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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노선과 역량: 서론」 『총명한 유물론』 제3집 여름호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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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량의 본질 || 역량은 어떻게 하여 자기 자신을 불리는가? 또 역량은 어떻게 쇠퇴하는가?
자연에서 인간 역량은 외적 자연의 제 작용을 자기의 목적에 봉사하게끔 전화하는 만큼 증가한다. 본래의 자연인 제1자연은 인간 노동을 거쳐 제2자연─사회적 존재로 지양된다. 비록 외양상 순전히 화학적 특성에 있어, 천연 냇가에서 흐르는 강물과 대규모 하천 공사를 통해 만들어진 냇가의 강물 사이에 하등의 차이성조차 있지 않을지라도 둘은 엄연히 다르다. 천연 냇가의 운동 과정은 그것이 천연 냇가로 남아있는 한 자연의 내적 목적에 봉사한다. 하지만 대규모 하천 공사의 소산으로서 냇가는 인간 욕구의 필요에 따라 자연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운동 방식으로 변형된 것─자신의 내적 목적에서 유래하는 힘을 인간에게 양도한 특수한 자연이다. 제1자연을 인간 욕구와 노동의 변증법에 의거하여 제2자연으로 변형하는 개조 작업은 인간 역량 증대의 과정이다.
하지만 제2자연이 인간 욕구와 노동의 산물일지라도, 그것의 인간 욕구 충족은 그것이 오직 자기의 자연사적 과정, 즉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외적인 자연력의 전체일 때에만 그렇다. 인간은 욕구와 노동의 변증법으로 본래의 자연의 자기 발현으로서 자연사적 과정에 의거하여 그것의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이는 자연의 고유한 것의 한 종(種)이지 ‘새로운’ 자연사적 과정의 ‘창조’는 아니다. 예를 들어 대규모 하천 공사와 그 소산으로서 인공 냇가의 운동은 모두 본래의 자연의 천부적인 속성에서 그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노동은 자연사적 과정의 모든 가능한 조합 양식을 만들어 낼 수 있어도, 그 조합의 천부적 속성을 만들어낼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는 자연사적 과정의 특수한 경우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것이 자연에의 통제의 빈틈 속에서 사회적 존재가 그 창조자인 인간에 대해 낯선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이유이다. 자립한 이 사회적 물리력은 개개인이 다시 처리해야 할 날 것의 힘으로 개개인과 마주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에 의한 그 경제적 산물에 의해 그 자신이 지배당한다.
그 창조물에 침잠한, 또 그 창조물로 생생하게 현현하는 자연사적 과정이 창조자에게 구석구석까지 고려되지 않는 한 이 인간 노동의 창조물은 그 창조자의 ‘계명’을 위반하는 피조물이 된다. 이 피조물은 바로 생산력이고, 생산력을 구성하는 제 요소─생산물이며, 또 생산력의 형성 속에서 규정되고, 또 되어야만 하는 그것의 인간적 교류 형태들, 관계들, 또 이 경제적 하부구조에서 자라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다. 이 피조물의 창조자인 인간 노동은 이제 이 피조물의 피조물이다. 어제는 노동의 산물이었던 것, 생산을 위해 기꺼이 승인했던 관습들이, 오늘은 하나의 강제력으로 되어 우리의 육체를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변형하는 노동의 조직자이다. 역량의 증대란 이 규정-피규정 작용을 인간의 욕구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실로, 현존하는 인간의 역량이 현재의 정도에 머물러 있고, 이 상태에서 개개인의 규정자인 제2자연의 위치를 개개인의 피규정자로서, 개개인에게 가일층 봉사하는 데로 놓게 하려면, 개개인이 제2자연의 구체 분석을 통해 제2자연에의 인류의 통제를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성으로 전변시켜야 한다. 하나의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 인간과 제2자연의 규정-피규정 작용의 재조직은 현존하는 경제 조직의 비약적 변화를, 즉 현존하는 경제적 사회구성의 혁명적 교체를 요구한다. 물론 시스템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더라도 개개인은 현행 시스템에서 몇 피규정의 문제─사회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 불과 한두 세기 전, 문명의 중심지에 속한 대다수 인구는 근대성의 성과 속에서도 극심한 생태학적 오염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진 과학기술 혁명 속에서 이 오염 수준은 크게 감소하였다. 오염은 제2자연의 산물이었으나, 인류는 사회적 총체성·시스템, 즉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혁명적 교체 없이도 이 제2자연의 산물의 작용 조합을 인간의 욕구에 더 합치하는 방식으로 조정하였다. 이 과정은 생산력의 증대로 일어났다. 그러나, 끊임없이 추동되는 과잉생산, 낭비, 그 속에서 점증하는 비효율로 인한 생태에의 광범위하고 점진적인 파괴, 고정된 생산관계의 생산력 증대의 억압은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혁명적 교체를 수반하지 않고는 풀 수 없는 과제를 쌓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혁명적으로 교체시키는 과제는 현행 시스템 하에서 고질병인 어떠한 규정-피규정 작용들을 위치 변화하는 데서 종국적 열쇠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 사이의 경제적 생활의 총체인 점에서 그것의 위치 변화는 또한 인간 사이의 경제적 생활의 전도이다.
