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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30

촛불시위를 거의 매일 참석하면서

한 10여일 전부터 매일 두통에 시달린다.

처음엔 광화문에서 소화기가스냄새떄문이려니 했는데

집에 와서도 내내.

지금도 계속.

눈물도 많아지고

입도 거칠어지고ㅎㅎ

 

할수있는 일이 너무 없어서 화가나고

토요일날 타로 모임을 하고 인사동에서 광화문으로 걸어오는데

온 길을 꽉꽉 메운 전경버스와 전경을 보자니 좌절감에 걸을 기운마저 빼았겼다.

인도에 주저앉아있다가 다시 걷고,

그래도 시청에 도착하니 조금 위로는 되었지만,

 

워낙 만만하게 생겨먹은 외모덕에

여기저기서 아저씨들이

사람좋아보이는 토할것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물어본다.

(나이 어린-어려보이는- 만만한 여자를 고르는 거겠지만, 사람 잘 못 찍었다는거-_-;;)

  

 

날이 밝아오는 시위현장에서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쌩썡하구나.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표정이 밝구나.

싶어 마음이 찡하고,

 

일요일은 쉬려고 했더니만, 시청을 완전봉쇄한 모습에 화가나서

달려나갔을 뿐인데, 이곳저곳 산발적으로 모인 시위대들이 종각에 모였을떄..

점점 늘어가는 촛불의 모습에 또 다시 찡했다.

 

그래도 허탈하고, 좌절감이 온 마음을 뒤덮고 있다.

 

 

인간답게 살고싶다는거 외에 뭐 있나?

이게 그렇게나 무리한 요구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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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킴 / 제유법

 

바이런 킴/ 제유법(提喩法)/ 패널에 유채와 왁스/ 1993

 


바이런 킴은 캘리포니아 라 호야에서 출생한 한국계 미국작가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다양한 인종의 피부색을 수백개의 작은 패널에 그린 <제유법>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의 <제유법>은 모노크롬 추상회화의 전통을 인종에 대한 논의와 연결시킴으로써 피부색깔이 갖는 형식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흔히 인종을 논의할 때 사용되는 한정된 색에 함축된 여러 의미들을 수백개의 패널에 제각각 표현된 수백명의 실제 인물들의 피부색으로 희석시킴으로써 인간의 신체와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형식주의적 관심에 대한 은유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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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현대미술을 단 한 점만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선택할 작업.

너무너무너무 사랑하는 작업.

내 평생 이런 작업 한 점 나오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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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7

 

예전에 현장학습 갔을 때.

내가 정신이 없으니 널부러진 가방하며-_-;;뭐 엉망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우리 애들 밝아졌다잖아. 수업거부도 안하고.ㅋ 애들이 붕붕 떠다닌다고.ㅋ

얘들아 알랴븅,,똥..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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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5

 

아. 2004년도 특교과 학생일때네.

작업하고나서 지저분해진 손을 씻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손가락 끝은 까매..

이땐 방학만 되면 남은 생활비로 재료를 왕창 산 뒤에 짐 싸고 집에 내려가 그림만 그렸었다.

하루에 3장씩 막 그렸었는데. 흐

그냥, 그떈 그래야만 했다. 에너지가 불끈불끈.ㅋ

근데,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지금은...엉?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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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4

 나의 유화 파레트.

 

 

 

 

예전 사진들을 보다가.

나는 유독 그림을 그리는 손 사진이 많이 찍혔다.

작업을 하다가 더러워진 손을 씼으려는 찰나의 사진도 많이 찍혔고.

그 중에서 내가 많이 좋아하는 사진.

작년 겨울엔 매일 유화 작업만 했었다. 유화라는 재료에 그닥 매력을 느끼진 않아서 앞으로 유화작업을 할 것 같지는 않다만, 그냥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쯤은 재료를 익히고, 내 방식은 만들고나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작년에 이 사진 밑에 '꼭 좋은 그림 그릴꼐요.'라고 써 놨었다.

으......좋은 그림..이젠 정직한 그림으로 바꼈지만.

 

그림을 그리는 단 한순간도 난 불행한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혼자만 열렬히 사랑하는 것만 같아 괴로울떄도 그래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게 훨씬 좋았다.

그래서 그림이 좋다.  ^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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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엉엉 이젠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아”


유승호_엉엉~이젠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아echowords(detail)_벽 위에 드로잉_200×110cm_2004

 

 

 

 

 

내가 너무 사랑하는 작업. 엉엉

작가 이름도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오직.  '엉엉'만 생각이 나서...

