 방에 날려버리고 인도네시아와 태평양 연안 제도를 점령하고, 이를 통해 석유와 다른 원자재를 손에 넣으려는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이다. 일본이 자원 확보를 위해 아시아 무대에서 영국과 독일 제국주의를 패퇴키는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공개된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이것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의 배경이다. 하지만 일본의 도박은 공습 6달도 채 안된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모든 일본 항모가 침몰하면서 패배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 문제를 마무리 짓기에 앞서 유럽전선에서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유럽전선에서 분열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시 동맹의 균열이었다. 당시 미국은 소비에트의 적군이 유럽 전선에서 서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동부 전선에서 대해서도 소비에트 연방이 개입하면서, 만주와 조선, 그리고 중국이 스탈린의 손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결국 미국인 기자 리차드 로데스가 ‘원폭 제조’에서 밝힌 바와 같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단순히 미국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탈린의 동부 전선으로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스탈린이 45년 8월 9일로 동부전선에 개입하기로 예정되어있었고, 소비에트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그 직전인 8월 6일 히로시마, 8월 8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으로 일본인들은 더 이상 원자력을 아예 사고의 지평 저 너머로 내던져버렸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1951년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로 일본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아래 핵개발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히로시마 피폭으로 인한 백혈병 희생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일본은 핵발전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면서 일본은 더 많은 에너지원을 필요로 했고, 전후 세계에서 핵심적인 에너지원은 바로 석유였다. 자본주의 경기 순환에 있어 하락국면을 맞이했던 1971년 당시 일본은 자국 에너지 수요의 85%를 수입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미국에서 경기하락은 달러화에 대한 금태환을 포기하면서 달러가치 폭락으로 드러났다. 달러가치의 하락은 산유국의 실질 수입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유가는 급등했다. 에너지 안보가 전세계적인 슬로건이 되었고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라는 형태로 여전히 진행중이다. 특히 국내 산업생산 증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할 자원이 부족했던 일본으로서는 에너지 문제에 있어서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동보다 훨씬 안정적인 남아공의 폐금광을 석유 비축 시설로 임대해서 사용하기 위해 남몰래 남아공의 인종분리 정책을 지원하는 것까지 불사했던 일본이 핵에너지를 고려한 것은 전혀 비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이성적인 세계?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표현으로서 ‘이성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적’이라는 말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국민국가로 구성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 세계는 앞서 파이낸설 타임즈가 ‘위험한’ 세계라고 언급한 바로 그 세계다. 세계가 위험한 이유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국민국가들 간에 자원을 위한 은폐된 경쟁 혹은 공공연한 전쟁 형태로 대결하는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지진 위험이 높은 나라에 핵발전소를 세우는 것이 ‘위험한’ 세계에서는 이성적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의도적으로 핵에너지 자체에 대한 논란은 다루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하에서는 어떠한 이성적인 토론도 불가능하며, 이윤 동기나 일국적 관점 하에서는 논점이 항상 왜곡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핵에 대한 광기가 바로 그 증거다. 제국주의자들은 이번 사고를 통해 인간의 미래의 필요와 양립할 수 없는 전쟁과 비이성적인 정책들로 가득찬 제죽주의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정말 “이성적인 세계”에서는 국민국가라고 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제국주의적 경쟁, 사람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태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파괴적인 전쟁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적인 세계는 오직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모든 비이성적인 요소를 만들어낸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를 철폐함으로써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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