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6년은 문화대혁명이 중국에서 벌어진 지 40년이 된 해였고, KBS에서는 문화대혁명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다큐멘터리는 첫째, 문화대혁명 당시의 폭력적, 비인간적 만행들에 초점을 맞추어, 둘째, 문화대혁명이 낳은 참상으로 인해 피해받은 생존자들의 상처받은 기억들을 소개하면서, 셋째, 문화대혁명에 홍위병으로 참가하였던 인물들의, 일종의 자기반성을 비추고 있다.
노골적으로 다큐는 문화대혁명을 반인륜적인,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역사로 규정한다. 나는 다큐가 다소 편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다큐가 보여주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또 어떤 이유에서 다큐는 문화대혁명의 다른 면들을 보여주지 않은 것일까?
2. 일단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중국을 사회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데에서부터 불만족스러웠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와 1949년 중화인민정부 수립 선포 이후 중국을 사회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대단히 왜곡된 도식이다. 그 당시의 러시아나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고 인정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당시 러시아와 중국의 지배권력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게 있었던가?
2-1. 여러가지 논점이 있겠지만, 어쨌든 맑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이후 도래할 사회주의 체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있어서 대단히 성숙한 사회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성숙함이란, 최소한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물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 생활조건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평등한 상태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1919년 러시아는 전 국토의 3/4이 원시사회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베리아 벌판은 유목민들의 부락이 띄엄띄엄 있었을 뿐이다. 서남부의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여전히 목재 농기구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여전히 노동자, 농민들은 절대적인 빈곤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0월 혁명으로 완전하게 민족해방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혁명 이후 트로츠키는 적군을 이끌고 서방 부르주아지 세력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과의 내전을 치뤄야만 했다. 소련이 수립된 이후에도 식량자급률은 100%를 채운 적이 없다. 이를 사회주의라 부를 수 있는가? 소련의 지도부가 우주개발에 투여한 예산을 당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을 위해서 할애하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1949년의 중국 역시 황폐하기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공업지대는 동남해안 일부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그 나머지 전역은 전근대적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근 30여년에 이르는 내전과 항일전쟁으로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중국의 상태로 모택동은 중화인민정부 수립 당시 사회주의를 선포하지 않았다. 여전히 흉년이 들면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몇 천 만 명에 이르는 인민들이) 빙하기를 맞은 것 마냥 이곳저곳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1958년 이후 발생한 대흉년으로 수 많은 아사자들이 발생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건만 우리는 모택동의 중국을 사회주의 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북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흉년 한 번 들면 몇 백 만이 굶어 죽는 사회를 놓고, 인류가 형성할 가장 진보적인 체제라고 하는 사회주의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
2-2.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모든 혁명은 사회주의일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아직 답을 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들을 근거로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혁명을 검토할 때, 그 두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에 이르기 전에 발생가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정도였다고 바라보는 것이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중국의 경우에 더더욱 그러하다. 1930년 말 일본군과 국민당에 의해서 밀리고 또 밀려 중국 서북지방에서 포위당했던 홍군 게릴라 부대는 모택동의 지도 아래 일종의 전민족단결 전략을 채택한다. 일제에 항거하는 모든 중국 민족(그들이 부르주아지든, 보수반동분자이든, 국민당이든, 봉건지주이든 친일부역자만 아니라면)은 단결하여 항일투쟁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이 전략은 대단히 유효한 성과를 거두어서 항일 전쟁에 있어서 공산당이 주도권을 쥘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결국 일본이 패망하고, 국민당도 몰아낸 모택동은 '신민주주의' 기치 아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의 주석이 된다. 그는 약속을 지켜서 모든 영역에서의 계급 갈등을 봉합하고, 통일된 공화국을 일단 건설하는 데에 주력한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의 중국공산당의 활동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되지 않나 싶다. 첫째, 국토의 통일, 둘째 공화국 건설, 셋째, 민족 해방. 이것은 NLPDR 노선 중에서도 NL, 즉 민족해방을 이룬 뒤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단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이 이룬 혁명은 아직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라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2-3. 중국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모택동은 부르주아지를 숙청하지도, 보수반동분자들을 처단하지도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공산당에 대한 인민의 지지는 확고하였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지 역시 충만하였다. 곧 중국 내에서 부르주아지와 보수반동분자들은 자동적으로 해체될 것처럼 여겨졌다. 자라나는 대부분의 청년들은 철저하게 공산당 편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모택동이 공산주의에 대한 강렬한 신념으로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택동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이후 대략 20년 뒤에 완수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전혀 다른 뜻을 갖는다. 우리가 문화대혁명을 전자의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들의 눈에 포착되는 것은 주로 모택동과 4인방의 정치적 패악질과 그로 인한 처참한 재앙일 것이고, 후자의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문화대혁명의 '문화'가 가리우는 혁명 이면의 것들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전자의 맥락에서 본다면,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가 저지른 잔혹한 범죄행위가 될 것이고, 후자의 맥락에서 본다면, 전근대적 현상으로 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문화대혁명의 폭력성은 사회주의를 욕 보이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대장정 당시 홍군의 훌륭한 지도자들이 이 혁명 기간에 짐승처럼 대우받다가 죽어갔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숙청되었다. 비단 공산당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너무나도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초등학생들이 교사에게 침을 뱉으며 뺨을 때렸다는 일화들은 너무나 많다. 홍군의 지도자였던 팽덕회의 뺨을 때렸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로 치면 김일성에게 숙청 당한 박헌영의 뺨을 김일성 대학 신입생이 때린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다.