이 작업 찾는다고 얼마나 헤매었는지 몰라..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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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정직성

 
 
박이소가 부르는 '정직성'은 영어 가사와는 다른 정말 깊은 울림이 있다.
몇 년 전에 죽은 그를 나는 알지 못하며, 그의 작품 또한 실제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를 알게 된 이후로 내 작업의 화두는 '정직성'이 되었다. 박이소가 되었다.
 
 
 

박이소 인터뷰(펌)

질: 심사위원들이(2002년 에르메스상) 박이소 씨를 선정한 이유가 '개념미술적인 설치 작업들이 지닌 예사롭지 않은 개념의 전달 방식,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스케일과 재료의 기용'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작가 자신이 주를 단다면.

박: 제가 작품을 통해서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는 ...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너무 황당무계하고 무력하게 느껴지는 나머지 그런 감정을 직접 드러낼 때도 있고, 세상의 엄청나게 큰 것들을 하찮게 다시 이야기 하는 방법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 어설픈 것과 쓰잘데 없는 것, 약한 것에 대한 동병상련적 애정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 또 오해와 알 수 없음이 주인인 것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막막함과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는 거대한 것의 초라함에 대한 관심도 있고 ... 임시성이 주는 해방감도 좋아하고, 매사가 꼭 들어맞지 않아서 생기는 여유 같은 것도 좋아합니다. 이런 여러 느낌들과 함께 '현실'과 '미술'에 대한 헐렁하고도 미온적인 긍정의 정서 같은 것을 시각화 해보려는 시도라고도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작품 안에 우스꽝스러움과 진지함이 함께 있는, 모호하면서도 즐거운 동네가 만들어지기를 원합니다.


질: 2001년 대안공간 풀의 전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사회 현상과 세계 변혁에 대해 발언하려는 작가의 의지는 어디서부터 오는지. 그 구체적인 방식을 고안하는 원동력이라면?


박: 그 전시를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적 의도로 보는 것은, 그렇게 보려는 사람의 성향과 관심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 전시에서 보여진 체크무늬 장판 깔린 방이나 세계지도가 그려진 의자, 박스더미 같은 것 때문에 그런 인상을 조금 줄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의 정서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이 더 많았습니다. 나는 변혁이나 발언에는 관심이 없고, 그보다는 실없는 농담과 시원한 하품, 삐긋 어긋나는 각도나 옆으로 새는 소리, 또는 썰렁함과 헛헛함의 메아리 같은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질: 당신 작업을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설명하는 글들을 흔히 봅니다. 당신이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하는 세계의 '면목'은 대개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당신의-속에는 명료하게 있습니까, 다시 말해 작업이 당신을 캐냅니까, 당신이 작업을 뜹니까?

박: 어쩌다가 사회 정치적 내용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의 면목은 전혀 명료하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차피 알 수 없는 커다란 혼돈이 우리가 방문하는 이 물질세계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업과 나와의 생산주체 관계는 닭-달걀 관계같이 별로 의미 없는 질문 같은데...


질: 보통 설치 작품이라 하면 대부분 추상성이 강한 오브제 형식이 많은데 선생님의 작품은 합판, 콘크리트, 리놀륨, 석고보드 등의 건축 자재를 이용한 바캉스, 방, 오늘, 샌 안토니오의 하늘 등 공간이나 건축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특별히 이런 표현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다면?

박: 그런 계열의 작업들은 서울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사장 풍경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공사장은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현장인데, 단순히 건축적이거나 공간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가진 것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전진하고, 인내하고, 노력하는 인간의 가치관 혹은 믿음을 물질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소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가치관에 대한 회의나 의심이 많은 편입니다. 제가 작품에 사용하는 건축재료나 건축과정을 연상시키는 구조들은 그런 만들기-노력하기-성취하기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삶의 태도에 대한 질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 공사장에는 영속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사용하는 임시적인 구조들 - 아시바나 받침, 가리개. 깔개등 - 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임시적인 구조들과 재료들에서 인간들 삶의 임시성과 너절함 같은 것을 많이 보는 지도 모르겠고 ... 그런 것들의 부실함과 대충 대충이 부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열린 태도로 느껴졌습니다. 완성에의 집착이 없는 어떤 경지와 그 헐렁함에 매력을 느꼈고, 그것이 저의 부실한 모습 같기도 해서 지금도 공사장을 지날 때는 여러 가지를 관심 있게 봅니다.


