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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예술가에게 성공은 없다 다만 성장이 있을 뿐

제목: 예술가에게 성공은 없다 다만 성장이 있을 뿐

설치미술가 / 이불


지난 6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후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아마추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 작품은 대중문화의 상징인 팝송, 특히 사랑을 주제로 한 90곡의 노래를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2개의 노래방 캡슐과 함께 설치한 것이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는 한국을 포함해 세계 60개국을 대표하는 작가 250명이 참여했다.이 미술전에서 특별상은 참여한 작가들 중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에게 주는 것으로 나는 베냉, 핀란드. 폴란드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공동으로 이 상을 받았다. 이번 수상은 나에게 ‘작은’ 의미가 있다.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미술전에서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라기 보다는 아시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여성작가인 나의 작품세계 속에 세계인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나는 이름이 외자인데다 특이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다. 게다가 왼손잡이여서 선생님들이 오른손 쓰는 훈련을 시키시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가 그냥 왼손을 쓰게 놔두라고 말씀하셔서 오른손쓰기 훈련은 계속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부모님은 나를 사립학교에 보냈다. 생활수준이 차이가 있었던 탓으로 부유한 집안의 또래 친구들과 나는 쉽게 어울릴 수 없었다. 비록 중간에 공립학교로 전학을 하긴 했지만 친구들의 대수롭지 않은 놀림에도 쉽게 열등감을 느낄 수 있던 그 어린 나이에 내가 받은 정신적인 상처는 컸다. 부모님은 모두 사회운동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는 느닷없이 형사들이 들이닥쳐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일이 잦았다. 한곳에 오래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이사를 많이 다니기도 했고 친척들의 발걸음도 뜸했다. 어린 나이라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우리 집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바깥으로 나돌기보다는 집안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기를 좋아했다. 그 시절 유일한 내 친구는 책이었다. 맛있는 과자를 숨겨 놓고 야금야금 몰래 꺼내먹듯 집안에 있는 모든 책에 순서를 정해 읽어 나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동화와 위인전과 세계명작들이 만든 세상살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일생을 사로 잡아버린 한 인물을 만났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우연히 잡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위인전을 읽으면서 나는 의사이자 과학자이자 조각가였던 그에게 흠뻑 빠져 버렸다. 아, 예술가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 책을 읽은 이후 단박에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평범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나는 “특별하게 살아야 한다”는 자기암시를 해왔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삶이 더욱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만큼 특별한 사람이 또 있으랴! ‘특별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생존전략 같은 것이다. 나의 환경이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갖게 되는 비젼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면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과 어울려 닮아지기보다는 나만의 세계 속에 빠져들어 다른 말과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에 더 몰두했다. 그래서 그럴까.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 파격적, 도발적, 게릴라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것이 내 작품 속에 들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를 꿈꿔왔던 나는 1982년 대학(홍익대학교 조소과)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좌절감 같은 것을 느꼈다. 목숨걸고 치열하게 공부할 작정이었던 내가 보기에 대학이란 공간에는 대학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들, 취미 정도로 그림이나 조각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면 어린 시절 위인전에서 만났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같은 예술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환상 속의 그대’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술의 혼이 지글지글 끊어 넘치는 용광로 같은 공간을 기대했던 나에게 대학은 너무 밋밋한 곳이었다.

3학년을 마치고 나는 휴학계를 냈다. 그땐 아예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휴학하는 동안 이것저것 잡다하게 경험했다. 연극을 하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러 다니기도 했다. 훗날 이 경험은 나의 퍼포먼스 작업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게 된다. 짧지 않는 방황을 끝내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배우고 익힐 것이 그곳에는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돌이켜보면 대학시절의 방황은 작가가 되는 길은 절망과 좌절의 연속임을 스스로에게 알리는 애교스러운 경고에 불과했다.

1987년 여름이었다. 내 작업실이 경기도 원당에 있었는데 그 즈음 그곳에 큰 홍수가 났다. 건물의 지하실을 얻어 만든 작업실이 완전히 물에 잠겨버렸다. 며칠을 발만 동동거리다 겨우 들어가 봤더니 대학 때부터 5년 남짓 몰두해왔던 작품들이 몽땅 다 물에 잠겨 버렸다. 흙물, 똥물로 뒤덮혀 있는 작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너무 황당해서 아무도 없는 벌판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의 최악은 없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목놓아 엉엉 울었다.