제2자연은 그것을 산출한 생산관계의 총체이며, 따라서 그 재조직은 그 생산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규정당해 온 인간 사이의 현실적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자연사적 과정의 특수한 규정이지만, 그 과정 안에서 인간은 단일하게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과 맺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어 실존한다. 이 분열이 계급이며, 역량 증대의 물음은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의 물음이 된다. 재조직의 주체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현존하는 생산관계에서 자신의 규정성을 반성하고 그것에서 의지를 충용하는 구체적인 인간들, 즉 계급들의 조직된 힘이다.
§ 2 사회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정치적 의지의 발생 || 적대적 계급으로 분열된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투쟁에서 억압받는 자의 계급적 힘은 어디서부터 유래하고, 또 증대하였나? 다시 말해, 지난한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세상을 개선하고자 하는 보편 의지는 어떠한 구체적 현실에서 그 자신의 발생점을 둘 수 있었으며, 그것은 어떻게 순전히 한 국면에 고착된 불씨에 자신의 활동성을─주로 이익의 옹호·관철을 위한 행위 일반─한정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새 물결을 트는 물질적 힘이 되었는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저술들, 독일 혁명에 대한 엥겔스의 저술들은 개별 계급을 대표하는 당파, 그 당파의 여러 현실적 표현이 그저 그런 우연적인 사건과 자질구레한 것의 집합의 소산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생산관계에서 생산수단에의 그 내용적 소유권(이는 단지 실정법적 소유권이 아니다!)의 실존, 전취, 그 전취의 양식, 심지어 그것의 옹호와 종국적 폐지를 둘러싼 운동에서 유래하는 동일한 정치적 이해를 통해, 부득이한 차이 속에서도 한 두레에 모인 집단─계급은 저마다 생산관계에서 벌어지는 소유의 문제에서 소산하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해 움직인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해 움직인다”란 무엇인가?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옹호함은 그것을 그 자체로, 순전히 자기만의 관념 속에 유폐하는 게 아닌, 말, 글 그리고 다양한 실천 방식을 통해 하나의 외적인 것으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보여주는 것”이란 항상 그것을 “보는 것”, 즉 자신의 관념과는 다른 관념을 소유했을 자신의 타자를 전제한다. 하지만 이때 주체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그에의 타자의 관념은 그 자체 보존력을 지닌다. 관념은 외적 현실의 산물이라, 외적 현실의 변화 속에서 강화하고 또 소멸하므로, 이 보존력은 오로지 외적 현실의 작용력 속에서만 자신을 폐지한다. 하지만 이 관념의 힘에 대응하는 현실적 힘이, 그 힘을 변화할 수 있는 때는 오직 그 관념의 힘의 계기로서 현실적 힘을 그 역량에서 압도하는 때에 한한다. 이 현실적 힘의 역량은 1. 벌써 실재하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 옹호의 대중성을 표지하는 일련의 수치로; 2. 타자 관념이 받아들이는 말과 글의 학문적 수준으로; 3. 다양한 실천 양식의 강도로 측정될 수 있고, 평가될 수 있다.
이 경과에서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옹호함은 즉자적으로는 주관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의 참된 것, 대자존재로서는 그 자체 하나의 객관적인 것으로 실존해야 하는 것으로 판별된다. 만약 그것이 주관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면, 혼잣말을 되뇌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해관계의 투쟁은 매개적이며, 매개적인 한 정치적이다. 하나의 이해관계는 다른 하나의 이해관계와 대립하는데, 이 대립이 지속되는 한 이익의 관철은 폭력으로 전화한다. 우리에게 놓인 역사적 과제란 저마다의 차이성 일반으로서 개개 “인간의 사적 이익을 인간적 이익과 일치하도록 하는 것”1이다. 즉자적인 것으로서 민중 이익─개개 인간의 사적 이익은, 이 특수성과 인간적 이익의 보편성의 통일물인 대자적인 것으로 변전한다.
