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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는 이제 완전히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은 듯하다. 나는 뉴욕에 오기 전에도 채식주의에 대해 몇 번을 고민했었는데, 이곳에 오니 비자발적 채식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유는 인터넷도 쓰고, 또 무언가 쓸 수 있게 오래 뭉갤 수 있는 차도 팔고 밥도 파는 카페가 있는데, 여기가 이른바 채식 카페라 고기들은 걸 거의 팔지를 않기 때문이다. 오늘 먹은 건 Bien Buritto인데, 현미, 토마토, 아보카도, 기타 푸른 야채를 밀전병에 말아준 것이다. 물론 맛있게 먹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무언가 복잡한 느낌이 든다. 지난 번에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갔을 때 정말 배고파 죽을 것 같아 들어간 곳 역시 고기 안 파는 식당이었다. 여기는 또 밀가루를 안 써서 모든 팬 케이크나 샌드위치가 밀가루 안 넣고 만든 것들이다. (먹으면서도 도대체 밀가루가 아니면 뭘 넣었는지 모르겠다. 쌀가루인가? 옥수수?) 그때도 물론 커피에마저 두유를 타주는 이 곳에서 맛있게 식사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다.
마음이 불편한 가장 큰 이유는 밥 먹는 사람이나 서빙하는 사람들이 모두 백인 혹은 가끔아시안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는 사람들은 히스패닉 아니면 라티노이기 때문이다. 매번 채식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인종+계급적 구분의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다 두근두근하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정말 사랑스럽고, 편안하고, 또 가격도 저렴한 편인 곳이지만 나는 여기서 단 한번도 식사하거나 차 마시는 라티노나 히스패닉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이른바 백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인종적 구분에 덜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다.
채식하는 흑인? 채식하는 라티노? 채식하는 히스패닉? 채식하는 접시닦이? 채식하는 노동자? 채식하는 이민자? 피자 먹는 곳에 가면 당연히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왜 채식 식당에는 없는 걸까? 그건 단순히 동네가 달라서 그런 걸까? 할렘이나 브루클린이나 퀸즈에 가면 채식 식당에서 여러 인종들이 다 같이 밥 먹고 있을까?
마치 이럴 때면 채식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배운 게 좀 있는 이른바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전유물 같아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지난 번에 아나키스트 모임에 갔을 때도 모두 채식 식단이었는데, 거기 써 있던 팻말은 “Meet is already involved!”라는 말이었다. “고기는 이미 연루되어 있다”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른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갈비집 딸이나 삼겹살 집 딸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 역시 음식점하는 집 딸인데, 내가 채식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식구들을 배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엄마한테 나 채식주의 할래라는 말은 못하겠다. 삼겹살 집 딸인데 채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좀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채식주의로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듣거나, 보거나, 읽기는 하지만 나는 여기서 오히려 채식주의 하지 않으며 사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채식주의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삶의 바꾸는 방식을 가장 기본적인 방식인 먹는 것에서부터 무언가를 바꾸어 간다는 사실은 정말 근본적으로 혁명적이며 중요한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채식주의 할 수 없는 삶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다. 생활 방식, 그러니까 라이프 스타일은 정말로 계급적이다. 우유도 안 먹고, 두부에 집착하는 방식은 이곳에서는 새로운 소비주의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공정 무역으로 팔리는 커피만 파는 것처럼 삶의 정치를 실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너무 여러 종류의 채식주의자들이 있어서 (이른바 정치적 채식주의자와 건강주의자들이 모두 채식주의에 섞여 있으니까) 무언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종교적 의미에서 채식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자기 계급의 실천 방식과 결코 분리 불가능하다.
우리 엄마가 가끔 하시는 말 중에 “사람은 그래도 남의 살을 뜯어 먹어야 힘이 나는 거야”라는 말이 있다. 서울서도 고기도 틈틈히 챙겨먹고 힘내라고 하시는 말씀인데, 나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남의 살 뜯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 역시 남의 살을 안 뜯어먹겠다는 결정만큼이나 중요하다. 고기는 이미 연루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고기 먹는 사람들은? 남의 살 먹으며 힘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이 채식주의의 도덕성과 함께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더욱 불행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겹살 집 딸도 실천할 수 있는 음식의 정치! 그냥 채식주의 말고 이런 걸 찾아보고 싶다. 공정한 돼지고기, 자유로운 닭고기, 억압없는 쇠고기 등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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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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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채식하면서 이 문제 정말 고민되었어요. 지금도 결론은 못내리고 있지만,그래서 채식이 어떤 운동이 될수 있는것인가 하는 고민...이 포스팅 너무 반갑네요. 좀더 다양한 지점들이 이야기 되었으면 좋겠어요.채식은 무엇을 먹을것인가를 결정하는것의 문제 중에 하나, 결국 삶을 어떻게 재생산할 것인가,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의 문제들 중에 한가지라서... 좀더 많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거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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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bu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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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삶을 어떻게 재생산할 것인가", 정말 그걸 선택하는 방식인 것 같아요.부가 정보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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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고민하던 중, 채식을 한다는 것에는 채식 그 이상의 뭔가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는데 정리가 잘 안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가닥이좀 잡히네요.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부가 정보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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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주의자이자 현실영합주의자인 행인은 그래서 채식을 하겠다는 혁명적 발상의 실천을 따르기보다는 쬐끔만 먹자...는 쪽으로 선택하고 살고 있습니다. 고기를 원래 찾아서 먹는 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육식을 끊는다는 것 역시 뭔가 불편한(생활의 측면에서든 정치적으로든) 면이 있더군요. 그래서, 뭐가 됐든 조금만 먹자, 죽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정리를 했는데...요 며칠 저녁때마다 배가 째지게 처먹고 있다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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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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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다르게 고기를 좋아하는 넝쿨은 공정한 돼지고기, 자유로운 닭고기, 억압없는 쇠고기에 찬성입니다!부가 정보
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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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옳고 다른 것은 그른 것이 아니지요. 서로를 잘 이해하면 대부분의 문제들이 풀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은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고요.채식하는 흑인, 채식하는 라티노, 채식하는 빈민... 분명 채식하는 백인, 채식하는 중산층에 비해 자주 볼 수 있는 집단은 아니지요. 아나키스트 모임을 봐도 대부분은 백인들이 많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 정치적 급진주의 내부에서나 혁명적 실천들에서도 역시 가난한 계급, 소외된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차별과 불평등은 그만큼 전면적인 것이지요.
대안적 생활에 대한 접근성 마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봉쇄되어 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이 채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다양한 대안적 활동을 하게 될 때 급진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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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p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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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블로그에 담아가도 될까요?부가 정보
dubu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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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담아가셔도 되어요!부가 정보
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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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음식을 당신의 밥상에 = 웰빙의 욕망', '자연을 당신의 집안으로 가져가라 = 토건자본들의 아파트 광고' 속에 둘러싸여, 정작 오래살아온 생명체들의 순환과 그 상호나눔에 대해 고민을 차단당했다고 생각햇는데... 이러한 성찰과 토론이 많이 많이 확장되었으면 좋겠어요.부가 정보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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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저도 담아가겠습니다. 그래도 되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