그러다 문득 내 상황이 ‘이불, 5년 동안 만든 작품이 물에 잠겨 작가생활을 그만두다’라는 한 문장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한 문장으로 떠올린 내 상황이 너무 코믹하게 느껴졌다. ‘홍수가 나서 작품이 물에 잠기다니,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다니 하하, 웃긴다...’ 벌판에 혼자 주저앉아 통곡을 하다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갑자지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비실비실 빠져 나오던 웃음이 급기야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얼굴에는 온통 눈물 범벅인 채로 배꼽이 빠져라 웃어 제켰다. 한바탕 웃고 나서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전화부터 했다. 카메라를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카메라 셔터가 찰칵거리는 중에 나는 흙물, 똥물에 뒤범벅된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지하 작업실에서 꺼내 공터에 모아 놓았다. 비록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지만 한곳에 수북히 쌓인 그것들 속에는 지난 5년간의 내 땀과 눈물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나는 작품들을 한곳에 쌓아 놓고 휘발유를 뿌리고 성냥불을 던졌다. ‘확’ 하고 화염이 솟아올랐다. ‘안녕, 나의 5년이여... 네가 있었기에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단다...’ 그 모든 과정은 사진으로 남았다. ‘이불의 새출발’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하나의 완벽한 퍼포먼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에서도 나를 붙들어 맬 수 있는 자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작가에게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절망적이기보다는 낙천적인 것에 가까운 바로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 위기가 와도 절망하지 않고 한순간에 긍정적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다. 그것이 훈련을 통해 얻어진 것인지 내가 처음부터 타고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자기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그런 힘이 없는 사람은, 혹은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나를 지키는 힘이 작품을 만든다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기회가 많은데 그때 학생들에게 꼭 물어본다. “무엇 때문에 예술가가 되려고 하느냐”고. “죽고 살기로, 본능과도 같이 할 자신이 없으면 그리고 뭔가를 꼭 해내야겠다는 야심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거다, 10년을 해봐라 너희 중 90%는 포기하고 말거다, 잘한다는 소리도 못 듣고, 돈도 벌지 못할 거고, 자기 성취감도 못 느낄 것이다” 고 말한다. 다소 냉정하다 싶지만 내가 겪어온 현실이 바로 그렇게 때문에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예술가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무엇을 하든 본능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빠져 들어가듯 작품에 매달려야 된다. 그리고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와도, 바닥까지 떨어질 것 같은 자기 자신을 잡고 있어야 된다. 누군가는 말한다. 시험삼아 자기를 최악의 상황까지 떨어뜨려 본다고. 그러나 그건 말이 안된다. 인간이라면 두려움 때문에라도 자기를 밑바닥까지 집어 던질 수 없다. 그건 곧 포기를 의미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상황에 빠져들더라도 그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연히 멋있는 작가가 되겠다거나, TV나 신문, 잡지를 통해서 본 아무개 작가가 멋져 보였다고 해서 그것을 보고 목표를 삼으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다. 내가 공식무대에 데뷔 한 것은 1987년이다. 그러니까 데뷔 한지 10년이 넘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해 온지는 30년이 되어간다. 그만큼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잘 나가는’ 작가가 되겠다던가, 어떤 전시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 본 적이 없다. 꿈이 구체적일수록 실현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러나 그런 꿈을 목표로 잡았을 때 그것을 성취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예술가는 자기 내부의 야심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루어낼 때까지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어시스턴트(작가를 보조하는 사람)하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왜 예술가가 되려고 하느냐고 물어본다. 대답은 비슷하다. “내 안에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있다”며 “이 길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동안 끄적거렸던 것을 뭐든 다 가져와 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자기 내부에 “끌어 오르는 듯한 뭔가가 있다”며 그것을 예술적 끼나 열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아니다.