질: 블랙홀 의자,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책상, 월드 의자 등의 작품을 보면 의미가 많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을 보고 있으면 기능적인 가구 디자인과는 분명 차별화 되어 있지만 추상적이거나 모호하다는 생각보다는 굉장히 구체적이면서도 뭔가 손에 잡힐 듯한 기분이 듭니다. 작가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박: 까만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블랙홀이라 우기면 조금 웃기지 않겠습니까? 또는 세상을 깔고 앉을 수도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의 의도라면, 어마어마하게 커다랗고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어처구니없이 바보 같은 농담을 하는 것인데 ... 농담을 하는 의도는 지루하고 답답하니까 조금 재미 있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질: 어릴 적 말괄량이 삐삐가 아빠에게 편지를 써서 유리병에 담아 바다에 띄워보내는 것을 보면서 잠시동안 그 유리병이 넓디넓은 바다 위를 헤매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위성위치추적장치 병을 이용한 작품 무제(표류)를 보면서 이런 기억이 잠시 떠올랐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그리고 작업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작업하시는 동안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박: 편지를 담은 병이 바다를 떠돌다 결국 그 편지를 받을 사람에게 도착했다는 이야기, 또는 사연을 실어 보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병이 떠다니는 위치를 알고 싶다는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사실 그 병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아야만 할 이유가 별로 없는데, GPS를 장착해 그 위치를 추적하겠다는 생각은 쓸모 없는 지식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배터리가 한정된 상태에서의 GPS를 장착한 이 병은 짧게는 2주, 길면 4주 정도는 신호를 보내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행방불명되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지식체계에서의 행방불명일 뿐, 여전히 그 병은 존재하며 계속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저의 예상일 뿐, 표류를 시작하고 나서 신호를 몇 번 보내온 후 금방 신호가 끊기고 조기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2주 이상 정보를 얻으려고 생각했지만 그 병은 그런 인간의 계획과 통제마저도 우습게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현실의 표류와 상상 안에서의 표류, 존재와 존재간의 소통 가능성과 또는 불가능성, 행방불명과 존재와 지식의 관계, 계획과 운명의 무상함 같은 것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멀리 나가는 바다 낚시 배를 얻어 타고 멕시코만 해류에 그것을 떨어뜨리고 나서 그 곳의 바다 사진을 찍었습니다.


질: 자신에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충분한 예술가적인 끼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느 순간 작업을 하고 싶어 몸서리치시는지?

박: 충분한 끼가 있어서 예술가 하는 건 전혀 아니고 ... 살아야 하는 이유나 핑계가 필요해서입니다. 그래도 인생인데 심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고, 남들처럼 일하고 돈벌고 하는 방식에는 전혀 적응이 안되니 이런 보호구역에 들어가서 약간 아픈 척 하면서 적당히 뭉게볼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저는 예술의 영역이 약간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호구역이나 양호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을 하고 싶어 몸서리친 적은 없습니다. 언제까지 해 주기로 했으니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합니다. 가끔은 심심해서 할 때도 있습니다.


질: 매우 오래 전 일이겠습니다만, 당신에게 한국의 '미술대학' 또는 미술교육은 무엇이었습니까?

