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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아나키스트들, 대추리, 그리고 나.


미국의 아나키스트들 모임인 New York Metro Alliance of Anarchist의 회의에 놀러 갔다 왔다. 줄여서 자기들끼리 “나이마”라고 부르는 이 모임은 사실 미리 알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Bluestocking이라는 서점이 있는데, 거기서 포스터를 보았다. “혁명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라는 포스터였는데, 사실 나는 미국 내 반전 운동이나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서 수첩에 잘 적어 두었었다.
전철 안 타고 걸어가려고, 정말 얼굴이 깨질 듯이 추운데, 미친 듯이 걷고, 걷고 걸어서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커뮤니티 센터에 도착했다. (뉴욕의 가장 좋은 점은 역시나 그래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는 거다. 자전거를 탄 애들이 부러워서 자전거 값을 알아보았는데, 무지 후지게 생긴게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었다.)
내가 참가한 모임은 “나이마”의 여섯 번째 회의였는데, 주로 두 달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한다. 이 모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뉴욕 내의 아나키스트들이 서로 만나고, 소통하고, 사회에 아나키스트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물론 아나키즘의 정신을 실천하고 퍼트리는 것. 여러 하위 그룹들이 모여서 각기 관심 있는 일을 하는데, 사파티스타와 연관된 일을 하는 그룹도 있고, 진보적이고 억압적이지 않은 보건 의료를 위해 모이는 그룹도 있고, 아나키즘 관련 책을 읽는 그룹도 있고 또 아나키한 LGBT 아젠다를 구성하기 위한 그룹도 있다. 각기 관심 있는 그룹에서 활동하고 가끔 이렇고 모여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한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중에는 불어나서 60명에 이르렀던 것 같다. 젊은 친구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주로 백인이었지만 흑인, 아시안 그리고 시크교도 복장을 한 할아버지도 있었다.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된 나에게 한 집단의 인종적 분포는 사실 매우 민감하게 다가오는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막상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이에 대해 더 생각해 보고 싶다. 또 백인 내의 차이들을 내가 잘 모른다는 점도 문제이기도 하다.)
다들 모여 앉아 서로 소개도 하고, 인사도 한 후 이른바 조별 모임을 하기로 했다. 주제는 지금 기억하기로는 1) 아나키즘 리더쉽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80/20이 여전히 유효한가? 2)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경찰의 체포, 파시스트나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공격 등에 대해서 3) 좌파 막시스트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다른가? 4) 젠더, 인종, 환경과 같은 문제들과 아나키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의 주제였다. 마치 우리 초등학교 때 조별 모임 하듯이 둘러 앉으면, 저절로 조장하는 사람이 생기듯이 사람들이 모여서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몇몇 회의를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나이가 만든, 적든 간에 이 도시의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이야기 하기를 참 좋아한다는 것이다. 흔히 한참을 뺀 후에야, 무게를 잔뜩 잡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나도 종종 그러기는 하지만- 사실 잘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이가 만든, 적든 손을 들고, 순서를 정하고, 뉴욕 사람들답게 빨리 이야기한다. 남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손을 들고 재촉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좀 순진해 보이기도 해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토론의 내용은 사실 그닥 새롭지는 않았다. 나는 3)번 주제에 함께 있었는데, 곧잘 이야기하듯이 막시스트와 아나키스트는 함께 할 수 있다, 없다, 주제에 따라 연합해야 한다와 같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아무래도 이 조별 모임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모여 어쨌든 생각을 나누는데 목적이 있었고, 얼굴이라도 익히자는 게 기획 의도인 것 같았다. 작은 방에 사람들은 너무 많고, 또 다들 이야기하고 있어서 소리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4)번 주제로 옮겨 갔을 때는 “나이마”가 스페인 사용자들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까 통역을 두거나 하자라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조별 토론을 한 후에는 다같이 모여 서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시 한번 요약, 정리 발표 하고 –초등학교 때 발표 수업하듯이-, 또 원하는 주제가 있으면 모두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지금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대추리에 관해 이야기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평택에 가본 적이 없다. 물론 평택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사실 이 문제를 내 생활 속에서 연관시키기가 어려웠다. 평택에 직접 가고, 살고, 거기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감동적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끈해지도 했지만 나는 사실 한국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찾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에 와서 평택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니. 겉멋을 부리는 것만 같아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내 자신을 나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한번도 활동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른바 “활동”이라고 하는 것들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내가 세우고자 했던 원칙은 내 생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범위 안에서, 내가 공부하는 것들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경계에서 평택은 사실 하나의 커다란 원칙 같은 것이었지 내 생활의 사건은 아니었다.
내가 평택에 대해 처음 보는 미국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반전에 이제는 지쳐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사파티스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좀 약이 올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손을 들었고, 뉴욕에 사는 아나키스트들이 나에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사실 내 순서를 정해주었는데, 나는 금방 잊어서 내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른 후에야 내가 이야기할 차례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당황했고, 더욱이 영어로 50명 넘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해보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사람들에게 “대추리”라고 말하게 했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 밖에 따라 하지 않아서 다시 한번 다 같이 “대추리”라고 말하게 했다. 사람들이 다들 어색하게 내 말을 따라 했고, 나는 이 작은 마을이 주한 미군으로 인해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평생을 한 마을에서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을 주한 미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고,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특히나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이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 혼자 우뚝 서서 이야기하며 생각한 것은 도대체 이 이야기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저 이 사실에 대해 알게 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 일일까?’ 나는 내 스스로도 이 질문에 답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마지막으로 이것 역시 하나의 전쟁이라고 이야기했다. 모두들 반전 이야기에 이제 시들해진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저 밖에서는 미군과의 수많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이를 잊지 말고 기억해달라고 말이다.
나는 이 결론에서 주한 미군이 문제인지, 한국 정부가 문제인지 내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당시에 생각한 것은 이 사람들 역시 이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이었다. 내 짧은 이야기는 질문 없이 지나갔고, 그 후 또 여러 주제들이 오고 갔다. 봄에 열리는 포럼에 참가할지, 보스턴에서 하고 있는 이민자 노조 운동에 어떻게 동참할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회의가 끝나고 몇몇 사람들이 내게 와서 내 이야기가 흥미로웠다거나,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사실 내 시원찮은 영어 실력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내 이야기를 알아들었는지 그닥 확신이 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너그럽고 예의 바른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낯선 곳에 와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에 대해 이전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텔레비전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어떤 가능성들을 확인하고 있는 듯하다. 데이빗 그래버가 한국에 왔을 때 얘기한 “스스로를 스스로가 조직하기 self organization”가 좀더 뚜렷한 형태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한번도 내 스스로 무슨 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슨 무슨 주의자나 무슨 무슨 활동가가 되지 않고도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의 아나키 친구들이 하듯이 좀 덜 안달복달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
평택의 이야기는 사실 멀리 있다. 나는 이것을 멀리서 느낀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 역시 이 이야기를 멀게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적 거리감 속에서도 어떤 가능성들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멀리 있는 원칙들을 가깝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구심력을 구성할 가능성 말이다. 아직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실천들이 언제고 연합할 수 있는 그 어떤 공통점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자석에 철가루들이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붙어 있듯이, 우리의 서로 다른 움직임들이 어떤 커다란 힘을 구성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겨난다. 우선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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