예술가의 영감이란 심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물리적인 힘이다. 그 힘은 항상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는 끄적거린 낙서라도 쌓인다. 평소에 한 줄의 노트도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소설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별가치가 없어 보이는 낙서장이라고 쌓이는 것, 다소 유치하다 하더라도 아이디어를 그려놓은 종이가 쌓이는 것이 모두 훈련이 된다. 그 훈련 끝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결과물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왜 하는 건지, 어떻게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지 모르는 사이에 쌓여 있는 결과물들을 보면서 자신이 어느 지점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내 안에 어떤 종류의 열정이 들어 있는지 면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 나 여자고, 아시아인이고, 한국인이다!

유명한 예술가들은 누가 보기에도 멋있다.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 중에는 한순간에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어서 그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을 흉내낸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에 대해서는 보려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하루아침에 뭔가가 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다. 국내를 넘어 외국까지 이름을 알리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87년 데뷔한 후 국내외에 ‘설치미술가 이불’로 알려지기까지 꼭 10여년의 무명 시절을 견뎌내야 했다. 그 10년의 무명작가 시절 내가 이겨내야 했던 차별이 많았다. 여성작가, 그것도 아시아의 여성작가라는 내 정체성은 국제무대에서 핸디캡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나의 태생적 환경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 그 핸디캡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 작품을 통해 당당하게 드러낸다. 여성이기 때문에,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내가 권력구조를 주제로 작업을 하는 것은 그런 권력구조 안에 바로 나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크고 작은 권력구조 속에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구조들 중에는 선명한 것도 있지만,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미쳐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것들도 있다. 그것들을 살펴보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나의 작품활동인 셈이다. 자기가 가진 조건들이 변명거리가 되서는 안된다. “나는 이래서 뭐가 안돼”라는 말은 특히 예술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흔히 우리가 무슨 일은 할 때 어렵다, 힘들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과는 다르다.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에너지가 더 많이 들어가고,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일 뿐이다.

예술에 절대 장르란 없다

나는 ‘예술에 절대 장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 왔다.

1987년 열린 첫번째 개인전 때 나는 솜을 집어넣어 팽창한 몸체에 손, 발, 꼬리가 여기저기에서 삐져 나온 작품을 직접 입고 대중 앞에 섰다. 1989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발가벗은 채 거꾸로 매달리는 퍼포먼스 ‘낙태’를 공연했고, 1990년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방독면을 쓴 채 더러운 신문지로 밑을 닦는 퍼포먼스 ‘아토일렛(Artoilet)’을 공연했다.

1994년에는 쇠사슬로 내 목을 매단 ‘여성 그 다름과 힘’을 발표했다. 나는 데뷔 직후 초창기 2~3년은 주로 여성의 삶과 체험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공연에 주력해 왔다. 그 때 내 작품의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지금도 내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한 미술평론가는 내 작품을 “‘날것’을 씹을 때와도 같은 생경함과 이질감”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평론가나 관객들이 내 작품에서 ‘날 것을 씹는 생경함’을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아마도 1991년 서울 자하문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혼돈의 숲에서> 때가 아닌가싶다. 그때 나는 생선을 소재로 한 ‘화엄’이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화엄’은 작은 생선이 한 마리씩 들어 있는 수십 개의 비닐 봉지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는 작품으로 생선들은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의 번쩍이는 구슬이 매달려있는 화려한 머리핀들로 장식되어 있다. 전시회 일정이 하루 이틀 지날수록 내 작품에서는 생선 썩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려다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입구에서 발길을 돌리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내가 ‘화엄’을 구상했던 것은 눈으로 보는 것 뿐 아니라, 코로 냄새를 맡는 것도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작품 ‘화엄’은 외국 큐레이터들의 관심을 끌어 일본, 호주, 영국, 독일 등에서도 선보여 큰 반응을 얻었다. 1997년 1월, 나는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모마’란 애칭으로 더 유명한 이 미술관은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전세계 현대화단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곳들 중의 하나이다. 현대미술관전을 통해 나는 비로소 국제적인 예술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뉴욕현대미술관 초대전의 출품작이 바로 ‘화엄(Majestic Splendor)’이었다. 나는 전시장 입구 벽면에 실제 생선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 70여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안쪽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투명 유리상자를 설치했다. 냉장기능이 갖춰진 이 유리상자 안에는 생선 60여 마리와 야한 색깔의 온갖 장식물로 치장한 커다란 인조머리칼 타래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제대로 전시되지 못했다. 내 주문에 따라 미술관측이 제작한 이 특수 유리 냉장고가 생선 썩는 냄새를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일부는 개막 다음날 철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미술관 관계자는 모든 상황을 작가 책임으로 미루고 나 몰라라 하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시아의 여성작가이기에 당해야 했던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그대로 넘어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현지의 예술전문변호사까지 고용해 미술관을 계약위반으로 고소했다.