박: 현실도피에 가까운 동기로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그곳이 중 고등학교와 별 다름없는 곳임을 발견하고 상당히 충격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디론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유학을 알아봤는데 그때만 해도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유학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유학자격증을 돈주고 사는 셈치고 학교를 다녔고, 간신히 졸업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제가 받은 미술교육을 생각하면 명백한 시간 허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미국식 미술 교육을 받을 때에는 교육의 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만족을 했었지만 그나마도 졸업하고 나서는 그 교육내용이 80년대와는 너무 동떨어진 후진적인 것임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그때 다시 한번 학교선택을 잘못해 시간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그러고 보면 살아가는데 시간 낭비 아닌 것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발전 중심적 또는 생산 중심적 시각에서만 보면 사실은 인생의 대부분이 시간 낭비로 점철되어있지 않나 합니다. 역설적인 의미에서라도 그런 교육의 의미가 저 개인에게는 있었다고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도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교육의 틀이 20년 후인 지금도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질: 당신은 흔히 '미술'에서 버림받은 재료(예를 들어 합판, 시멘트, 비닐, 심지어 간장까지)를 가지고 작업을 합니다. 특별히 이런 재료들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박: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전통적인 재료로 무언가를 잘 그리고 잘 만들어서 칭찬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어서 ... 그래서 재료에 대해 고정된 가치관이나 생각 자체가 거의 없다 시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 또는 저의 냉소적인 성향, 씨니컬한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많이 사용되어온 미술재료를 별 생각 없이 사용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을 때에도 공연히 진지해지고 심각해지는 함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도와 관습의 연장선상에 쉽게 줄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재료를 더 사용하려고 특히 노력하는 것은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연필, 종이, 물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저는 재료나 매체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지도 않고 관심도 없이 그냥 사용하는 편인데, 나중에야 그런 방식을 썼다고 오히려 남들이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질: 1998년 타이빼이 비엔날레에서의 설치작업 “Don't Look Back"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작품들은 서로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박: "Vital Parts"는 성장과 노력과 분배 같은 말들에 관계가 있고, "끝까지 발전"은 건설과 개발과 목표 지향적 가치관 같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정직성"은 보편성과 문화의 수출입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세 부분이 어떻게 의미적으로 관계가 있는지는 먼저 시각적인 느낌에서 찾아야 할 것 같은데요. 누가 봐도 대충대충 만들어진 분위기나 산업화, 도시화, 국제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근대적인 삶의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는 우리의 삶의 과정을 비판과 긍정의 차원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뒤돌아보면서 ... 앙상하고 헐렁하게 드러낸 것에서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질: 북두칠성에 더해진 별 하나의 의미는?

박: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경우도 많지만, 이렇게 저렇게 시도를 해 보다가 우연히 생긴 일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따라갈 때도 많습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별 스티커를 붙여서 북두칠성 모양을 만들다 우연히 별이 여덟 개가 된 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참 좋다고 우연히 작업실에 들린 분이 말해 주었고, 그래서 그런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 마음에 들었냐는 이유를 조금 지적으로 말한다면 ... 오해와 소통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라고 할까요. 별이 여덟 개라도 전체 모양이 북두칠성이면 누구나 그렇게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거든요.
그 이유를 굳이 유치하게 말하자면, "별 하나 나 하나" 하는 말처럼 나의 별이 북두칠성에 끼어 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소원성취나 희망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요.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옛날 고분벽화 중에도 별 하나가 더 있는 북두칠성 그림이 있었습니다. 반가운 나머지 제가 옛날의 바로 그 사람이 환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질: 당신의 작품 세계를 굳이 PR한다면?

박: 대중의 일반적인 감성에서 보기에는 제 작품은 공들여 만든 것 같지도 않고, 비싼 재료를 쓰지도 않으며, 예쁘지도 않고, 정면에서 들이대는 메시지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사람마다 보기 나름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참 예쁘면서, 또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부족함과 미완성을 긍정하면서 답답한 한계를 시원하게 넘어서려는 자포자기적인 희망같은 것. 우스꽝스러운 애들과 심각한 애들이 사이좋게 놀고 있는 장면 같은 거 ...


질: 드로잉에서 설치, 비디오 등 작품의 영역은 참 넓은 것 같은데,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분야(미술에서)가 있으신지요?

박: 별로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왜냐하면 ... 저는 조각이든, 사물이든, 설치이든, 그림이든 미술의 방식이 인간의 시각을 통해 작동하고 전달하는 것인 만큼 그들 사이에서 큰 차이를 못 느낍니다. 그것들이 서로 다른 표현 매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수채화물감, 유화물감, 아크릴물감 사이의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새로운 매체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질: 작품을 보면서 유머러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머러스하다는 말은 모호한 뭉뚱그림 같은 것일 수도 있겠군요. 작품 속에 유머의 감정을 담으시는지요?

박: 인간이 가장 고귀해지는 순간이 고차원의 유머를 구사하고 이해하는 때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유머가 우스갯소리나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듯 합니다. 가만히 있는 물건이나 미술작품도 시각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미술을 고상하고 심각한 메시지의 전달로만 보려고 하지말고, 재미있게 살자고 하는 짓으로, 또는 시각적인 농담으로도 볼 수 있음을 감안해 주면 좋겠습니다.


질: '빌리 조엘'의 '어니스티'를 직역해, 직접 노래한 테이프를 작업에 이용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가사를 적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멜로디를 따라 불러보고 싶어서입니다. 당신에게 '정직성'은 무엇입니까?