우리가 민중의 정치화에서 제기되는 직접성과 매개성의 상호 침투를 고려하지 않는 조건 위에 있다면, 이 일치, 이 통일의 상은 자연력으로서 환경의 작용 메커니즘을 재구조화하여 인간에 의한 인간 적대의 기초로서 경제 법칙, 즉 배타적 소유의 폐지라는 상이다. 배타적 소유의 폐지는 현존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혁명적 교체를 요구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경제 법칙을 인간에게 외따로인 그 법칙 자체 또는 인간에 대해 외적으로 자립하는 그 사회적 물리력 자체에 복무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복무하게 하도록 지양하는 것이다. 생활 영위의 전 분야에서 개개 민중 자신의 참된 개별성을 구현해 나가는 과정은 “환경이 인간을 형성”하도록 내비두는 게 아닌, 개개인 자체가 “환경 또한 인간적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인간이 본디 사회적 존재라면, 그는 오직 사회 속에서만 진정한 본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그의 본성의 힘은 개인의 힘이 아니라 사회의 힘으로 측정되어야 한다.”2 이것에서 “이것저것을 피하는 소극적인 힘(negative Kraft)에 의한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참된 개별성을 관철하는 능동적인 권능(positive Macht)에 의한 자유”2가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이 참된 개별성의 관철이 자주적인 것이다.
자기 자신의 특수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쟁취하는 데서 사회구성체의 혁명적 교체가 전제된다. 하지만 그 변화가 오로지 역량의 소산이라 할 때 역량은, 그 변화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의 관념적인 것으로서, 무엇보다 직접적인 것으로서 완성된 상태로 자신을 증대할 것인가? 노동계급의 이익은 사적 소유의 폐지이다. 사적 소유의 폐지는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또 부르주아 국가의 공민권 내에서의 법률적 폐지로서가 아니라 그 폐지를 받치는 정치력·물리력들,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강제력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현시대 부르주아 법률로서 보장되는 소유권은 생산관계에서 내용적 소유권의 외피이며, 이의 피조물이지만, 내용적 소유권은 오직 이 법률적 소유권을 매개함으로써만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이 강제력은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사회구성체가 그와 다른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한에서만 작동하며, 변화한 시스템은 사적 소유의 폐지에 수반하는 것들을 자기의 발생 및 발전 과정에 놓는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적 소유권은 오로지 법률적 소유로써 외부의 방해 없이, 온전히 실현되나, 법률적 소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법률의 외부에서 헌법을 규정하는 관념적인 최고 원리와 동의를 요한다. 또한 헌법의 실존은 그 자체로 자연히 그에 조응하는 기관, 이 기관의 설립을 보조하는 모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상태를 요하며, 명시된 소유권은 법률이 개입된 모든 분야에 대해서 어떠한 규정된 규범을 가지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요소로 실재해야 한다. 한편 사적 소유를 보장하는 부르주아 헌법의 외부에서 바로 그 헌법을 보존하게 하는 동의는 각 개인의 생활 방식을 규율하는 여러 낯선 힘의 ‘영역’을 요한다. 부르주아 국가에서 노동계급이 그 이해관계의 대자적 표현에 있어 사적 소유의 폐지(소유 일반이 아닌, 배타적·독점적 소유의 폐지)를 부르짖는다면, 그리고 그 사적 소유의 폐지의 부르짖음이 그 폐지가 실현된, 역사적으로 도래할 미래의 상을 요구한다면, 그 상에서 이야기되는 ‘상태’는 자연히 사적 소유에 기댄 모든 경제 행위의 종식을 함유할 것이다. 예를 들어, 종국적으로 사적 소유의 폐지는 타인의 착취에 기생하는, 또 그것의 필수 계기인 모든 배타적 소유의 폐지이면서, 한편으로 타인의 착취가 아니라 자기 노동에 기초하는 생산의 수단들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이며, 지적 재산권의 폐지이다. 즉, 이는 자기가 소유한 일체 배타적 소유에 대한 폐지이다. 그리고 이 소유들에 종속된 모든 경제 행위의 폐지이다.
이 상태의 관념적 제출, 그러나 매개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것으로서의 제출은 부득이하게 배타적 소유로써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자의 의심과 적대를 유발한다. 이때 의심과 적대는, 설사 또다른 직접적인 것으로서─그들의 소유가 폐지되었을 때 그들의 생활 수단이 마련될 수 있음을 관념의 상으로 제출했을 때에도 야기되고, 또 유지된다. 하지만 이는 단지 자신의 소유가 실현된 상태하에 있는 개개인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소유에서 명확히 탈락해 있으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는 중간적인 집단, 또는 엄연히 가능성이 없음에도, 그 가능성을 지향하는 개인에게 있어서도 이는 야기되고 또 유지된다. 이 관계 속에서 밀고 당기며, 치고 빠지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의지의 현실적인 역사이다.
§ 3 역량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정치적 본질 || 다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의 옹호의 관점으로 돌아가자.