체 게바라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그런 것이 20세기 중반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정서였나 보다. 하긴 그들은 총을 들고 싸워야했으니... 하지만 찝찝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문화대혁명 당시 발생한 군중의 폭력이야말로 1970년 전후의 중국이 아직 대체로 전근대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대약진운동을 생각해보자. 정말 몇천만 평은 되고도 남을 것 같은 평야에서 개미만큼이나 작아보이는 인민들이 피라미드 세우듯 집단 노역하는 모습을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모택동의 모습. 이게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작태인가. 파라오나 진시황 따위가 연상되지 않은가.
또 100만인 대회에 참가한 정말 100만 명의 중국 인민들이 모택동 소책자를 들고 환호하는 전경을 떠올려보자. 로마의 개선장군이 귀국할 때, 이를 환영하는 로마인들이 연상되지 않은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저지른 폭력의 양상은 너무 야만적이어서 <몬도가네>나 <홀로코스트>를 보는 듯 하다.
모택동에 의해서 숙청당한 유소기를 지지하다가 반동분자로 몰린 한 여성 공산당원은 총살당하기 전 '공산 당 만세'를 외치려고 하자, 그녀의 입을 철사로 꿰매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등 뒤에서 철사를 잡아 당겨 말을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이런 일들은 중국 역사 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였다고 생각한다.
인민들은 자신들이 당한 대로 복수하였다.
즉, 인민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해왔던 대로 똑같이 행한 것 뿐이다.
문제는 예전에는 한 지역의 성이나 장악하였었지만, 이번에는 전체 국가가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였으리라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30여 년 간의 내전과 항일 게릴라를 통해서 얻은 전투적 경험들이 있고, 또 혁명이나 전투에 실패하였을 경우 당하였던 바가 있었다.
문화대혁명에서 발생한 집단적 폭력은 그러므로 중국 사회가 사회주의 체제여서가 아니라, 그 이전 단계의 체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더 많이 근원한다 하겠다.
3-1. 문화대혁명의, 전근대의 현상에 포함될 것 같은 폭력적 단면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혁명 안에 들어가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 어떠한 폭력이 발생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문화대혁명의 경우는 여러가지 변수가 있는데, 무엇이 분명한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첫째,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의 실패와 대흉년으로 인한 인민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한 모택동의 공작
둘째, 사회주의 노선의 수정에 대한 선진 공산당원들의 분노
셋째, 과거유산에 대한 근대적 청산
넷째, 도시를 제외한 대다수의 농촌 지역에서 발생한 계급 갈등, 또는 문화 갈등
네 가지 모두 다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정확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나는 네번째 이유에 마음이 끌렸다.
앞서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중화인민공화국은 민족연합노선에 따라 수립된 국가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공산당의 노선과 대립하는 부르주아지, 보수반동, 봉건지주 세력이 혁명세력과 공존하고 있었다. 문제는 항상 농촌이다. 공산당의 지배적인 구성원도 농민들이고, 농촌에서 벌어진 지주와 소작농 간의 계급갈등을 이해해야 중국적 사회주의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공산당의 핵심이 동쪽 해안가를 따라 형성된 도시들로 집중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세 상태로 고스란히 남아 있던 농촌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봉건질서가 부활하였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한 때 쫓겨났거나 또는 지식인이라고 홀대 받던 교사가 다시 돌아와 교편을 잡았을 것이고, 반동적인 부자가 떵떵거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관료들의 횡포로 인한 폐해는 심각하여 생산물에 대한 보고도, 그 결과 얻어지는 보상에 대한 분배도 정상적이지 못하여 인민들의 분노는 재차 누적되고 있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근원이 팽덕회에 대한 숙청에서부터 발원하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 문화대혁명은 부패하고 수정주의적인 관료를 그 적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발생한 폭력들의 양상을 살펴보건대, 그 대상은 봉건질서의 대변자들까지 포함해야할 것이고, 거기서 이루어진 복수의 정도들은 그 때까지 인민들이 어떻게 당하여왔는가를 가늠케 하여준다.
하지만 이건 오로지 가설일 따름이다. 주로 인민들은 항상 그래왔으니까.
4.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국에서는 올림말이 대부분 사라졌다고 알고 있다. 노인들과 소년이 대화를 나누어도 그것은 한글 식이 아닌 영어 식이다. 기성세대로서는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언어가 바뀌니 자연스럽게 생활습관이나 의식도 다 바뀌기 마련이다.
다큐멘터리는 문화대혁명의 이러한 영향을 현재 중국 사회에서 도덕적 진공 상태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늘날 중국에서는 다시 공자와 유교가, 삼강오륜이 유행하고 있다. 모택동의 붉은 소책자가 1000만부 가량 나갔었다는데, 공자와 유교 관련 서적이 그와 비슷한 만큼 판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존칭이나 올림말이 있는 것이 좋은가, 없는 것이 좋은가. 그것이 정말로 필요하단 말인가. 만일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그것들이 굳이 언어로 표현되어야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언어로 표현되고 들음으로써 일상적으로 우리 의식을 훈육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마음인 법.