박: 따스함을 찾기는 어렵지 않아. 그냥 사랑하며 살면 돼.
진실을 찾는다면 그건 힘든 일이야. 너무나 찾기 힘든 바로 그것.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더러운 세상에서.
어니스티, 너무 듣기 힘든 말. 너에게 듣고픈 그 말.
그 누군가는 나에게 이해한다고. 내 진심을 보여 줄 때만.
그럴듯한 말하는 그럴듯한 얼굴. 그 누구를 믿어야 하나.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혼탁한 이 세상에서.
어니스티, 너무 듣기 힘든 말. 너에게 듣고픈 그 말.
사랑을 찾아서, 친구를 찾아. 안정을 찾아도 끝내는 헛된 것.
달콤한 약속으로 날 편하게 해도. 난 알아, 난 알고 있어.
깊은 생각에 잠길 땐 모른 체 해줘. 많은 것을 기대하진 않겠어.
내가 진실을 찾을 때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너만 내게 말할 수 있어.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더러운 세상에서.
어니스티, 너무 듣기 힘든 말. 너에게 듣고픈 그 말.


 '정직성'은 터무니없이 중요한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체성'이 발 디딜 틈이 거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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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예술가에게 성공은 없다 다만 성장이 있을 뿐

제목: 예술가에게 성공은 없다 다만 성장이 있을 뿐

설치미술가 / 이불


지난 6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후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아마추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 작품은 대중문화의 상징인 팝송, 특히 사랑을 주제로 한 90곡의 노래를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2개의 노래방 캡슐과 함께 설치한 것이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는 한국을 포함해 세계 60개국을 대표하는 작가 250명이 참여했다.이 미술전에서 특별상은 참여한 작가들 중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에게 주는 것으로 나는 베냉, 핀란드. 폴란드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공동으로 이 상을 받았다. 이번 수상은 나에게 ‘작은’ 의미가 있다.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미술전에서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라기 보다는 아시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여성작가인 나의 작품세계 속에 세계인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나는 이름이 외자인데다 특이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다. 게다가 왼손잡이여서 선생님들이 오른손 쓰는 훈련을 시키시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가 그냥 왼손을 쓰게 놔두라고 말씀하셔서 오른손쓰기 훈련은 계속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부모님은 나를 사립학교에 보냈다. 생활수준이 차이가 있었던 탓으로 부유한 집안의 또래 친구들과 나는 쉽게 어울릴 수 없었다. 비록 중간에 공립학교로 전학을 하긴 했지만 친구들의 대수롭지 않은 놀림에도 쉽게 열등감을 느낄 수 있던 그 어린 나이에 내가 받은 정신적인 상처는 컸다. 부모님은 모두 사회운동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는 느닷없이 형사들이 들이닥쳐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일이 잦았다. 한곳에 오래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이사를 많이 다니기도 했고 친척들의 발걸음도 뜸했다. 어린 나이라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우리 집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바깥으로 나돌기보다는 집안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기를 좋아했다. 그 시절 유일한 내 친구는 책이었다. 맛있는 과자를 숨겨 놓고 야금야금 몰래 꺼내먹듯 집안에 있는 모든 책에 순서를 정해 읽어 나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동화와 위인전과 세계명작들이 만든 세상살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일생을 사로 잡아버린 한 인물을 만났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우연히 잡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위인전을 읽으면서 나는 의사이자 과학자이자 조각가였던 그에게 흠뻑 빠져 버렸다. 아, 예술가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 책을 읽은 이후 단박에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평범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나는 “특별하게 살아야 한다”는 자기암시를 해왔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삶이 더욱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만큼 특별한 사람이 또 있으랴! ‘특별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생존전략 같은 것이다. 나의 환경이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갖게 되는 비젼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면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과 어울려 닮아지기보다는 나만의 세계 속에 빠져들어 다른 말과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에 더 몰두했다. 그래서 그럴까.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 파격적, 도발적, 게릴라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것이 내 작품 속에 들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를 꿈꿔왔던 나는 1982년 대학(홍익대학교 조소과)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좌절감 같은 것을 느꼈다. 목숨걸고 치열하게 공부할 작정이었던 내가 보기에 대학이란 공간에는 대학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들, 취미 정도로 그림이나 조각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면 어린 시절 위인전에서 만났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같은 예술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환상 속의 그대’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술의 혼이 지글지글 끊어 넘치는 용광로 같은 공간을 기대했던 나에게 대학은 너무 밋밋한 곳이었다.