특수한 이해관계의 옹호는 오로지 이해관계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때에만 설 수 있고, 이는 권력의 쟁취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개별 계급의 복잡다단한 정치적 의지의 장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란 어떠한 한 계급이 아닌, 이 계급의 구성원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대표하는 것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순전히 교조주의의 관점에서 한 계급의 구성원과 당파성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구분되지 않은 채 추상적으로 동일시되어 왔다. 다시 말해, 종종 계급·계층적 당파의 이익과 이 집단의 구성원이 지니는 관심에는 절대적으로 등호가 붙여져 왔다.
한 계급의 당파성은 명확히 계급의 개개 구성원의 참된 이익을 대표한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그 계급 개개인의 이익은 또다시 특수화되어, 일반적으로 그것은 참된 당파적 이익과는 벌어져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거의 모든 계급투쟁의 역사, 현시대 정치투쟁의 역사에서 빈번히 착취계급 당파의 실질─그들의 당, 그들의 정치 그룹의 구성원, 그리고 이 집단이 지지자들은 그 반대에 존재해야 할 계급의 구성원으로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혁명적 당파는 종종 우리가 기대한 것만큼은 아닌 것으로, 즉 그 혁명적 당파가 전제하는 대표적인 계급의 인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계급 구성을 보이기도 한다.
소유가 폐지되지 않은 사회구성체 하 최종적인 수준에서 제시할, 그리고 또 제시될 사회상태─사적 소유를 폐지한 사회경제 공동체에서 현시대의 피착취·피억압계급이 해방된 상태를, 현존하는 계급 역관계에서 바로 그 피착취·피억압계급이 기대하고 있을 것으로 전제하는 것은 올바른 분석이 아니다. 우리가 정치투쟁에서 그 계급에 속한 구성원 하나하나를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실제로 바로 그 계급에 속한 구성원은 우리가 현존하는 사회상태에서 최종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사회상태의 그 사이에 수다한 종류의 이익을 놓는다. 그래서 한편으로, 한 당파의 이익을 실현하는 과정이 항상 질적으로 상이한 주·객관적 조건으로 세분화되어 있고, 각각의 세분화된 질점마다 어떠한 한 계급의 구성원의 이익이 그가 속한 계급과는 다른 계급에 속한 구성원의 이익과 너무나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어서, 우리가 야심차게 전제하였던 ‘당파적 이익’과는 더더욱 먼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표현된다.
교조주의자는 이 현상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교조주의자는 이 당혹감을 추상 공식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으로 무마하려 한다.
소유 폐지로 전진하는 해방 역량의 증대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정치적 본질은 피착취·피억압계급에─단지 배타적·독점적 소유로부터 탈락한 개인이 아니라, 소유가 우상으로 되어 있는 생산관계에서 억압받는 모든 자─속한 구성원의 이익을 그들의 참된 이익과 일치시키는 모든 정치투쟁의 전략·전술의 지침이라는 데 있다.
소유가 철폐된 최종적인 사회상태 또는 그로 향하는 과도기의─노동계급의 국가─사회상태를 청사진으로 제시하는 것은 필요한 작업이며 이 작업은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야이다. 하지만 특히 오늘날에는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가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통합·조정하여 그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로 단결하게 하는 철의 끈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즉, 이것만으로는 현시대의 모든 정치투쟁의 전략·전술의 지침을 제공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정치적 본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현존하는 사회구성체가 사적 소유의 폐지가 완성된 공동체로 지양되기까지의 모든 경과에서 사적 소유의 페지라는 최종 목표에 상응해 제기되어야 할 문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의 피안(Jenseits der Wahrheit)을 거둔 뒤 차안의 진리(Wahrheit des Diesseits)를 세움은 역사적 과제”이나, 이 과제, 다시 말해 “신성하지 않은 세속적 형태들 속에 들어있는 자기소외를 폭로함”4은 다양한 층차 구조를 띤다. 각각의 주객 상호작용의 수준에 따른 상태는 사회주의 운동가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사회경제적 시스템과 그것의 개선, 다시 말해 동일한 사회구성체이지만 상이한 두 시기가 요구하는 과업과 정치력, 또 그 개선이 사적 소유의 폐지로의 과도기를 예비하는 특질을 띠기까지 하는 모든 기간을 아우른다. 이 기간에 만들어져야 할 주체 역량, 강령상의 요구와 그 요구에 입각한 시책에 요구되는 지성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본질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작은 사업장을 가지고 있는 소유자의 이익과 이 사업체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며 생활을 영위하는 무소유자의 이익 중 주체 역량은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교조적인 ‘상식적인 보편성’의 견지에서 놓고 보자고 하면서 모든 국면에서 후자라 한다면, 우리는 모든 소사업자를 우리가 만들어 나갈 ‘완성된’ 당파에서 엄격히 배제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배제한다 하여도 전국의 모든 소사업장에서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 구성원이 그러한 배제를 이유로 그 배제의 주체를 쉬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실정은 계급적으로 직접 대립하는 처지에 놓인 프롤레타리아조차, 우리가 그 직접 대립에서 그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대변한다 하여도, 그 프롤레타리아는 그것으로써는 아직 자신의 이익이 충분히 대변되었다고 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 프롤레타리아의 관념 속 이익은 훨씬 더 매개적이고 촘촘한 내용 규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에 소유 폐지의 이른바 ‘완성된 상’을─통상 교조주의자들이 추상적으로 반복하는 그 ‘사회상태’의 ‘이상’─직접 그에게 때려 박는다 해도, 그 ‘완성된 상’은 벌써 경험적으로 온갖 예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단순 비약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한, ‘완성된 상’은 곧바로 그 ‘완성된 상’을 현실화하는 필수 계기, 필연적이고도 경험적인 길로 초점이 옮겨간다.