결국 내 뜻대로 미술관측의 정중한 사과와 함께 손해배상을 받아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내가 국제무대에 서는데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까 우려를 많이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이 사건직후 프랑스 리용비엔날레의 한 관계자로부터 ‘화엄’을 오리지널 그대로 리용에서 전시하자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논문 쓰듯 연구하며 작품 만들어

내 작품은 과거에 비해 훨씬 복잡해지고 있다. 10년 전에 작업을 할 때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그럴 때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 한달 정도 걸렸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것의 열배 스무배의 시간이 걸린다. 이제 나는 작품을 훨씬 더 오래 만진다. 예전처럼 아이디어의 단계에서 바로 제작으로 옮기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훈련을 해왔다. 내가 작업에 접근하는 태도는 매우 학구적이다.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그것을 내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그려서 매일 보는 공간에 붙여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오가며 쳐다보면서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달시킨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아이디어로부터 다른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발달시켜 나간다. 아이디어들 중 어떤 것은 제작에 옮기고, 어떤 것은 아직도 아이디어 상태로 진행 중인 것도 있다. 그러다 보니까 작업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6년 전부터 이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이 방식을 권한다. 작가가 스스로에게 공부를 시키는 아주 훌륭한 학습방법이라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에게 있어 필수적이다. 흔히 예술가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며, 술을 많이 마시고, 매일 밤 절망적으로 좌절하다 어느 순간 영감이 떠올라 순식간에 작품을 만들어 낼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술(藝術)의 술(術)은 테크닉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예술가의 영감을 가졌다해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테크닉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훈련을 통해서만이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때론 게으름을 피울 때도 있지만 6년째 하루 8시간에서 최소한 6시간 정도 빠짐없이 일을 계속해 오고 있다. 나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아침 9시면 어김없이 작업을 시작해 저녁 5~6시면 끝낸다. 저녁 시간은 집안 일도 하고 텔레비젼이나 비디오를 보면서 논다. 밤늦게까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시간과 체력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작품을 만들 때 나는 논문을 쓴다는 생각을 갖는다.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단 그 작품에 쓰일 재료에 대한 연구에 들어간다.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재료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재료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서 비디오 작품을 한다고 하면 비디오의 매커니즘을 우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비디오와 사회의 관계도 알아야 한다. 비디오가 어디에서 나온 거고, 그것이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아이디어를 하나 잡으면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나는 먼저 관련 책자를 찾아보고, 조사를 다니고, 공부에 몰두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과 그 사물에 부여된 기존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창작이라고 할수 없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재료들이라도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나는 익숙한 것에 숨어 있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 모든 과정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기만 하다면 무엇 때문에 예술가가 되겠는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나는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2000년 가을까지 독일, 미국, 일본 등지에 무려 다섯 개의 전시회가 잡혀 있다. 나는 요즘 내 이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곤 해서 참 싫었는데... 그런데 내 이름 불은 날일 변(日)에 날 출(出)이 합해진, 해 돋을 불(日出)자로 ‘먼동이 터 오는 새벽’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세계를 향해 비상하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지금의 나를 고대하며 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는지도 모르겠다.



땀방울에 비친 그녀들의 이야기

글쓴이 신경숙 외 18인

펴낸곳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주소 135-102 서울시 강남구 청담2동 15-1

전화 3485-5000(代)

팩시밀리 3485-5200

등록번호 제16-1681호

제1판 제1쇄 찍은날 1999년 10월 30일

펴낸날 1999년 10월 30일

ⓒ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교육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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