3학년을 마치고 나는 휴학계를 냈다. 그땐 아예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휴학하는 동안 이것저것 잡다하게 경험했다. 연극을 하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러 다니기도 했다. 훗날 이 경험은 나의 퍼포먼스 작업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게 된다. 짧지 않는 방황을 끝내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배우고 익힐 것이 그곳에는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돌이켜보면 대학시절의 방황은 작가가 되는 길은 절망과 좌절의 연속임을 스스로에게 알리는 애교스러운 경고에 불과했다.

1987년 여름이었다. 내 작업실이 경기도 원당에 있었는데 그 즈음 그곳에 큰 홍수가 났다. 건물의 지하실을 얻어 만든 작업실이 완전히 물에 잠겨버렸다. 며칠을 발만 동동거리다 겨우 들어가 봤더니 대학 때부터 5년 남짓 몰두해왔던 작품들이 몽땅 다 물에 잠겨 버렸다. 흙물, 똥물로 뒤덮혀 있는 작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너무 황당해서 아무도 없는 벌판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의 최악은 없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목놓아 엉엉 울었다.

그러다 문득 내 상황이 ‘이불, 5년 동안 만든 작품이 물에 잠겨 작가생활을 그만두다’라는 한 문장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한 문장으로 떠올린 내 상황이 너무 코믹하게 느껴졌다. ‘홍수가 나서 작품이 물에 잠기다니,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다니 하하, 웃긴다...’ 벌판에 혼자 주저앉아 통곡을 하다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갑자지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비실비실 빠져 나오던 웃음이 급기야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얼굴에는 온통 눈물 범벅인 채로 배꼽이 빠져라 웃어 제켰다. 한바탕 웃고 나서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전화부터 했다. 카메라를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카메라 셔터가 찰칵거리는 중에 나는 흙물, 똥물에 뒤범벅된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지하 작업실에서 꺼내 공터에 모아 놓았다. 비록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지만 한곳에 수북히 쌓인 그것들 속에는 지난 5년간의 내 땀과 눈물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나는 작품들을 한곳에 쌓아 놓고 휘발유를 뿌리고 성냥불을 던졌다. ‘확’ 하고 화염이 솟아올랐다. ‘안녕, 나의 5년이여... 네가 있었기에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단다...’ 그 모든 과정은 사진으로 남았다. ‘이불의 새출발’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하나의 완벽한 퍼포먼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에서도 나를 붙들어 맬 수 있는 자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작가에게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절망적이기보다는 낙천적인 것에 가까운 바로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 위기가 와도 절망하지 않고 한순간에 긍정적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다. 그것이 훈련을 통해 얻어진 것인지 내가 처음부터 타고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자기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그런 힘이 없는 사람은, 혹은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나를 지키는 힘이 작품을 만든다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기회가 많은데 그때 학생들에게 꼭 물어본다. “무엇 때문에 예술가가 되려고 하느냐”고. “죽고 살기로, 본능과도 같이 할 자신이 없으면 그리고 뭔가를 꼭 해내야겠다는 야심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거다, 10년을 해봐라 너희 중 90%는 포기하고 말거다, 잘한다는 소리도 못 듣고, 돈도 벌지 못할 거고, 자기 성취감도 못 느낄 것이다” 고 말한다. 다소 냉정하다 싶지만 내가 겪어온 현실이 바로 그렇게 때문에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예술가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무엇을 하든 본능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빠져 들어가듯 작품에 매달려야 된다. 그리고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와도, 바닥까지 떨어질 것 같은 자기 자신을 잡고 있어야 된다. 누군가는 말한다. 시험삼아 자기를 최악의 상황까지 떨어뜨려 본다고. 그러나 그건 말이 안된다. 인간이라면 두려움 때문에라도 자기를 밑바닥까지 집어 던질 수 없다. 그건 곧 포기를 의미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상황에 빠져들더라도 그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연히 멋있는 작가가 되겠다거나, TV나 신문, 잡지를 통해서 본 아무개 작가가 멋져 보였다고 해서 그것을 보고 목표를 삼으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다. 내가 공식무대에 데뷔 한 것은 1987년이다. 그러니까 데뷔 한지 10년이 넘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해 온지는 30년이 되어간다. 그만큼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잘 나가는’ 작가가 되겠다던가, 어떤 전시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 본 적이 없다. 꿈이 구체적일수록 실현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러나 그런 꿈을 목표로 잡았을 때 그것을 성취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예술가는 자기 내부의 야심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루어낼 때까지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어시스턴트(작가를 보조하는 사람)하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왜 예술가가 되려고 하느냐고 물어본다. 대답은 비슷하다. “내 안에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있다”며 “이 길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동안 끄적거렸던 것을 뭐든 다 가져와 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자기 내부에 “끌어 오르는 듯한 뭔가가 있다”며 그것을 예술적 끼나 열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아니다.