이 경험적인 길을 탐색함은 운동의 주력군 또는 예비군으로 되는 인원·집단의 개별적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운동에 동일하게 복무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보건노동 분야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전문적인 소양을 지녀야만 취급할 수 있는 보건노동 분야의 복잡한 문제는 의료서비스의 주요 이용자, 환자의 가족과 관련해서 대두되는 문제들과 함께 취급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에서 ‘해결책’은 다른 한쪽에서 ‘문젯거리’로 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건의료·시민·환자 집단은 공공의료의 확충을 각자의 개별성을 지양하는 보편성을 두려 한다. 하지만 이제 공공의료 확충은 정부 재원, 관계 노동분야 내부의 모순, 대중의 자연발생적 반발심에 부딪힌다. 따라서 공공의료 확충은 새 국면을 맞이하여 한 나라 산업과 인력, 재정의 전체적인 연관 속에서 더 구체화된 청사진을 내함한 보편성으로 상승해야 한다.
농업에서의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농축산업의 후진성은 식량가의 불안정성을 유발·심화한다. 한국에서 농축산업의 후진성은 외래 농축산물의 국제적 판매처로 기능하는 것과 강하게 연계되어 있고, 이는 농촌에서 축적을 막아 저생산적인 소농 경제를 고착한다.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수급제의 다양한 형식을 실시하며, 의회기구는 각종 개정안을 심사한다. 또한 특정 산물은 수입을 제한한다. 하지만 당장에 이는 또다른 이해관계 당사자로서 농축산물 소비자에게 식량가를 개선하기는커녕 재정 낭비처럼 보인다. 심지어 일시적으로는 수입화 정책이 식량가를 낮추는 효과에 기인하여, 종종 소비자들은 수입화 전략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직접적으로는 농민과 소비자는 현상적으로 적대적 모순(따라서 비적대적인)을 이루는데, 어느 한쪽이 순전히 재정상의 지원을 통한 연명에 머무르고 있다면, 어느 한쪽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더 큰 고통을 자처하고 있다. 이 주체적 요소 또한 한 나라의 산업과 인력, 재정의 연관 속에서 농업 진흥의 청사진이 제공될 때라야 비로소 운동에서 단일한 지지 세력으로 상승한다.
한 나라의 산업과 인력, 재정의 연관을 구명하는 것은 부득불 한 나라의 사회구성체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한다. 이러한 종합적 이해는 협소한 한 분야에서 전문적 소양을 지녔다고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닌데, 통상 부분에 천착하는 경우에는 그의 타자에 천착하는 과정과는 적대를 띠어 무분별한 이해관계 충돌이 야기된다. 이해관계에 있어 각각의 특수자는 저마다의 경험을 ‘이론적’ 외피를 입은 견해로 주조함으로써 적대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데 이 경우에 이 특수자들은 부분적 이해의 수렁에 빠져 최소한의 (그것이 옳든 그르든) 당적 개입조차 거부하는 형태로까지 발전한다.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 사회주의에 대한 추상적·낙관적 구상보다는 현실 자본주의의 막장갱도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씨앗이 자랄 수 있는 그 실재적 가능성에의 이론적이며 실천적·경험적인 증명에 있다. 명징히 하자면, 그것은 사회주의 경제의 현실화가 아니라 현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현실화가 가능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이 증명 방식에서 특히 실천적인 것, 즉 순수 이론적 차원만이 아닌 경험적인 것이 민중 역량이 당면한 가장 앞선 경제 혁명─민족민주혁명의 예비로서 최소 강령의 대규모 개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대규모 개선과, 그 개선의 객관성은 이론적인 것으로 담보되어야 한다. 대규모 개선에 입각한 사회의 개선은 혁명의 예행연습이며, 경제 혁명에서 모든 가능한 부정적인 경로에의 백신을 놓는 것이다. 이는 현 체제 하에서 최소 강령적 요구의 구체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실행되어야 함이 강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그 한정성을 명확히 하는 일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이 개선은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법칙이 점지하는 제약을 넘을 수 없다. 이 예행연습은 어디까지나 점진적인 개선인데, 그럼으로써 주체적으로는 민중 역량의 정권 운영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는 데 그 집중점이 있다. 이 집중점에는 이 예행연습에서 경제 운용의 노하우와 성과를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에 아무런 문제 없이 잇는 것까지 포괄한다. 또다른 주관적인 요소는, 이것이 아직은 전폭적으로 민중의 당파를 지지하지 않지만, 점진적 개선을 용인할 대중의 뇌리에 사회주의 이행의 당위를 부여하고, 그들을 더 굳건한 지지자로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는 차원에 있다. 현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개선책의 가장 협소한 부위만을 이루고, 그것이 양적으로 축적되었을 때, 자본주의 생산과 시장, 경쟁의 무정부성을 온존한 채로도 의회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내에서 작디작은 개정책을 두고 만족하는 데 습관이 되어있는데, 이것들은 당연히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에서 예행연습으로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더러, 그에 동반하는 반동에의 효과적인 방어책을 마련하지 못 하는 탓에 대중의 지속적인 신뢰를 이끌어 낼 수도 없다.
사회주의에 대한 더 높은 기대는 항상 보다 낮은 기대 속에서 출몰할 수밖에 없으며, 두 기대치의 매개는 민중 역량이 얼마나 대중에게 신뢰감을 주는 당파인가를 증명해 내는 일에 있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도태되며, 증명하면 승리한다. 또한 사회주의자의 강단성은 바로 이 지지에 상응하는 만큼 전진한다. 주체적인 개선책이 성공하면 현존하는 역량은 그로부터 획득한 대중적 지지만큼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자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심지어 대중에게 요구할 수도 있다.
민중 역량은 (비록 부르주아 경제에 속하나) 민족경제의 분야 별 관리·운영 노하우를 숙지하고, 그 속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도적 입지점을 찾아야 한다. 특히 법률 분야에서 재정 및 그 운용과 관련된 법률, 세법(稅法)이 그러한데,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이 부르주아적 요소 또는 (사회주의 하에서 취급될) 이 잔재는 경제의 사회주의적 관리와 지도를 지탱하는 권력 작용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사회주의 하에서도 전면적이라기보단 점진적으로 전변하는 요소이므로, 강한 유사성을 띨 것이다. 순전히 개선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 법률적 권력 작용은 이 목표를 성취할 가장 주요한 자원이다. 이것 외에도 민중 역량은 부르주아 국가의 금융 통제, 통화정책, 인플레이션 관리, 환율, 정부 출자에 수반하는 개인 권리의 문제와 관련된 모든 법적 경로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들이 없이는 예행연습이라 할 수 없으며, 예행연습이 없다면 사회주의 조직화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바로 이 예행연습이 민족경제 건설이다. 현대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현실성으로 고양함에 있어 민족경제 건설은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과업이다.
이를 해명하고 시책으로서 실행에 옮기는 과업은 경제 혁명의 객관적 조건, 주체 역량 그리고 대중의 현 상태의 삼각관계 속에서 상위 목표로 향하는 과정적인 것으로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청년들은 실업을 포함한 여러 가지 만성적 빈곤의 상태에 놓여 있음에도, 자본주의 철폐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다. 청년은 실업을 해소하는 데서 자본주의 철폐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당위로,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청년은 이 당위를 제시하는 자로서 주체의 능력, 특질과 이들의 “자본주의 철폐”로부터 기대되는 긍정적인 것을 연계하기도 한다: 무능한 자는 자신이 행한 약속도 지킬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긍정적인 것의 실재성과 실재적 가능성을, 당위를 제시하는 쪽의 복합적 특질과─인격, 시책의 운영 능력, 기타 관습적으로 평가 가치가 있는 능력들─엮는다.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의 주체는, 경과에서 기대되는 긍정적인 것이 실제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 객관적일 수 있음을, 점진적으로라도, 예비적으로라도 그게 실존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 경우 ‘객관적인 것’은 한국 자본주의 작동 메커니즘에의 분석 속에서 증류해 낸 그 메커니즘의 개선과 그 개선의 한계에 관한 것과 이에 입각한 경험적인 것이다. 이 이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은 그 작동 메커니즘이 단지 온전히 작동하고 있음, 다시 말해 그 작동 메커니즘이 안정적 현상 유지의 일반적 운동 법칙만을 포괄하는 게 아니라, 그 작동 메커니즘의 사멸 계기인 주체적 요소와 이 요소에 의해 창출되는 새로운 객관적 조건의 운동 경향까지 포괄한다.