예술가의 영감이란 심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물리적인 힘이다. 그 힘은 항상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는 끄적거린 낙서라도 쌓인다. 평소에 한 줄의 노트도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소설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별가치가 없어 보이는 낙서장이라고 쌓이는 것, 다소 유치하다 하더라도 아이디어를 그려놓은 종이가 쌓이는 것이 모두 훈련이 된다. 그 훈련 끝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결과물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왜 하는 건지, 어떻게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지 모르는 사이에 쌓여 있는 결과물들을 보면서 자신이 어느 지점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내 안에 어떤 종류의 열정이 들어 있는지 면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 나 여자고, 아시아인이고, 한국인이다!

유명한 예술가들은 누가 보기에도 멋있다.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 중에는 한순간에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어서 그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을 흉내낸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에 대해서는 보려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하루아침에 뭔가가 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다. 국내를 넘어 외국까지 이름을 알리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87년 데뷔한 후 국내외에 ‘설치미술가 이불’로 알려지기까지 꼭 10여년의 무명 시절을 견뎌내야 했다. 그 10년의 무명작가 시절 내가 이겨내야 했던 차별이 많았다. 여성작가, 그것도 아시아의 여성작가라는 내 정체성은 국제무대에서 핸디캡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나의 태생적 환경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 그 핸디캡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 작품을 통해 당당하게 드러낸다. 여성이기 때문에,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내가 권력구조를 주제로 작업을 하는 것은 그런 권력구조 안에 바로 나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크고 작은 권력구조 속에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구조들 중에는 선명한 것도 있지만,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미쳐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것들도 있다. 그것들을 살펴보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나의 작품활동인 셈이다. 자기가 가진 조건들이 변명거리가 되서는 안된다. “나는 이래서 뭐가 안돼”라는 말은 특히 예술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흔히 우리가 무슨 일은 할 때 어렵다, 힘들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과는 다르다.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에너지가 더 많이 들어가고,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일 뿐이다.

예술에 절대 장르란 없다

나는 ‘예술에 절대 장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 왔다.

1987년 열린 첫번째 개인전 때 나는 솜을 집어넣어 팽창한 몸체에 손, 발, 꼬리가 여기저기에서 삐져 나온 작품을 직접 입고 대중 앞에 섰다. 1989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발가벗은 채 거꾸로 매달리는 퍼포먼스 ‘낙태’를 공연했고, 1990년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방독면을 쓴 채 더러운 신문지로 밑을 닦는 퍼포먼스 ‘아토일렛(Artoilet)’을 공연했다.

1994년에는 쇠사슬로 내 목을 매단 ‘여성 그 다름과 힘’을 발표했다. 나는 데뷔 직후 초창기 2~3년은 주로 여성의 삶과 체험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공연에 주력해 왔다. 그 때 내 작품의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지금도 내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한 미술평론가는 내 작품을 “‘날것’을 씹을 때와도 같은 생경함과 이질감”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평론가나 관객들이 내 작품에서 ‘날 것을 씹는 생경함’을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아마도 1991년 서울 자하문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혼돈의 숲에서> 때가 아닌가싶다. 그때 나는 생선을 소재로 한 ‘화엄’이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화엄’은 작은 생선이 한 마리씩 들어 있는 수십 개의 비닐 봉지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는 작품으로 생선들은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의 번쩍이는 구슬이 매달려있는 화려한 머리핀들로 장식되어 있다. 전시회 일정이 하루 이틀 지날수록 내 작품에서는 생선 썩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려다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입구에서 발길을 돌리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내가 ‘화엄’을 구상했던 것은 눈으로 보는 것 뿐 아니라, 코로 냄새를 맡는 것도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작품 ‘화엄’은 외국 큐레이터들의 관심을 끌어 일본, 호주, 영국, 독일 등에서도 선보여 큰 반응을 얻었다. 1997년 1월, 나는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모마’란 애칭으로 더 유명한 이 미술관은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전세계 현대화단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곳들 중의 하나이다. 현대미술관전을 통해 나는 비로소 국제적인 예술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뉴욕현대미술관 초대전의 출품작이 바로 ‘화엄(Majestic Splendor)’이었다. 나는 전시장 입구 벽면에 실제 생선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 70여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안쪽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투명 유리상자를 설치했다. 냉장기능이 갖춰진 이 유리상자 안에는 생선 60여 마리와 야한 색깔의 온갖 장식물로 치장한 커다란 인조머리칼 타래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제대로 전시되지 못했다. 내 주문에 따라 미술관측이 제작한 이 특수 유리 냉장고가 생선 썩는 냄새를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일부는 개막 다음날 철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미술관 관계자는 모든 상황을 작가 책임으로 미루고 나 몰라라 하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시아의 여성작가이기에 당해야 했던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그대로 넘어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현지의 예술전문변호사까지 고용해 미술관을 계약위반으로 고소했다.

결국 내 뜻대로 미술관측의 정중한 사과와 함께 손해배상을 받아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내가 국제무대에 서는데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까 우려를 많이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이 사건직후 프랑스 리용비엔날레의 한 관계자로부터 ‘화엄’을 오리지널 그대로 리용에서 전시하자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논문 쓰듯 연구하며 작품 만들어

내 작품은 과거에 비해 훨씬 복잡해지고 있다. 10년 전에 작업을 할 때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그럴 때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 한달 정도 걸렸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것의 열배 스무배의 시간이 걸린다. 이제 나는 작품을 훨씬 더 오래 만진다. 예전처럼 아이디어의 단계에서 바로 제작으로 옮기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훈련을 해왔다. 내가 작업에 접근하는 태도는 매우 학구적이다.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그것을 내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그려서 매일 보는 공간에 붙여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오가며 쳐다보면서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달시킨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아이디어로부터 다른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발달시켜 나간다. 아이디어들 중 어떤 것은 제작에 옮기고, 어떤 것은 아직도 아이디어 상태로 진행 중인 것도 있다. 그러다 보니까 작업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6년 전부터 이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이 방식을 권한다. 작가가 스스로에게 공부를 시키는 아주 훌륭한 학습방법이라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에게 있어 필수적이다. 흔히 예술가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며, 술을 많이 마시고, 매일 밤 절망적으로 좌절하다 어느 순간 영감이 떠올라 순식간에 작품을 만들어 낼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술(藝術)의 술(術)은 테크닉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예술가의 영감을 가졌다해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테크닉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훈련을 통해서만이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때론 게으름을 피울 때도 있지만 6년째 하루 8시간에서 최소한 6시간 정도 빠짐없이 일을 계속해 오고 있다. 나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아침 9시면 어김없이 작업을 시작해 저녁 5~6시면 끝낸다. 저녁 시간은 집안 일도 하고 텔레비젼이나 비디오를 보면서 논다. 밤늦게까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시간과 체력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작품을 만들 때 나는 논문을 쓴다는 생각을 갖는다.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단 그 작품에 쓰일 재료에 대한 연구에 들어간다.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재료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재료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서 비디오 작품을 한다고 하면 비디오의 매커니즘을 우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비디오와 사회의 관계도 알아야 한다. 비디오가 어디에서 나온 거고, 그것이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아이디어를 하나 잡으면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나는 먼저 관련 책자를 찾아보고, 조사를 다니고, 공부에 몰두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과 그 사물에 부여된 기존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창작이라고 할수 없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재료들이라도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나는 익숙한 것에 숨어 있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 모든 과정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기만 하다면 무엇 때문에 예술가가 되겠는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나는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2000년 가을까지 독일, 미국, 일본 등지에 무려 다섯 개의 전시회가 잡혀 있다. 나는 요즘 내 이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곤 해서 참 싫었는데... 그런데 내 이름 불은 날일 변(日)에 날 출(出)이 합해진, 해 돋을 불(日出)자로 ‘먼동이 터 오는 새벽’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세계를 향해 비상하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지금의 나를 고대하며 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는지도 모르겠다.



땀방울에 비친 그녀들의 이야기

글쓴이 신경숙 외 18인

펴낸곳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주소 135-102 서울시 강남구 청담2동 15-1

전화 3485-5000(代)

팩시밀리 3485-5200

등록번호 제16-1681호

제1판 제1쇄 찍은날 1999년 10월 30일

펴낸날 1999년 10월 30일

ⓒ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교육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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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3

이 일을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가진 재능은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 애들 둥둥 날아다니게 만드는 게 아닐까.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애들 얼굴이 환해진다.

애들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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