따라서 싸움은 현존하는 사회상태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그 길목을 주제로 하는, 점차적으로 고도화한 매개적인 것으로서의 상을 요한다. 그리고 이 상이 과학적 사회주의이다. 이 상을 구상하고 점진적인 개선부터 혁명적 비약까지 목표를 수미일관하게 관철하는 능력─이것이 지구력이다. 지구력이 없다면 하나의 목표는 또다른 자연적인 목표들, 설정되어 있지 않은 타자 목표들에 의해 침해당해 자신의 실존 권능을 박탈당할 것이다.
권능의 자기 보존은 오직 물리적으로 운동하는 그 권능의 연장된 총합, 즉 그 외연량과 그것의 강도인 내포량에 달려 있다. 특정한 권능에 있어 그 외연값이 적다면, 이 권능의 자기 보존은 오로지 상호 배타적인 외연량의 충돌 속에서 권능의 역관계의 재구조화를 고대하든지, 자신의 내포적인 것부터 키워야 하는데, 이 내포적인 것이 권위이다.
§ 4 지적·도덕적 권위의 원천 ||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혁명적 교체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옹호와 반대를 수반한다. 이 정치투쟁의 물음들은 그 자체 하나의 탐구 대상이며, 또 실천적 해소의 주제이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교체를 옹호하는 모든 역량의 증대는 그 옹호의 반대편에 서 있는, 또다른 특수한 소외라는 힘─이 정치력을 변화의 옹호에 봉사하도록 재조직하는─이로부터 개선 일반과 혁명이 예비를 닦는 개선의 시책화, 계급 동맹에서 적대의 다양한 전술이 구사되는 것인데─작업이자 그 작업의 경과이다. 이 경과 속에서 권위가 싹트기 시작한다.
정치투쟁에서 모든 권위는 지적·도덕적 권위, 즉 현존하는 계급들을 재생산하는 사회경제적 지반을 규명하고, 개별 계급·계층이 이해관계 일반 및 그것의 진정한 내용을 일깨우고, 그것들을 당면한 정치 목표에 맞게 통일·조정하며, 일국적 차원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 목표상 점진적인 것과 비약적인 것을 일치시키며, 어떠한 계급·계층의 이익을 배제할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세우는 데서 작용하는 권위이다. 따라서 정치투쟁에서 권위는 본질적으로 지성적인 것이다.
지적·도덕적 권위와는 반대로, 경제 투쟁에서 권위란 순전히 특수한 위치를 점할 뿐이다. 그것은 통상 노동조합이 조직된 자본과 산업별 부문에서 당장 임노동자의 이익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요구하며 어떻게 취급하느냐로부터, 또 노동조합 활동의 전술상 기술적 정교화로부터 세워진다. 대중적 이익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는 산업에서 활동하는 노동조합의 경우는 개별 자본에 종사하는 임노동자의 이익만이 아니라 연계 이해관계까지 변수에 넣어야 하므로 사정이 이와 조금 다르지만 이조차도 일국적 차원의 그것과는 멀리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매우 불행하게도, 오늘날 셀 수 없이 많은 ‘사회주의’ 표방 그룹이 권위를 지적·도덕적 권위로 삼기보다는 전투적 노동조합에서 관습화된 이른바, ‘현장성’을─이는 대중 노선의 실천적 경험 자료로서의 현장성이 아니라, 철저히 조합의 부분적인 이해관계에 국한된 경제주의적인 현장성이다─권위의 척도로 삼고 있다.
배타적·독점적 소유의 폐지로 향하는, 한 나라의 모든 정치투쟁에서 지성적 권위는 1. 일국적 차원의 사회구성체 규정 및 산업 요소에의 구체 분석; 2. 그 나라 계급 분석; 3. 그 나라 내부의 당면 투쟁에서 주체 역량이 특별히 옹호하는 계급·계층의 이익과 대중 일반 이익의 통합에 관한 분석에서 확고화된다. 수사(修辭)적인 것, 선전·선동은 이 기초 위에서 진행되며, 이는 권위의 확고화를 가속하는 요소이다. 권위는 또한 매 순간에 집결시킨 대중의 정치적 경험과 대오를 창출하고 이를 보존하는 데서 뒤따라 나오는 세밀한 주제의 취급에서 강화된다.
오직 이것들의 완결된 상을 제시함으로써만 권위를 획득·강화할 수 있는데, 이 권위를 정치력으로 전화하는 것이 지도이다.
권위의 확립, 권위의 조직은 광범위한 대중 노선 속에서만 구현되는데, 그것은 일국적 차원의 사회구성체상 제 문제를 겨냥하는 대중의 기백만 물음에 정견을 제출하는 하나의 본질적 관계로 집중된다. 그리고 이 물음에 정견을 내놓는 일은 눈대중과 ‘약삭빠른’ 임기응변 따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일국적 차원의 사회 분야에서 각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관련된 문제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숙지한, 숙련된 직업적 혁명가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역량은 특히 권위의 획득과 관련되는 모든 정치 행위에서 일사불란함을 기할 수 있다. 그러나 행해진 분석이 역량의 활동성을 규정하는 데까지도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은 행해진 분석을 역량에 날 것으로 주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종합적 지침·강령으로, 즉 강제력 이행의 형식으로 제출하여 역량의 행위를 표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반 노선이다.
§ 5 일반 노선의 양식 || 한국 자본주의에서 일반 노선은 1. 한국 자본주의의 현 상태 진단; 2. 한국 자본주의 내부에서 이를 조직적으로 폐지하고자 하는 힘의 실존성 및 그 주체적 힘의 조직화와 과정적인 역량 전반에의 분석; 3. 주·객관적 요소를 고려한 한국 자본주의 소멸의 일반적 경로에서 최소 강령적 요구의 실현, 대중적 지지의 고양 그리고 이것들의 최대 강령 속에서의 배치 문제에의 총론을 내용적으로 함유해야만 하고, 이는 사회구성체의 구체 분석에 근거한다. 내용적으로 함유함이란 일반 노선의 각 항목이 순전히 지루한 관용구의 나열로 그치는 게 아닌, 하나의 논문 형식으로서 제출되어야 하며, 작성에서 치밀한 분석과 사유가 선행되어야 함을 뜻한다.
세 구성 요소 중 특히 가장 어려운 과업을 요하면서도, 또 현존 운동의 상태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셋째 요소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최소 강령의 한정성을 설정하는 것부터, 그 실현 속에서 대중적 경험을 창출하고 이 경험이 의식성을 고양하는 일반 도정(최소 강령적 요구의 실현은 반드시 그에의 반동을 몰고 오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역량의 지도 없이 대중적 경험을 옳은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없다), 조정에서 배제되어야 할 계급·계층, 즉 주요 타격 방향과 요구의 돈정(敦定), 개선 속에서 최대 강령의 최종 목표를 잇는 작업 등 수다한 과업이 요구된다.
일반 노선의 항목은 대주제에서 소주제로, 그리고 소주제의 각 절로, 세분화와 전문화의 원칙에 합치되게 구성되어야 한다. 이는 추상 수준의 계열화 때문에 절대적이다. 주제의 범위는 추상 수준의 질을 규정한다. 가장 작은 단위의 항목에 배치된 주제의 범위는 주어진 추상 수준에서 분석의 유효성 여부를 가른다. 한 주제의 범위가 넓을수록 그 항목에서 행해지는 분석의 추상 수준은 비대해지고, 비대할수록 분석의 유효성은 축소된다. 따라서 그것이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면 다시 세부 주제로 항목을 나누어야 한다. 각 절은 선정된 주제의 한계 내에서 엄격히 기술되어야 한다.
매 항목은 분석의 주제에의 학문적 유효성만이 아니라 지침화의 유효성도 살펴야 한다. 요컨대 각 항목에서 분석의 결론은 그것을 대중적 권위 획득의 자료로 삼는 데서 수반될 정치 행위 수준의 분석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개인 소득에 대한 세율을 정하거나 조정하는 법률에의 분석을 대중이 납득할 수 있게 소개하는 방편은 무엇인가? 마련된 분석이 참으로 민중의 이익을 옹호할지라도, 그 분석의 면면은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기는커녕 싫증을 유발할 수 있다. 농민 지원이 먹거리 물가의 안정화에 공헌할 수 있음을 분석한 것은 그 분석의 타당성과 무관하게 대중에게 가닿을 수 있는가도 그렇다. 산업의 구조 연관의 예속성이 민중의 이익을 얼마나 해치는지에 관한 분석은 국민적 체감을 고려해서 작성되었는가도 그렇다. 이것의 충족은 일반 노선의 각 항목 분석의 시발점이, 국민이 실천적·감성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그것을─이는 불만일 수도, 만족일 수도 있다─얼마나 고려하였는지에 따라 갈린다. 일반 노선의 창조자는 이를 끊임없이 재고해야만 한다.
일반 노선의 창조자는 부단히 창출되는 대중적 관심 분야를 주시하고, 이를 유동적으로 추상하여 분석의 주제로 변형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해 조직화 및 선전·선동 사업은 언제나 일반 노선의 갱신을 염두에 두면서, 대중적 관심의 진상을 조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은 일반 노선의 첫 번째 항목, 즉 한국 자본주의의 현 상태 진단에서 출발하는데, 이 상태 진단의 내용은 1. 소(小)계제로 나눌 수 있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 각 계제의 발생학; 2.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계제 내부의 자기-조직화 및 자기-형성 메커니즘; 3. 계제 사이 불연속성을 규정하는 계기에의 분석으로써만 구해진다.
2026년 8월 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